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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76화 (176/185)

제176화.

클레멘스에도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에 들어섰다는 것을 보여 주듯 바람은 냉기를 품었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이들의 뺨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기 쉬웠다.

계절이 돌고 돌아 다시 추운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1년이 참 빠르게 지나갔지.'

클레멘스의 겨울은 달갑지 않았다.

내게는 너무나도 춥고 외로웠던 기억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따뜻해지다가도 냉혹한 바람은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던 날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마차 밖을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서 내 어깨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라그나르의 뺨을 슬쩍 만졌다.

평소와 같은 차가운 체온에 흠칫 놀라다가도 내 온기가 스며 미지 근해지자 라그나르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 좋았다.

"안 피곤하다더니.”

결국, 돌아오자마자 그간 밀린 업무때문에 일주일은 넘게 밤을 지새우며 일을 했던 것 같다.

나보고 무리를 하지 말라고 했을 때의 심정이 이랬을까 할 정도로 라그나르가 나를 걱정했던 날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보육원의 겨울나기 일정이 얼추끝나고 이제 정말 쉴 수 있겠다.

싶어 드디어 요제프의 레어를 함께 찾아가기로 했는데 또 일정이 변경되었다.

시몬이 우리에게 주변의 시선을 피해 몰래 연락을 넣은 것이다.

만남의 장소는 신전이었고, 아빠의 도움으로 신전의 빈 기도실을 잠시나마 빌릴 수 있었다.

"어쩐지 추억이네."

시몬의 지위를 생각해서 몰래몰래 만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떠올랐다.

“확인한 걸까.”

분명 이렇게 우리끼리만 만나기를 원하는 이유는 도장을 확인해본 것이겠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시몬이 마음의 무게를 지지 않기를 바라는 동안 어느새 마차는 신전에 도착해 있었다.

* * *

“아바마마께서 병상에서 일어나셨어.”

다행이라며 축하한다는 말을 던지기에는 시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스왈드에서 돌아온 후로 계속 지켜보았지만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해 보이셨지.”

“그런데 왜 너는 죽을상이야.”

“그래. 폐하께서 쾌차하셨으니 일도 줄어들고 좋을 텐데.”

우리의 말에 시몬의 표정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에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도장의 문양이 있던 곳은 집무실 책상 아래에 숨겨져 있었어.

각인된 문양 아래 무슨 공간이 있는 게 분명해.”

그 안에 무언가 숨겨져 있을 것이란 확신이 담겨 있었다.

"…똑같은 문양인지 확인은?”

라그나르의 물음에 시몬은 얕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이런’시몬은 차마 그 안을 열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나 보다.

“오스왈드에서 돌아와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바로 열어 보려 했는데. 하필….”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시몬은 드디어 아버지의 죄를 직접 확인할 용기를 만들었는데 그러기 무섭게 기회가 박탈되어 버렸다.

"요 며칠 기회를 노려 봤지만, 전혀 자리를 비울 생각이 없어 보였어.”

“혹시 네가 의심하고 있단 걸 알아차리신 것은 아니고?”

내 질문에 시몬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신 것 같아. 요새 좀 바쁘시거든.”

“웬만한 일은 네가 해 놓지 않았어?”

“오스왈드 황실에서 선전 포고했잖아. 오벤 백작의 공범을 찾는데 바쁘셔.”

시몬은 그 말과 함께 한숨을 내뱉었다.

“헤로니스 공작과도 계속해서 면담하고 있다 들었어. 항상 공작이 화를 내며 나온다고 하지만 모르지.”

두 사람의 협동 하에 모르는 자가 누명을 쓰게 될지도.

시몬이 덧붙인 말에 우리는 할말을 잃어버렸다.

'진범은 베르돌트지만 워낙 신출귀몰하니 잡기 힘들겠지.'

오스왈드에서 선전포고한 이상 황실에서는 그에 대한 노력을 보여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헤로니스 공작을 범인으로 몰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고."

“책임을 지라고 강요한다는 거야?”

"어디까지나 내 의심일 뿐이야.

분명 그가 개입한 일이기는 하잖아. 다만 여기에 아바마마 또한 개입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확인치 못해 찜찜할 뿐이야.”

시몬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우리는 잠시 머리를 맞대 보았다.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곧 폐하의 탄신연이 열린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때를 이용하면 어때?”

“그러고 보니 그날은 아바마마께서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니까...”

시몬이 나쁘지 않다 생각했는지 꽤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줬다.

가만히 듣고 있던 라그나르도 말을 얹었다.

“그럼 내가 망을 볼게.”

“이 정도도 혼자 못 해서…. 고맙다.”

시몬이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괜찮겠냐는 말은 굳이 묻지 않았다.

이것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나도 시몬도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겠지.

내 표정에 걱정이 서렸는지 시몬이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를 따라 흐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걱정을 삼켰다.

*

얼추 시몬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이번에는 라그나르가 본론을 꺼내었다.

“이야기가 끝났으면 어서 일어나야 할 것 같아. 오늘 대부를 만나러 가기로 해서.”

“대부라면 초대 황제와 친구였다던…?”

시몬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다르게 떨렸으나 라그나르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예정대로라면 오스왈드에서 돌아오자마자였어야 했는데 늦어졌지. 이왕이면 오늘 다녀오려고."

“둘이서?"

라그나르는 시몬이 자꾸 묻는 것이 귀찮은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워하는 시몬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나 보다.

시몬의 두 눈이 마치 어린 시절 처음 친구가 되었을 때처럼 기대감으로 가득 차 반짝였다.

"나도.”

“응?”

"나도 만나 뵙고 싶어, 네 대부 님. 초대 황제와 친구였다니 꼭 뵙고 싶어.”

답지 않은 고집이었다.

라그나르는 이러한 시몬의 반응에 놀라다가도 한심하다는 듯 픽웃었다.

"너도 드래곤이랑 친구란 것 잊은 건 아니지?”

"너랑 고룡이신 네 대부님이랑 같냐?”

“그럼 달라?"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기 전에 중재하기 위해 둘 사이로 말을 던졌다.

“산맥 깊은 곳에 숨어 있어서 어서 가 봐야 한다며."

"아, 맞아. 지체할 시간 없지."

라그나르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인다.

시몬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불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프네, 나도 같이 가고 싶어.”

“하지만 일이 많지 않아…? 내일까지 일정을 비워야 할 텐데.”

“아바마마가 하시니까 좀 줄었어. 괜찮아.”

"으음.”

시몬의 간절한 반응에 내가 빠르게 답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자 그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 연인 됐다고 지금 나만 따돌리는 거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일정상 무리일 것 같아서 굳이 묻지 않았는데 시몬의 얼굴에 서 운함이 가득했다.

“그래. 연인들 사이에 눈치 없이끼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황태자인 내가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해?"

아이같이 떼쓰는 목소리에 라그나르가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는 길이 보통 길이 아니야.

다프네야 내가 안고 가면 된다지만 너까지 안을 수는 없잖아.”

"다른 방법은 없고?"

"네가 리카르다 정도 되는 마법사였다면 마법으로 뒤따라오라 했겠지.”

라그나르의 지적에 시몬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토라진 것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자 라그나르가 짜증을 삼키며 시몬을 달래기 시작했다.

"다음번에는 직접 모셔올게."

“언제?"

“베르돌트까지 잡고 제국이 조용해지면.”

“믿어도 되냐.”

“속고만 살았냐.”

“한 번 속은 적이 있던지라."

나스라며 거짓말을 했던 것을 겨냥하는 말에 라그나르가 주먹을 꽉 쥐었으나 한숨을 내쉬며 곧 힘을 풀었다.

'봐준다.'

말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읽혔다.

시몬은 진심 반 장난 반이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에서 물러나려는 듯 피식

“조심히 다녀와.”

* *

정말로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기에 오늘의 모임은 여기까지였다.

시몬은 아쉬움을 삼키며 먼저 신전을 빠져나갔고, 우리도 어느 정도 시간의 격차를 두고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성녀님이 보이질 않네.’

다리를 치료하는데 큰 도움을 주셨던 분인데 찾아와 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일을 다 해결하고 나서 천천히 하자.'

지금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틈이 없으니 조급해하지 말자며 나는 멀어지는 신전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예전에는 신이 원망스러웠는데.'

내게 이러한 운명을 정해 준 신이 원망스러웠고, 나를 싫어한다 생각해 나 역시 신을 미워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고운 눈빛으로 신전을 바라봐 줄 수 있었다.

어쩌면 신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이 정해진 틀에 갇히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난 처음부터 신의 사랑을 받았던 존재일지도.'

인간이어서 신의 생각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라그나르의 마법 덕분에 빠르게 변하는 주변 환경을 알 수 있었다.

어린 날처럼 그의 등에 업힌 채 모자가 달린 두툼한 망토를 꽁꽁챙겨 입고서 옷 틈새가 벌어지지 않도록 꾹 잡고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라그나르의 빠른 움직임 덕분인지 몰라도 다행히 저녁이 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우와.”

입구가 어찌나 거대한지 높은 건물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굉장한 위용이었다.

라그나르는 함정 마법이 설치되어 있다며 앞장섰고, 나는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졸졸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그런데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등골이 오싹해지고, 알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단순히 추워서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밖에서 불고 있는 바람이 더욱 거셌다.

라그나르 또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그의 발걸음이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어떤 분일지 기대가 된다며 소소한 잡담을 하던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긴장이 가득한 채로 아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엉망이 된 레어 안을 목격하게 되었다.

“함정이….”

함정 마법이 실행되었는지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처참하게 부서진 무기들도 속속들이 보였다.

라그나르의 발걸음이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했고, 나 또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주변을 살피며 그의 뒤를 뒤따라갔다.

그리고 드디어 레어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애석하게도 라그나르의 속도를 완전히 따라잡지는 못했기에 그보다 30초 정도 늦게 들어선 것 같다.

라그나르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나 또한 앞에 벌어진 참혹한 광경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드래곤의 시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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