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다프네!"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획들어 올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라그나 르와 시몬의 모습에 안도가 먼저들었다.
시몬의 손에는 무언가 잔뜩 쥐여져 있었는데 조금 전 베르돌트의 반응을 보아서는 시몬이 먼저 증거를 챙긴 것 같았다.
베르돌트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난입에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라그나르가 내게로 달려 들기도 전에 나를 짐짝 챙기듯 들었다.
"내 사랑스러운 동생께서 왜 자꾸 나를 쫓아오는 걸까?"
“놔.
“다프네를 내려놔.”
“내가 왜?"
"내려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베르돌트의 시선이 시몬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서류는 먼저 챙긴 모양이야? 과연 동업자의 아들이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베르돌트의 말에 시몬은 서류를 뺏기지 않기 위해 들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쥐었다.
“이런. 뺏길까 봐 그래? 됐어.
이미 넘어간 건 신경 안 써. 첫 번째 동업자와도 이제 끝인 거지.”
“…정말로 아바마마와 네가 동업이라도 한 건가?”
“계약했지. 황제의 짧은 명을 늘려 주고, 황태자 자리에 오르는 걸 반대하는 이들을 죽여 주고, 거슬리는 일을 처리해 주고, 대가로 그는 내가 저지르는 일들을 묵인해 주고?”
믿고 싶지 않았음에도 이것은 현실이었다.
베르돌트의 입에서 뻔뻔한 말이 흘러나올수록 시몬의 얼굴은 더더욱 어두워져 갔다.
그리고 베르돌트는 그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면서 히죽였다.
“애초에 더는 동업자의 도움도 필요 없어서 말이야. 드디어 끝이 도래했으니까. 그러니 그들이 망하든 말든 나와는 관계없어.”
그의 알 수 없는 말에 시몬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이 혼란한 틈을 타 밧줄을 잘라 내기 위해 유리를 쥐고 있는 손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곧 끊어질 것 같은데!'
답답함에 속마음만 타들어 가는 와중 갑자기 베르돌트가 창문가로 뛰어들었다.
“다프네!”
라그나르와 시몬의 외침에 베르돌트는 난간에 기대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쫓아올 테면 쫓아와 보든가."
그 말과 함께 그는 들어왔던 것처럼 나무 위로 뛰어내렸다.
* * *
라그나르와 시몬은 베르돌트가 뛰어내리자 망설임 없이 창문가로 달려갔다.
라그나르는 그대로 뛰어내리려다가 시몬이 베르돌트가 도망간 쪽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범인에게 직접 들은 아버지의 죄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받아들였다고 한들 지금의 상황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마음씨 약한 친구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라그나르는 제 소중한 친구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시몬. 지금부터 우리는 각자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거야.”
"나는 다프네를 구하러 가서 베르돌트를 처치하는 것, 너는 증거를 가지고서 이 사건을 끝낼 진범을 잡는 것.”
“시간이 없으니까 효율적으로 해보자고, 그쪽 일은 너에게 맡길테니, 이쪽 일은 내게 맡겨.”
라그나르의 말에 시몬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칠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믿고 맡긴다.”
“걱정하지 마. 무사히 구해서 돌아올 테니까.”
“둘 다 무사히 돌아와야 해. 다치지 말고.”
시몬과 라그나르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시몬은 황실 기사단이 있는 곳을 향해서, 라그나르는 베르돌트가 도망친 방향을 향해서 뛰어갔다.
* * *
“역시. 쫓아올 줄 알았다니까.”
베르돌트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이 상황이 정말 놀이라도 되는 듯 설렘이 묻어 나는 반응에 나는 화가 났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 물음에 베르돌트는 답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나를 안은 채 나무를 밟으며 뛰어다닐 뿐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까 확실하게 끊어야 했는데 깨진 유리는 생각보다 날카롭지 않은지 밧줄을 끊어 내는 속도가 더 뎠다.
“다프네!"
어느새 뒤까지 바짝 쫓아온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젠장.’
적어도 폐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래서는 도움이 되지는 못할 망정 방해만 되고 있었다.
"이것 놓으라고!”
나무 위에서 떨어지면 크게 다치겠으나 적어도 이자에게서는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베르돌트는 나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인지 나를 들고 있는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자유로운 팔로 품속을 뒤 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손을 묶은 밧줄이 끊겼다.
“다프네!”
어느새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환히 웃으며 손을 뻗으려는 그 순간.
베르돌트가 품에서 꺼낸 무언가를 라그나르를 향해서 뿌렸다.
검은색 주머니에서 수상한 가루가 잔뜩 흘러나왔다.
검은색 가루는 오묘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는데 라그나르가 깜짝 놀라 멈추었다.
“라그나르!”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외쳤으나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 다치기라도 했는지 라그나르는 한참이고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새 시야에서 벗어나 사라진 그의 모습에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저게 뭐지?'
베르돌트는 큰일을 해내기라도한 것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분명히 수상했는데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없어 답답했다.
아니, 이렇게 붙잡혀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제일 답답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글쎄. 가고 싶은 곳 있어?”
“지금 나랑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거야?”
내 물음에 베르돌트는 무시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내 동생의 소중한 사람인 것 같으니 이왕이면 죽고 싶은 곳에서 죽게 해 주려고 그러지."
목소리는 침착했고, 배려해 주는 말투였으나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어차피 동업자들 주변도 다 파탄 난 것 같고, 이제 너희만 파탄 나면 재미있겠는데.”
"넌 다른 사람의 불행이 그리 즐거워?”
“당연한 소리를 왜 묻지? 즐거워서 미칠 것 같은데.”
베르돌트의 즐거운 목소리는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라그나르는 조금 전 갑작스러운 공격 때문에 속도가 늦춰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나무 아래로 내려갔을 때 도망치는 게 좋겠어.'
나무 위에서 그를 밀치다가는 오히려 내 몸이 크게 다칠 수가 있었다.
라그나르도 없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에는 아직도 온몸이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두려움이 앞섰다.
괜히 무리한 선택을 하여 사서 위험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저게 누구야.”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도중 베르돌트의 목소리 톤이 조금 전보다 높아졌다.
그의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니 정원 근처를 헤매고 있는 헤로니 스 공작이 보였다.
베르돌트는 그를 발견하자 갑자기 뛰던 방향을 바꾸어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아직 이 근처에 있네.”
아직이라고 하면 설마?
베르돌트가 드디어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땅에 발이 닿자 맞아 어찌나 반갑던지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으나 그가 나를 땅에 거칠게 내려놓는 것이 더 빨랐다.
거세게 부딪힌 엉덩이가 아파 인상을 찌푸리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여긴….”
조금 전까지 있었던 정원이었다.
그리고 나를 납치하면서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몰라도 유니스를 제외한 마리아와 카스토르 그리고 플뢰르가 기절한 듯 잠들어 있었다.
“플뢰르!"
나는 놀란 마음에 그녀의 이름을 외쳐 보았으나 조금 움찔거릴 뿐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리아와 카스토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르돌트가 주저앉아 있는 나를 두고서 유니스 쪽으로 걸어갔다.
유니스는 마리아와 카스토르를 깨우고 있었는지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끌어안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찌나 울었는지 그 잠깐 사이에 눈가 주변이 휑하게 변했다.
유니스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베르돌트를 향해 쏘아붙였다.
"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글쎄? 네가 원하던 것 아닌가?"
"내가 원하던 건 저 여자의 죽음이었지 내 아이들이 다치기를 바란 게 아니야! 내 아이들과 이렇게 관계가 틀어지길 바란 것도 아니라고!”
비참할 정도로 처절하게 외치는 말에도 베르돌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았다.
그저 즐거움을 숨기며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할 뿐이었다.
“네 자녀를 건드리지 말라는 조항은 없었잖아?”
"베르돌트!”
끔찍한 비명에도 그는 계속 웃었다.
“어차피 운명은 정해져 있고, 누군가가 대신 그 운명을 짊어진다.
면 모든 것은 잘 흘러간다며? 네 자식들이 네 운명을 짊어졌나 보지."
“뭐?”
“내가 널 죽이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네 앞을 막아서 이렇게 된 거잖아.”
그 말에 유니스가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숨도 내쉬지 않고서 그 상태 그대로,
“아쉽게 됐지만 어떻게 해. 어차피 너만 무사하면 된 것 아니야?"
"......."
"아니면 네가 그들 뒤로 숨었나?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을 방패로 쓴 것 같기도 하고.”
베르돌트의 말은 유니스에게 향한 말이 아니었다.
바스락하며 풀이 밟히는 소리와 함께 이 자리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화가 잔뜩 난 목소리에 우리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에 보았던 헤로니스 공작이 어느새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이곳을 둘러보더니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하.”
“여보.."
유니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공작을 불렀으나 그의 표정은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이제는 자기 목숨을 위해서 자식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가?”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어차피 당신에게는 이곳이 가짜일 테니 배 아파 낳은 자식들도, 사랑하는 남편도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거겠지.”
“저자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왜 우리 애들을 다치게 하겠어요!”
그 말에 베르돌트가 반박했다.
“아냐. 분명 내가 공격할 때 네 자식들 뒤로 숨었잖아.”
"아니야!”
유니스가 재빨리 외쳤으나 공작의 표정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발목의 밧줄까지 무사히 풀어 내었고, 조용히 플뢰르 쪽으로 기어갔다.
'다행히야. 숨은 제대로 쉬고 있어.’
그저 잠든 모양이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에도 이 상황은 점차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당신은 어디까지 최악으로 떨어질 생각이지? 도대체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당신을 믿어야 하는 거야?"
“도대체 왜 내 말을 못 믿는 거예요? 아니라고 하잖아요! 내가 원한 건 이런 상황이 아니고, 내가 한 것도 아니라고!"
두 사람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한때 아름답게 사랑했다는 부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추한 모습에 나는 어이 없이 웃고 말았다.
내가 더 나서지 않아도 저 부부는 파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