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78화 (178/185)

제178화.

나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라그나르를 향해 물었다.

“라그나로, 저자가 왜 여기에….”

라그나르 또한 나만큼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베르돌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가 당황하는 동안 황제는 자신의 연설을 쉼 없이 이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모여 그대들의 축하를 받으니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있을까.”

황제의 연설이 어느 정도 끝나갈 무렵 그가 뒤에 서 있던 베르돌트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이자가 내 병환을 낫게 해 준 친구일세. 베르돌트, 그대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편히 말해 보게.”

황제의 말에 베르돌트는 고개를 들고서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태양께서 쾌차하신 것만으로도 제게 큰 선물입니다.”

“어허, 이 친구도 참.”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둘의 모습에 황제의 옆에 있던 황후 또한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내가 알아서 잘 챙겨 주어야겠어. 영지는 작위는 든든히 챙겨 줄 테니 거절하지 말게.”

황제는 베르돌트의 어깨를 힘껏 두드려 주고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이 자리를 즐기라며 연설을 끝냈다.

이제 각국에서 보낸 사절단이 황제에게 선물을 바칠 시간이 되었는지 황제와 황후가 황좌에 앉았다.

“다프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빠의 목소리에 그제야 멀리 날아간 정신을 붙잡았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엄마랑 아빠가 온 줄도 몰랐을까.

“자, 폐하께 선물을 드리고 와야 연회를 여유롭게 즐기지."

“그렇죠.”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삼키며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부모님을 따라가기에는 베르돌트가 마음에 걸리는걸.'

내가 고민하는 것을 알았는지 라그나르가 먼저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가서 찾아볼게."

라그나르는 걱정하지 말라며 속삭였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두 분의 뒤를 따라갔다.

“형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우가 이리 축하해 주니 기분이 참 좋네.”

황제는 아빠를 향해 결혼해서 보기 좋아졌다며 덕담을 이어 갔고, 아빠도 맞장구를 치며 평소와 달리 즐거운 모습을 보였다.

아빠의 표정이 참 즐거워 보여 나는 그런 아빠의 얼굴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만약에 황제가 사건에 연류되어 있다면 아빠는 괜찮을까.'

내가 알고 있는 악셀리우스라면 형제의 잘못을 쉽사리 감싸 주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감정을 잘 추스를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시몬도 그리 힘들어했는걸.'

시몬 또한 오랫동안 우리와 떨어져서 긴 고민의 시간을 갖고 나서야 겨우 결정을 내렸었다.

나는 황후의 옆에 듬직하게 서 있는 시몬을 보며 속으로 쓴 미소를 삼켰다.

아빠 또한 그러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진작 말해 주었어야 하지 않았나 고민이 되니 복잡한 머릿속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다프네.”

“네?”

“인사가 끝났으니 내려가야지."

엄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가족은 어느새 인사를 끝마친 상태였다.

나는 황급히 두 사람을 따라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하고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다프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프긴요.”

내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으나 엄마와 아빠의 표정에 서린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공작 부인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아. 아니에요.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고….”

“그래도 눈치가 있는지 알아서 나갈 생각인가 보구나.”

엄마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마리아가 유니스를 끌고서 억지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카스토르는 언제 자리를 비웠는지 주변에 보이지 않았기에 결국 연회장에 남은 소문의 주인공은 헤로니스 공작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힐긋 눈길을 주었다.

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급한 건 저들이 아니야.'

그 짧은 사이에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몰라도 라그나르와 베르돌트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직접 찾으러 가 봐야겠어.'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어디를 가려고?”

“…지금 당장 자세히는 말 못 드리지만 조금 전에 폐하께서 소개한 사람이 라그나르의 형인 것 같아요.”

나는 우선 간단하게라도 정리하여 말을 전했다.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고, 또 빈민가 사건의 공범이라 의심되는 상황이어서 아무래도 쫓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내 말에 엄마와 아빠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주변을 황급히 살펴본다.

다행히 듣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를 밖으로 이끌고 나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다프네. 그자가 공범이라니?"

“자세히 말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힘들 것 같아요. 이렇게 갑자기 말씀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아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황제가 있는 연회장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혹시 형님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니.…?"

"아마도요….”

내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자 아빠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구나.”

차마 무어라 답을 못 하겠는지 한참이고 입가를 만지며 머뭇거린다.

그러다 이내 다시 한숨을 터트렸다.

엄마 또한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고?”

"네. 시몬이 먼저 증거를 찾았거든요.”

“그래…. 시몬도 알고 있었구나.”

아빠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한손으로 벽을 짚었다.

내가 차마 아무런 말도 못 하자 엄마가 아빠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악셀.”

"미안해, 클로에.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아빠의 말에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지만 아빠의 표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빈민가와 관련되어 있다면 네가 겪었던 일과도 관련되어 있단 거잖아. 믿기가 않아. 형님께서는 제 국민을 아낌없이 사랑하셨는데.

어째서….”

“악셀….”

"어째서 그런 짓을 묵인하신 걸까.”

우리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중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도 서로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꺼내기 힘들었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기에 앞으로 뱉을 말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녀오렴.”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범인을 잡아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원한도 풀릴 거야.”

“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아빠는 조용히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혹시 모르니 플뢰르를 데려가 렴. 아직 황성에 남아 있을 테니 네게 가 보라 하마.”

"네.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의 어깨가 면목이 없다는 듯 축 처져 있었다.

그런 아빠를 두고 가기 마음이 쓰여 내가 머뭇거리자 엄마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어서 가 보라며 아빠를 챙겼다.

나는 나와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뒤돌아 황제의 집무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주위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열심히 달리던 도중 익숙한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내는 거니!"

마리아의 목소리 뒤로 듣기 싫은 목소리까지 들리자 걸음을 자연스럽게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격앙된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더니 곧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대화 내용이 내용인지라 정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마저 이어나갈 생각인 것 같았다.

당장 라그나르와 시몬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이 쉬이 떼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모녀 관계에 끼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대로 두고 가기에는 무언가 찜찜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뒤를 돌아보자 급하게 달려온 모양인지 플뢰르의 머리가 바람에 헝클어진 것이 보였다.

내가 반가운 마음에 살짝 미소를 짓는 순간 안쪽에서 다시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네가 내 딸이라면 나를 이해해 줘야 하는 것 아니니? 도대체 왜 그렇게 애가 못됐어! 다 그 애한테 배운 거지! 내가 알던 내 딸 마리아는 이러지 않았는데!”

유니스의 외침에 플뢰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보면 엄마가 피해자인 줄 알겠어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정원 으슥한 곳으로 가면 뭐한단 말인가.

저렇게 소리를 높이다니 다들 와서 구경하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더는 그 애에게 마음을 주지 말렴. 어차피 없어질 아이니까!"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운명은 정해져 있고, 세상은 운명에 따라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거란다. 지금 우리를 모욕하는 자들도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 거야!"

유니스의 목소리에는 언뜻 희열이 섞여 있었다.

"후우.”

저런 말까지 들었으니 이대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

베르돌트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나와 플뢰르는 소리를 죽이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정원에는 마리아와 유니 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숨어 엿듣고 있는 건가 싶어 플뢰르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앞장서서 수상한 인물을 확인했다.

“헤로니스 공자?"

“카스토르라고?”

입구 근처에 혼자 서성이는 사람의 정체는 카스토르였다.

왜 연회장에 없던 건가 했더니 홀로 정원에 나와 있었던 모양이다.

카스토르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게 져 있었고, 평소보다 더 우울해 보였다.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신 겁니까?"

플뢰르의 질문에 카스토르는 표정만큼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어머니와 누님이 오신 걸 보고….”

“엄마! 언제까지 이렇게 현실 도피할 생각이신 거예요!"

카스토르는 뒷말을 이으려다가 마리아가 소리를 지르는 것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리를 비우자니 누가 와 엿듣기라도 할까 걱정되어 그런가 보네.”

내 말이 맞는지 카스토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제가 끼어들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할까 합니다.”

“?"

“이렇게 자리를 지키는 게?”

내 물음에 카스토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쩐지 기가 죽어 보이는 모습이 답답해 한숨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바보 같기는. 이럴 때는 가만히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 가서 말리는 게 두 사람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지키는 일이야. 가족인 네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내 말에 카스토르의 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나는 그를 제치고서 정원 안쪽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플뢰르, 공자가 피곤해 보이는 모양이니 대신해서 이 앞을 지켜주렴.”

내 말에 플뢰르가 걱정하지 말라며 굳센 표정으로 끄덕였다.

나는 카스토르와 플뢰르를 뒤로한 채 정원 깊숙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적당히들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내 목소리에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마리아는 놀라 당황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고, 유니스는 나를 보며 못마땅하게 표정을 구겼다.

“엿듣는 취미라도 있나 보구나?"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안 들리는 게 이상하죠. 헤로니스 공작가는 이런가요? 귀족의 체면이고 뭐고 저잣거리 처럼 소리 지르는 게 이 집안의 교양인가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리아와 다르게 유니스는 정말 억울한지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입가에 가득 비웃음을 담고서 웃었다.

“그리고 듣자 하니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말이 있더라고요.”

“뭐?”

“정해진 운명이니,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느니. 어이 없는 말들을 듣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나는 유니스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며 그녀가 놓치지 않게 또박또박 말을 꺼내었다.

“정해진 운명? 그런 게 어디 있어.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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