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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82화 (182/185)

제182화.

헤로니스 공작은 끔찍하다는 듯 유니스를 쳐다보았다.

유니스는 그런 공작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눈가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다독여 줄사람도 없었다.

유니스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고개를 돌려 쓰러져 누워 있는 마리아와 카스토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아이들에게서 손 떼!”

공작의 말에도 유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을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웃기네.”

유니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공작을 무시한 채 애절하게 두 아이를 매만졌다.

엄마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깨어날 때가 되어서인지 두 사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나자 보인 유니스의 모습에 울컥하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무어라 말하지 못할 감정을 느꼈다.

“.…아가씨?"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내리니 다행히도 플뢰르 또한 눈을 뜨고 있었다.

아무래도 단순한 수면 마법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저는 괜찮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분명 아가씨를 납치한 자를 쫓으려고 했는데….”

"무리하지 말고.”

플뢰르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막으며 나는 조용히 플뢰르를 안았다.

“아쉽네. 벌써 마법이 풀릴 줄이야.”

베르돌트의 말에 유니스의 고개가 움직였다.

평소의 당황스러운 눈빛이 아니었다.

심연의 깊은 곳까지 어둡게 가라 앉은 눈빛에 오히려 헤로니스 공작이 흠칫하고 놀랐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베르돌트는 별 감흥 없어 보였다.

그저 콧노래를 부리며 땅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표정에 유니스가 나지막이 물었다.

“재밌니?”

"어. 너무 재미있는데.”

“한심하구나. 남의 불행을 보면서 즐거워하다니.”

유니스의 말에 베르돌트는 보란듯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껏 행복하게 살다가 조금 불행해졌다고 남에게 화풀이하는 게 더 한심한데.”

베르돌트의 말에 유니스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는 유니스를 비웃으며 마저 땅에 그림을 그렸다.

‘마법진?’

생각하기 무섭게 마법진은 빠르게 완성되고 있었다.

그는 마법진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핀 후 드레스 자락 안으로 손을 넣었다.

허벅지 홀스터에 넣어 둔 리볼버가 손에 잡혔다.

"그리고 내가 한 말 중에 틀린 말이 있나? 네가 저 여자를 죽여 달라고 한 건 맞잖아.”

베르돌트는 마법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고, 오히려 공작의 놀란 시선이 내게 닿았다.

공작은 나를 보고 놀라더니 이내 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런 추태를 보여서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체면을 생각하는 것이 참 우스우면서도 그답다.

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둘 다 쏘아 버리고 싶지만.’

나는 한눈을 팔고 있는 베르돌트를 향해 총을 겨누었고, 그의 팔을 쏘았다.

큰 총격 소리와 함께 총탄은 그의 오른팔에 명중했다.

“그걸 조건으로 받아들인 네가 당당히 할 말은 아니지."

베르돌트는 마법진에서 시선을 떼어 나를 바라보았다.

화를 낼 만한 상황임에도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맞는 말이네.”

마법진을 그리던 손이 멈추었다.

베르돌트는 피가 흐르기 시작한 제 팔을 내려다보더니 멀쩡한 왼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확실히 조금 신기하네. 보니까 넌 라그나르의 정체도 알고 있는 것 같고, 내 정체도 얼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베르돌트의 시린 시선이 내게 닿았다.

주변을 감싼 살기에 저절로 오싹하고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내가 널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겁먹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고작 너 따위를 무서워하기에는 내가 좀 험하게 살아와서.”

“그래?”

베르돌트가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눈을 빛내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상대할 여유가 없지 않나?"

“하?”

베르돌트가 나를 보다가 무언가 눈치챈 듯 황급히 몸을 움직였으나, 라그나르의 손이 그의 어깨를 공격하는 것이 더 빨랐다.

“뭐야, 멀쩡하네?”

베르돌트의 놀란 목소리에도 라그나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앞에 섰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까지야."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지."

마법진 위로 베르돌트의 피가 떨어지자 마법진이 환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발아래 있는 마법진이 밝게 빛나자 그가 보란 듯이 웃는다.

“또 쫓아와 보든가."

그와 함께 베르돌트의 몸이 빛에 둘러싸이더니 사라졌다.

“이동 마법진이야.”

내 말에 라그나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르는 망설임 없이 환하게 빛이 나고 있는 마법진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의 의도를 읽고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로 연결된 건지 모르잖아.

건 해”

따라가는 건 너무 위험해.”

“여기서 놓치면 우리를 또 어떻게 위협할지 몰라.”

“저자가 네게 무슨 짓을 한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 여기 일을 처리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면….”

라그나르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떼 내며 말했다.

"다음으로 미루면 늦어.”

"......."

"베르돌트는 미친놈이야. 그놈이 눈이 돌아가서 혹시나 네가 다치게 된다면 나는….”

라그나르가 나와 시선을 피하고서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정말 슬플 거야.”

단조로운 말이었으나 목소리에서 떨어지는 진심에 나는 겨우 붙잡고 있던 그의 옷자락마저 놔주었다.

“꼭 무사히 돌아올게.”

그 말과 함께 라그나르는 마법진으로 뛰어들었다.

곧 하얀 빛이 그를 감쌌고, 감쪽같이 사라지고 나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플뢰르.”

“네, 아가씨.”

“부모님께 금방 돌아온다고 말씀드려.”

"네?"

내 말에 플뢰르가 깜짝 놀라 내 명령도 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기지 않아? 연인이 다쳤을 때 슬픈 사람이 자기뿐인 줄 아나 봐.”

나는 어이없는 목소리로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다녀올게.”

“자, 잠시만요! 아가씨!"

플뢰르의 당황 섞인 목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뛰는 발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멍청이!?

애초에 베르돌트가 뿌린 가루도 수상했는데, 이 모든 게 그의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는지!

지금 라그나르를 따라가지 않으면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나는 어느새 마법진에 도착해 있었다.

그 위에 올라서자 남아 있는 마력에 반응하며 마법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로 이동될지 몰라.'

나는 마음을 굳게 먹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곧 내 몸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 돼요!"

누군가의 비명도 들려왔던 것 같다.

* * *

눈앞을 가득 채우던 빛이 사라진 것을 알고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한 절벽 바로 앞이었다.

'라그나르랑 베르돌트는 어디로 간 거지?'

생각하기 무섭게 숲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나무가 쓰러지고, 불이 높이 타오르기도 하고.

거침없는 싸움의 현장이 숲 안쪽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다.

숲 안쪽으로 이동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마법진의 환한 빛이 다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마법진 위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유니스?'

그러고 보니 내가 이동할 때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던 것도 같다.

아마 유니스가 뛰어드는 것에 깜짝 놀란 마리아의 비명이었나 보다.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

유니스는 조용히 고개를 들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프레이르랑 닮았네.”

“부부가 쌍으로 진짜.…."

공작이 했던 말이 떠올라 대화를 섞기조차 싫어졌다.

왜 이곳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에게 관심을 줄 시간도 없었다.

“네가 그랬지. 이곳은 현실이라고.”

유니스는 그리 말하면서 주변을 한 번 살펴보았다.

답하기 싫어 고개를 끄덕이자 유니스가 쓰게 웃었다.

“그래, 현실이더라.”

유니스의 눈빛은 예전과 조금 달랐다.

마냥 희망에 매달리는 것이 아닌 체념 섞인 눈빛.

끝을 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그녀의 시선 끝이 닿는 곳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숲이었다.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유니스의 말에 나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불만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그나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게. 그러니까…."

“설마 그 방법이란 게 베르돌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 물음에 유니스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어떻게 그걸….”

“이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네가 베르돌트랑 계약했다는 것도 이상했어.”

그가 얼마나 위험한 자인지에 대해서는 작가인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베르돌트와 계약을 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라그나르에게 베르돌트의 최후를 전해 들은 이상 그녀에게 궁금한 점은 없었다.

어차피 둘 사이의 싸움은 라그나 르가 이길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곳까지 쫓아 온 이유는 단지 혹시 모를 상황에 그가 다칠까 봐….

걱정이 되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를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그나르는 베르돌트와 다르게 혼자가 아니니까.

내 말에 유니스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아이들은 죄가 없어.”

“뭐?”

“염치가 없지만 내 아이들은 죄가 없으니까 살려 주면 안 될까?

죄 많은 부모 때문에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 것을 생각하면 나는…!”

참으로 역겹고 뻔뻔 했다.

“내 앞에서 잘도 그런 말을 꺼내는구나. 뻔뻔하게도."

“…아이들은 죄가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맞아 죽을 뻔할 때 나를 구해 주기라도 했나?"

“…미안해."

유니스는 예전과 다르게 내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증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고개를 획돌렸다.

말하지 않아도 마리아와 카스토르가 죄가 없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둘에게 죄를 물을 생각도 없었다.

다만 이러한 와중에 자기 자식들을 챙기려는 그녀의 모순적인 태도에 화가 났을 뿐이다.

'화를 낸다고 해도 소용없는 것 알잖아.'

유니스에게는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깝다.

알고 있으면서도 넘쳐나는 분노로 인해 떨리는 손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한마디라도 해 주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유니스의 뒤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고, 곧 그녀가 거칠게 피를 토해 냈다.

“조금 부족했는데 잘됐네."

베르돌트의 목소리와 함께 유니 스의 몸은 힘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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