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80화 (180/185)

제180화.

슬픔을 꾹꾹 참으며 마지막까지 엄마를 믿으려고 하는 딸의 모습에 유니스는 결국 격하게 젓던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왜 또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고 하신 거예요!"

마리아가 아무리 소리를 높여도 유니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또 그런 끔찍한 짓을 하려고 하셨다고요? 어떻게…."

마찬가지로 충격에 빠진 카스토르의 목소리를 끝으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자식들의 냉정한 반응에 유니스의 어깨가 애처롭게 떨려 왔으나 이곳에서 가장 상처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마리아와 카스토르였다.

두 사람은 마치 세상에 배신을 당한 것처럼 얼굴에 슬픔이 가득차올랐다.

"나는 착실하게 우리의 약속을 이행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이런 모습이라니 꽤 실망이야. 신의 사랑을 받는 자들은 원래 이리 연약한가?”

베르돌트는 그런 유니스를 비웃으며 그녀의 처지를 비꼬았다.

“그리 자신만만하게 나를 붙잡더니 말이야. 고작 자식들에게 비난을 좀 받았다고 불쌍한 척하기는.”

베르돌트의 신랄한 말에 유니스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표정이었다.

“마지막 동업자는 조금 재미가 없네. 네가 부탁한 조건은 조금 생각해 볼게.”

그 말과 함께 주변에서 빛이 번쩍였다.

“우선 첫 번째 동업자의 부탁부터 들어줘야 하는지라.”

눈앞에 펼쳐진 눈이 부신 빛에 팔을 들어 빛을 가리는데 베르돌트가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자리를 박차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아가씨…!"

플뢰르의 외침이 점차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나는 여전히 인질이 된 상태로 험하게 안긴 채 그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어디로 갈 생각인 거야?"

“말했잖아. 첫 번째 동업자의 부탁을 들어주러 가야 한다고. 내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도 그 때문이거든.”

베르돌트의 말에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서 웃던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멍청하게 열쇠를 잃어버려서 귀찮게 하고 말이야.”

나는 내가 보육원장의 사무실에서 찾았던 도장을 떠올렸다.

시몬의 말에 의하면 무언가 숨겨진 공간을 여는 열쇠로 사용되는 것 같다 했었다.

‘이 연회를 이용하려던 것이 우리만 있던 게 아니었구나.'

베르돌트는 자연스럽게 황제의 손님으로 연회에 참석하고, 틈을 타 집무실에 가서 증거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황제의 부탁으로!

‘시몬이 먼저 찾아야 하는데..'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나를 왜 데려가는 거야?"

“말했잖아. 라그나르가 자꾸 따라다녀서 귀찮게 한다고, 네가 있으면 허튼짓 못 하겠지.”

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베르돌트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착했다.”

그 말과 함께 바로 앞에 보인 창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깨졌다.

'집무실….’

어떻게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을까.

베르돌트는 자연스럽게 창문을 타고 넘어가 나를 구석에 던져 놓았다.

혹시 도망칠라 마법으로 밧줄을 만들어 내더니 내 손발을 꽁꽁 묶어 놓기까지 했다.

나는 힘껏 몸부림을 쳐 보았으나 어찌나 단단히 묶인 것인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일단 이것부터 없애 주고, 다음에는 너한테 신경써 줄 테니까.”

"날 죽일 생각인 거지?"

베르돌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만 굉장히 기분 좋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의 긍정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일단 갑작스럽게 생긴 이 밧줄을 풀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조금 전 깨진 창문의 파편이 근처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베르돌트가 다른 쪽으로 신경을 쓰는 시간 동안 재빠르게 파편을 주웠다.

그가 내게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동안 구속을 풀어 내야 했다.

베르돌트는 앞에 놓인 책상부터 시작해 주변에 방해가 되는 것을 날려 버렸다.

“귀찮네.”

황제의 집무실 책상 아래.

베르돌트는 깔끔하게 정리된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고, 곧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바닥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어두운 빛에 물들어 가는 문양은 나도 잘 알고 있는 문양이었다.

곧 문양에 빛이 반짝이더니 달칵하고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을 불태우지 않고 기밀 서류만 치워 주는 나도 참 친절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그가 살짝 들뜬 바닥의 문을 열었다.

* * *

시몬은 거친 숨을 내쉬며 황궁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 어디 간 거야!”

외국의 사절단과 대화를 하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프네도 라그나르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분명 그 사내를 쫓으러 간 거겠지. 말이라도 좀 하고 나가지!'

시몬은 갑자기 아버지의 옆에 나타난 수상한 인물을 떠올리며 욕설을 삼켰다.

라그나르와 닮은 외모에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음산한 기운이 넘치는 사내였다.

분명 시몬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며, 그의 병을 치료해 준 자라는 말도 어이가 없었다.

시몬은 울컥하고 올라오는 복잡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혀야 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모든 것들이 그의 아버지 또한 공범인 것을 은연중에 가리키고 있었다.

'확실한 물증이 생긴다면 내 손으로 아바마마를 체포해야겠지.'

세상의 모든 이들이 비정한 효자라 욕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시몬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클레멘스 제국의 황태자로서 또 앞으로 황제에 오를 자로서 이런 정에 휘둘려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시몬이 지고 가야 할 자리의 무게였으니까.

시몬은 그렇게 힘겹게 뛰어가는 도중 익숙한 인영을 만났다.

“전하?”

“대공! 다프네랑 라그나르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악셀리우스와 클로에의 등장에 시몬의 얼굴에 가까스로 미소가 피어났다.

"아마도 집무실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악셀리우스의 반응이 이상했다.

평소라면 기운차게 조카에게 웃어 주었을 사내가 유독 낮은 목소리로 답한다.

심지어 시몬과 제대로 눈도 못마주치는 모습은 여간 수상한 것이 아니었다.

옆에 서 있는 클로에의 표정 또한 좋지 않은 것을 보며 시몬은 앞에 있는 부부가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프네에게 들으셨군요.”

“확실한 건 아니라고 하였지만…."

곧 증거가 나온다면 확실시되겠지.

악셀리우스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형님이 그런 짓을 하셨는지 모르겠다만… 만약 정말로 빈민가 사건에 연관이 된 것이라면….”

괴로워 보이는 표정과 다르게 그의 두 눈은 올곧게 빛나고 있었다.

“시몬,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게다.”

“…알고 있습니다.”

어느새 작은아버지와 조카의 관계로 돌아간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 대답이면 충분하다는 듯 악셀리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가 보라는 몸짓에 다시 달리려는 찰나 시몬의 품에서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도장이 담긴 주머니였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주머니의 끈이 풀리자 안에 들어 있던 도장이 튀어나왔다.

악셀리우스는 바로 제 앞에 멈춘도장을 들더니 곧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어떻게 아직도 있는 거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형님이 황태자 시절에 사용했던 직인인데….”

악셀리우스의 말에 시몬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황태자 직인이기는 하나 주변에 알려지지는 않았어. 너도 알다시피 형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셔서 황태자 책봉이 계속 늦춰졌었거든.”

“공무 참여도 적으셨고, 만든 지얼마 되지 않았는데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으니 몇몇을 빼고 모를 거야.”

"그렇군요.”

시몬은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알자 그제야 이 문양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본 적이 있던 것이겠지.’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답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멀리 돌아서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시몬은 악셀리우스가 건네주는 도장을 받으며 쓴 미소를 지었다.

"아바마마의 집무실 책상 아래에서 이 도장을 열쇠로 사용하는 비밀 문을 발견했습니다."

"…뭐?”

"아마도 무언가를 숨겨 놓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 같았고, 저는 그곳에 빈민가 사건과 아바마마가 얽혀 있다는 증거를 숨겨 놓았다 생각합니다.”

"......"

“보육원 사태 때 발견된 서류에도 이 직인이 찍혀 있었는데 못보셨나 보군요.”

시몬의 말에 악셀리우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형님이 증거를 수거해 가셔서 제대로 볼 시간이 없었어…. 귀국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시몬도 악셀리우스도 처참한 기분을 토해 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러가 보겠습니다.”

“.......”

“지금부터 내가 할 일들을 위해서는 대공의 힘이 필요하네. 시끄럽게 날뛸 귀족들을 부탁하지."

악셀리우스는 팔을 가슴에 올려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두 사람은 슬퍼할 새도 없이 복잡하게 얽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로 떠났다.

시몬은 집무실을 향해 한참이고 뛰어가다가 드디어 라그나르를 만날 수가 있었다.

"라그나르!"

“시몬!”

"너! 다프네는 어디 있어?"

“난 베르돌트를 찾으러 먼저 나왔는데. 너랑 같이 나오는 것 아니었어?”

“대공 말로는 이미 집무실로 향했다고 들었는데?"

라그나르와 시몬의 표정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혹시 길이 엇갈렸다고 하기에는 시몬이 왔던 길에는 다프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해야 할 일을 하자.”

“하지만 베르돌트를 놓쳤어. 만약 두 사람이 만나기라도 했다면….”

"나도 마음이 급해. 하지만 지금 당장 증거를 확보하는 게 다프네가 바라는 일일 거야.”

라그나르는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으나 결국 시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어서 해결하고 다프네를 찾으러 가자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무실에 거침없이 들어간 그가 몸을 숙여 책상 아래에 있는 문양을 쓸어 보았다.

'망설일 시간 없어.'

시몬은 챙겨 온 도장을 문양 위에 올려놓았다.

곧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살짝 들춰진 바닥을 들어 여니 서랍 크기의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여러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다.

시몬은 서류를 챙겨 적힌 내용을 빠르게 읽어 보았다.

“황자는 나 베르돌트의 마법을 이용해 건강을 회복한다. 또한, 베르돌트는 황자가 황태자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불필요한 자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다음 장에는 황제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맙소사.”

가장 끔찍한 사실은 그곳에 시몬조부의 이름 또한 적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몬은 자신의 아버지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저지른 끔찍한 죄에 직면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네. 공작과 한 계약도 있어. 빈민가 사건을 하루빨리 해결하기 위해서 공작 부인의 누명을 모른 척 넘어가 주겠다는….”

"하.

라그나르가 기가 막혀 하자 시몬은 씁쓸히 덧붙였다.

“나와 헤로니스 영애의 약혼도 이러한 이유로 맺어졌던 것이라 쓰여 있네.”

그뿐만이 아니라 보육원과 관련된 서류 등 다양하고도 끔찍한 내용이 적힌 것들이 가득했다.

시몬은 아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면서 서류를 움켜쥐었다.

“찾았으면 어서 가자."

시몬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인해 손이 파르르 떨렸으나 감정에 지배당할 시간 여유 따위 없었다.

그는 다시 바닥을 제대로 닫아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무실을 나서 문을 닫고 나간 그 순간 조금 전까지 조용했던 집무실의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까지 들리자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베르돌트….”

라그나르의 말에 시몬이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곧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도 들려 왔다.

다프네도 저 안에 있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함께 있는 자가 베르돌트란 사실에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뭐야? 왜 없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에서 들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시몬의 손에 들린 서류로 향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문을 열어젖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