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77화 (177/185)

제177화.

생전에는 아름답게 빛을 뿜었을 것 같은 비늘은 생기를 잃은 채 어둡게 바래 있었다.

탁하게 물든 비늘 사이사이에 보이는 하늘빛은 반짝임을 잃어버렸으나 나스의 머리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대한 몸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굳게 감긴 눈 또한 떠지지 않았다.

“요제프….”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 생각지도 못했기에 나 또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평온한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난장판이 된 주변이 눈에 밟혔다.

분명 누군가와 거칠게 싸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기에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라그나르는 요제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몸에 손을 올렸다.

“차가워. 움직이지를 않아."

라그나르는 한참이고 그 앞에 서 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엉망이 된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 것인지 그의 눈에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베르돌트.”

이를 악물고서 낮게 짓씹듯 내뱉는 목소리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

이런 짓을 할 자는 베르돌트밖에 없다는 듯 확신이 담긴 분노는 오히려 차가울 정도로 오싹하게 느껴졌다.

'베르돌트는 혼혈이라 들었는 데… 고룡인 요제프를 이길 수가 있나?'

이해가 되지 않아 홀로 고민을 하던 도중 라그나르가 요제프를 더 살펴보더니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처럼 표정을 구겼다.

“이미 힘을 잃고 죽어 가던 도중이었던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드래곤은 정해진 수명이 끝나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신의 곁으로 돌아가. 요제프는 자신은 이미 충분히 살았고, 곧 신의 곁으로 갈것이라 했어.”

서서히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던 그를 이렇게 끔찍한 죽음에 이르게 한 짓은 너무도 비겁하지 않은가.

“얼마나 분했을까.”

가히 이 대륙에서 최고라 불릴만한 존재였으니 베르돌트는 요제프의 목숨도 자존심도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꺾어 버린 것이다.

결국, 요제프는 자연의 품에 안겨 신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시체를 남겨 버렸으니까.

“심지어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드래곤 하트가 없어.”

"나쁜 새끼…."

드래곤의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심장까지 잔인하게 앗아 갔다.

“도대체 왜… 도대체 무얼 위해서!”

라그나르는 결국 참던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힘껏 치켜들었다.

상상해서는 안 될 것을 떠올렸는지 창백하게 질린 낯이 낯설었다.

라그나르는 황급히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를 뒤쫓아갔다.

도착한 곳은 수많은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라그나르가 갇혀서 잠도 못 자고 책만 읽었다고 들었을 때는 과장이라 생각했었는데 이 많은 양을 읽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라그나르는 수많은 책 사이에 내가 펼쳐진 장관에 감탄하는 사서도 목적지가 있다는 듯 발을 거침없이 놀렸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 책을 뽑았고, 촤르륵 넘어가는 책장이 멈춘곳에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드래곤이 그려져 있었다.

“베르돌트는 완벽한 드래곤이 되고 싶은 거야. 이를 위해 인간의 생명력도 흡수한 거겠지."

라그나르의 말에 최근까지 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떠올랐다.

"아. 빈민가 사건… 하지만 완벽한 드래곤이라니?”

“요제프에게 들은 적이 있어. 아주 오래전에 드래곤의 피가 섞인 혼혈이 완벽한 드래곤이 되기 위해 생명을 해하고 다녔다는 걸.”

라그나르는 책에 적힌 내용을 한참이고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모르는 고대의 문자였기에 나는 라그나르가 책에 뭐라 적혀 있는지 말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림은 평범한 드래곤 같아 보이지 않는 걸.”

새까맣게 물들어 있는 드래곤은 고작 그림뿐임에도 사악해 보였다.

내 말에 라그나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자식.”

낮게 내뱉은 말에는 언뜻 동정심이 담긴 것도 같았다.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들어서 이딴 짓을 벌이고 다닌 거야.”

부모를 죽이고, 자신을 매정하게버린 유일한 형제이자 자신의 대부를 죽인 학살자.

그 외에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수많은 살생을 저지르기까지.

그 안에 희생된 사람만 해도 엄청났기에 라그나르는 감싸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만 언뜻 본 라그나르의 얼굴은 억울한 것 같았다.

"고작 이딴 것 때문에.….”

아니, 조금 슬퍼 보였던 것 같다.

매마른 눈으로도 어쩐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나는 뒤에서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베르돌트가 하는 건 다 헛짓거리야. 이따위 방법으로는 완전한 드래곤이 될 수 없다고. 오히려….”

라그나르는 작은 목소리로 뒷말을 중얼거리더니 결국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무얼 하지 않아도 그의 최후는 이미 정해져 있던 거야.”

들썩이는 어깨가 오늘따라 작아보여 그저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라그나 르의 추운 마음이 따스해지도록 조용히 감싸 주는 것뿐이었다.

겨울의 추위는 더더욱 매서워졌다.

시몬의 말에 의하면 작년과 비교했을 때 이번 겨울이 굉장히 추워졌다 했다.

나만 추운 게 아닌지라 다행이었다.

그날 라그나르는 자신이 어질러.

놓은 책을 정리하고, 엉망이 된 레어를 정리한 뒤 요제프의 시체를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곧 요제프의 시체가 라그나르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불에 잠겨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불길은 몸을 키웠고, 요제프의 시체는 점점 작아진다.

몇 시간이 지난 뒤 요제프의 시체가 있던 곳에는 하늘색 비늘 몇 개만이 남아 있었다.

비록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으나 마치 자연으로 돌아간 듯 사라진 것이다.

아마 이것은 라그나르가 자신의 대부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을 것이다.

서글퍼 보이는 뒷모습에 나는 차라리 시몬이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나와 라그나르는 예정대로 요제프의 레어에서 머물지 못하고 돌아왔다.

라그나르는 혼자 있기 싫다 했고, 우리는 오래간만에 숲속의 저택에서 함께 밤을 지새웠다.

밤하늘에 떠오른 별은 밝았으나 여전히 날씨는 추웠다.

생명을 앗아 가는 이 차가운 겨울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싫었다.

며칠 동안 일에 매달린 덕인지 아니면 아직 마무리해야 할 목표가 남아서인지 다행히도 라그나르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드디어 황제의 탄신연이 열렸다.

오스왈드 건국제에 자극을 받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작년에는 탄신연 치고 작게 열어 이번에 온 힘을 쏟아부었는지 연회장은 화려했다.

제일 큰 연회장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을 보며 누군가는 생을 마감하여도 사람들의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부모님의 뒤를 따라 라그나 르와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내게로 향하는 흥미로운 시선도 혹은 안타깝게 여기는 시선도 이제는 익숙해져 거슬리지도 않았다.

그저 어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라그나르와 함께 쉬고 싶어진 마음이 더 커서일지도 모른다.

화려한 연회장에서 조용히 샴페인을 들고서 벽의 꽃이 되기를 자처하고 있는데 익숙한 인영들이 보였다.

“신경 쓰여?"

나를 따라 조용히 서 있던 라그나르가 내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챘는지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황제의 탄신연에 불참할 수는 없었는지 헤로니스 공작가에서도 참석한 모양이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뿔뿔이 흩어진 채 헤로니스 공작이 홀로 입장하였고, 그가 들어선 지 한참 후 마리아와 카스토르가 함께 들어섰다.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음에도 마리아와 카스토르는 당당하게 입장하였다.

내가 해 준 말을 기억해서인지 표정에는 얼핏 각오가 서린 듯해 보였다.

다만 주변에는 그게 같잖게 보였나 보다.

귀족 영애들이 우르르 무리를 지어 마리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대화를 빙자한 조롱을 시작했다.

부채로 입을 막으면서 마리아를 깎아내리기 바쁜 모습이 참… 사람들은 배우는 점도 없는 건가 싶었다.

카스토르는 마리아의 손을 잡고서 혼란 속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마리아는 그들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끝까지 모든 말에 답해 주고 있었다.

무리의 중심에 있던 누군가가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무래도 마리아가 자존심을 꺾지 않으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더 보고 싶지 않아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무리에 가까워지자 주변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흥미로운 시선들이 닿는 것에 표정을 일그러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어머, 체이너드 영애!”

내가 다가온 것을 알아차렸는지 화를 내던 영애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웃으며 나를 반겼다.

“마침 잘 오셨어요. 헤로니스 영애께서 영애께 자신은 죄가 없다하였으니 죄인처럼 굴지 않겠다고 답하지 뭐예요!”

“그런가요?”

"네! 어쩜 저렇게 뻔뻔한지 모르겠다니까요!"

이름도 모르는 영애는 내 대답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마리아를 비웃었다.

“제가 일러 준 말이니 그리 생각 지들 마세요.”

"네?"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놀라 굳어졌다.

“헤로니스 영애와 영식은 제게 지은 죄가 없으니 이런 식으로 비난하지 마세요.”

앞에 있는 영애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내가 마리아를 향해 말했다.

“마리아.”

“네!”

“… 지금처럼만 해."

괜히 주변의 시선에 의식하지 말고 당당히 있어라.

내 말의 뜻을 알았는지 마리아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다만 그 미소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헤로니스 공작이 홀로 입성하기에 추문을 이기지 못하고 불참한 줄 알았던 공작 부인이 막 연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탓이다.

그 때문인지 마리아와 카스토르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금세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나는 유니스가 당당한 표정으로 입성하는 것에 어이가 없어 기가 찬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마리아와 카스토르를 비난하던 이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죄를 지은 이들이 따로 있다는 것 아시잖아요. 그리고 저는 눈에 거슬리는 것은 곧바로 치워 버리는 사람이라서요.”

“네, 네!”

나는 헤로니스 공작과 유니스를 번갈아 보면서 비소를 지었다.

“제가 가만히 있는데 굳이 나설 필요 없다고 말해 주는 거예요.

굳이 귀찮은 일 만들지 말아 달라고."

“그, 그렇죠. 영애께서 그리 말하시는데 저희가 무어라 더 말을 하겠어요.”

다행히도 무리의 중심이 된 이유가 있는지 내가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나와 더 대화하고 싶어했지만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혼란스럽게 움직이다가 결국 황제가 들어서는 곳으로 향했다.

황제는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는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만 고개를 들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오래간만에 보는 황제는 병상에서 보았던 것과 다르게 유약한 모습은 사라지고 언제 아팠냐는 듯 꽤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누군가가 따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몬은 아니었다.

'누구지?'

모두가 궁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마침내 사내가 등장했을 때 라그나르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베르돌트.…?"

라그나르의 목소리에 사내가 바로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빈민가 살인 사건의 진범, 그 외에도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으며 라그나르의 부모님과 대부도 죽인 살인마.

그가 사람 좋은 표정으로 황제와 함께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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