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유니스는 내 말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비웃음을 가득 지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한다고 바꿀수 있을 것 같니?"
입가를 비틀어 웃으며 꺼내는 말에 똑같이 웃으며 답했다.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네.”
"내가 무얼? 착각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하는 거겠지. 가여운 아이야.”
나는 유니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가엾다는 듯 혀를 찼다.
내 반응에 그녀가 모욕을 입은 사람처럼 얼굴을 붉혔고, 나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현실이야."
“........”
“네가 쓴 소설책 속이 아닌 네 주변 사람들이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라고.”
그 말에 이곳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용해졌다.
유니스의 놀라 커진 눈에 혼란이 찾아오자 나는 그녀를 딱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언제까지 한심하게 현실 도피하고 있을 생각인 거야? 당신은 자식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내 시선이 슬쩍 마리아에게로 향하자 유니스의 떨리는 눈빛 또한 그녀에게로 향했다.
마리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유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쯤 했으면 됐잖아요. 엄마도 다 알고 있잖아. 엄마가 잘못 했다는 것도 엄마 때문에 누군가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도 다 알잖아!”
결국, 마리아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평소의 활기찬 모습은 사라지고 서럽게 울기만 하자 유니스가 조금 전보다 더 놀란 듯 황급히 마리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유니스의 손이 마리아에게 닿기도 전에 마리아는 뒤로 물러나며 그녀의 손을 피해 버렸다.
“그만하세요, 엄마. 난 엄마가 더 이상 죄를 짓는 걸 보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마리아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곧 그녀가 우는 소리가 조용한 정원에 울려 퍼졌다.
유니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마리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리아만 이렇게 슬퍼한다고 생각해? 카스토르도 마찬가지야. 네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원 앞에서 망을 보고 있는 것은 알아? 그 헤로니스 공자가 좀도둑처럼 망을 보고 있다니."
유니스의 고개가 뻣뻣하게 움직여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아직도 이곳이 가짜 같아? 모두가 살아가며 행복을 찾아가는 게 네게는 모두 거짓이었어?"
"......."
“난 아니야.”
"......."
“행복하고, 즐겁고, 슬프고, 괴롭고, 아프고, 서러운. 그러면서도 다시 행복을 찾아가는 이 세상이 거짓일 리가 없잖아.”
유니스의 붉게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네 앞에 놓인 현실을 봐. 네가 받아야 할 벌에서 도망치려고 하지 마.”
“그게 네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길이니까."
유니스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지더니 결국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아니어야 한단 말이야. 그래야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잖아.”
자신에게 처한 지독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 그녀는 결국 모든 것이 밝혀진 그날보다 더욱 좌절하고 말았다.
부정하고, 부정해도 차가운 현실은 그녀를 언제까지도 도망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유니스의 몸이 거칠게 휘청였다.
그녀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애써 버텼지만 이내 풀썩 주저앉았다.
그때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너무 재미없잖아. 발악이라도 했어야지.”
웃음기가 섞인 소름 끼치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유니스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유니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신은 분명… 오벤 백작과 함께 왔었던….”
“하하. 기억하고 있었구나."
장난기 섞인 웃음소리에도 이곳을 감싼 딱딱한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내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목소리에 심상치 않음을 느껴 재빠르게 소리쳤다.
“플뢰르!”
* * *
플뢰르는 멍청하게 서 있는 카스토르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가씨는 참 자상도 하시지.'
적으로 배척해도 모자랄 녀석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가씨가 아닌 이상 이해 못 할 일이기는 하지만.’
다프네가 플뢰르에게 내린 명령이니 그녀는 자신이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플뢰르는 어울리지 않게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스토르의 옆에 섰다.
“…한심하지 않은가?"
“무엇이 말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이다.”
카스토르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플뢰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민폐를 끼치던 당당한 모습은 어딜 갔는지 부끄러움에 괴로워하는 소년이 보였다.
“저는 공자님이 아니기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플뢰르의 차가운 목소리에 카스토르의 눈가에서 눈물이 뚝뚝 떨구어졌다.
"왜, 왜 우십니까?"
다 큰 사람이 뭐 이리 쉽게 눈물을 보이는지.
플뢰르는 당황하며 품속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보기 흉합니다. 닦으세요."
"고맙네.”
"고맙긴요. 나중에 갚으시죠."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그 말에 카스토르가 작게 웃었다.
“울었다가 웃었다가.…."
플뢰르는 카스토르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바라보았고, 그 눈빛에도 그는 입가에 지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눈물로 촉촉하게 젖은 눈가가 부드럽게 접혔다.
'웃으니 좀 다르게 생겼네.'
평상시에는 콘란드의 판박이처럼 닮았다 소리를 듣는 카스토르였지만 이렇게 웃으니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색달라 보였다.
“다음에…."
"다음에?"
카스토르는 물기가 섞인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른 척하지 않아 줄 건가?"
“…모른 척하기를 원하신다면 해드릴 생각은 있습니다만."
"아니, 아니야. 그러지 말아 줘."
플뢰르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상한 놈.’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카스토르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저 그대의 태도가 처음과 같이 한결같아서. 앞으로도 만날 때마다 변치 않고 이렇게 말해 줄 것 같아서 그래서 기뻐서 웃었네.”
“…예?”
플뢰르의 얼굴이 대놓고 구겨졌다.
"평판도 소문도 이리 안 좋은 나를 처음과 같이 대하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을 거야. 그 사실이 참… 신기하게도 기뻤네.”
플뢰르는 조용히 카스토르를 바라보았다.
“부모님과 누님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껍데기뿐이라는 사실이, 내 옆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 괴로웠거든."
플뢰르의 입에서 다음을 기약하는 말이 나온 순간 카스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헤로니스 공자로서 당당했던 과거는 모두 끝이 났다.
카스토르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친우라며 억지로 붙어 오던 이들도, 제게 잘 보이려 애쓰던 자들도.
모두 떠나 혼자가 되었다.
헤로니스 가문의 이름에 먹칠이 칠해지자 미련 없이 카스토르를 버린 사람들은 그의 껍데기만을 보고 있던 것이다.
카스토르는 결국 자신에게 주어졌던 것은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서글펐다.
"아가씨의 말씀처럼 공자님께는 죄가 없습니다만."
"아니, 난 그들도 이해가 돼."
“예?”
“나는 누님처럼 당당하게 부모님께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하고….
그저 원망만 할 줄 아는 그런 한 심한 놈이니까. 모두 떠나는 게 당연하지.”
플뢰르는 더는 표정 관리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셨습니까? 되게 뻔뻔하고, 자만심 심하고, 자존감도 높으신 줄 알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헤로니스 공자일 때의 이야기니까.”
카스토르의 힘없는 목소리에 플뢰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괜히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버럭 짜증을 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헤로니스 공자가 아닌 카스토르 자체로 봐줄 사람을 찾으시면 되겠네요."
"뭐?"
“앞선 인간관계가 망했으니 쉽지 않겠지만 배운 것도 많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새로운 인간관계는 배운 것을 토대로 좀 올바르게 쌓아 보면 되죠.”
플뢰르의 말에 카스토르가 눈을 깜빡였다.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에 플뢰르는 피식 웃었다.
“좀 덜 재수 없으면 진짜 친구가 생길지 어떻게 압니까?"
플뢰르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도 카스토르는 여전히 두 눈을 깜빡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플뢰르는 민망함이 밀려와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대도…?"
"예?"
"내가 좀 덜 재수 없어지면 그대도 내 진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나?”
“…그건 지내 봐야 알겠죠.”
확실한 대답이 나온 것도 아닌데 카스토르의 얼굴에 조금 전과 같은 웃음이 피어났다.
제 나이처럼 보이는 순수한 미소에 플뢰르는 픽 웃고 말았다.
‘귀찮기는 한데…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보다.'
“노력해 보도록 하겠네."
“그러세요.”
카스토르의 얼굴에 미미한 홍조가 피어올랐으나 플뢰르는 그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다 쓰러져 가는 몬스터처럼 축 늘어져 있던 카스토르가 조금 기운을 차리자 한결 마음이 편해져 뿌듯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원 안쪽에서 들린 다프네의 비명에 입가의미소를 지우고는 곧바로 그곳을 향해 뛰어갔다.
***
내가 도망치는 것보다 사내가 나를 붙잡는 것이 더 빨랐다.
“으윽!”
나를 팔로 거침없이 잡아채고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긴 사내는 뭐가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눈치 한번 빠르네. 그래서 라그나르가 옆에 두는 건가?”
"베르돌트!"
“내 이름도 알고 있네? 라그나르가 알려 준 걸까? 어디까지 얘기 해 줬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가씨!"
어느새 달려온 플뢰르와 카스토르가 보였다.
플뢰르가 베르돌트에게 잡혀 있는 나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으나 내가 인질로 잡혀 있는 이상 함부로 건들지도 못했기에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네놈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만 아가씨를 순순히 놔줘!"
"순순히 놔줄 거였으면 붙잡지도 않았지.”
베르돌트의 말에 플뢰르가 빠드득하고 이를 갈았고, 두 눈은 분노로 가득했다.
"아, 오늘 연회에 오길 너무 잘했는걸. 귀찮아서 안 오려고 했는데 이런 소득도 있고 말이야.”
베르돌트가 보란 듯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 머리를 부드럽게 타고 내려온 손이 목 언저리를 매만진다.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것처럼 아슬아슬한 손길에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안 무섭나 보네?"
“어차피 당장 죽일 생각 없는 것 같으니 장난은 그만 치지?”
"재미있네.”
라그나르와 닮았지만, 그와 다르게 창백하고, 기분 나쁜 색을 가진 사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베르돌트를 경계하며 벗어날 방법을 떠올려 보는데 그런 나와 다르게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유니스를 향해 말했다.
“이봐, 공작 부인. 지금 꼴이 말이 아니잖아. 지난번 그 독한 모습은 어디로 간 거야? 재미없게.”
“나는….”
유니스의 침울한 목소리가 더는 이어지지 않자 마리아가 그녀의 앞을 막고서 물었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죠? 당장 선배를 놔줘요!”
마리아의 외침에 베르돌트는 조금 전과 다르게 흥미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네 엄마의 동업자야. 네 엄마가 이 여자를 죽여 달라고 했거든.”
“…뭐라고요?”
베르돌트의 말에 마리아가 경악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있는 유니스를 보았다.
“정말이에요, 엄마?"
“아니야, 아니란다. 마리아! 절대 아니야!”
마리아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려 왔다.
"…저 엄마 믿어도 되는 것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