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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83화 (183/185)

제183화.

베르돌트는 피로 범벅이 된 손이 찝찝하지도 않은지 그저 가볍게 털어 내며 웃었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서 미소 짓는 살인마의 모습이 어찌나 이질적으로 보이는지 나는 이 끔찍한 상황을 지켜보며 경악을 삼켜야 했다.

유니스는 마치 생명력이라도 빨린 듯 조금 전과 다르게 종잇장처럼 힘없이 바닥에 몸을 떨구었다.

'죽은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린다고?

내가 당장 유니스에게 달려가려는 순간 뒤에서 나타난 라그나르가 그를 공격하는 것이 빨랐다.

베르돌트와 유니스가 서 있던 자멍이 났다.

리에 라그나르의 공격으로 큰 구

“진짜 끈질기네.”

베르돌트의 목소리에 귀찮음이 넘쳐났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라그나르는 나를 보며 살풋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조금 억울해졌다.

'반대 상황이었으면 내 말도 안듣고 바로 따라왔을 거면서.'

애석하게도 우리가 더 대화를 이어 갈 여유는 없었다.

베르돌트가 조금 전까지 싸움을 벌이던 숲으로 뛰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라그나르는 바로 그를 쫓으려다가 멈칫하며 멈춰 섰다.

“기다려 줘.”

자신이 입고 있는 외투를 내게 걸쳐 주고서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아무래도 멀리 나가서 싸울 생각인 것 같았다.

'괜히 온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무작정 따라와 라그나르에게 폐만 끼친 것이 아닌가 싶어지는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할 유니스가 그 자리에 없었다.

“뭐지?"

라그나르가 준 외투를 꼭 쥐고서 주변을 살피는데 낭떠러지의 아슬아슬한 끝에 그녀가 서 있었다.

유니스는 치명상을 입은 복부를 움켜쥐고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직면하고 있었다.

산의 거센 바람에 좋지 않은 몸으로 그곳에 서 있으니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유니스는 자신의 의지로 저곳까지 걸어간 것이다.

저 아래로 떨어지기 위해서.

“죽음으로 죄에서 벗어날 생각하지 마"

내 말에 유니스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그렇다면 내 죽음 정도는 내가 정해도 되는 것 아니야?"

헛소리하지 말라고 화를 내고 싶었는데 그녀는 내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슬쩍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슬피 웃는다.

얼굴에 절절하게 미련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진짜로 뛰어내릴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우선 치료를 받게 하고 법정에 세우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뒤에서 다시 환한 빛이 넘쳐 흘러나왔다.

벌써 몇 번이나 보아서 익숙한 빛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나만큼 말을 안듣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리아와 카스토르, 플뢰르 그리고 공작까지 마법진을 타고 이곳으로 이동해 온 것이다.

* * *

유니스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앓는 소리를 참아 내었다.

‘죽은 척해야 해..'

그녀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걸 들킨다면 앞에 있는 베르돌트가 또 자신을 잔인하게 공격할 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나 조용히 쓰러지니 베르돌트는 유니스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베르돌트가 사라지자마자 유니스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떠 올렸다.

그리고 바로 앞에 보인 장면은 라그나르가 다프네를 향해 자신의 외투를 벗어 걸쳐 주는 모습이었다.

라그나르가 다프네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걱정과 염려 외에도 뚜렷한 애정이 보였다.

라그나르가 마리아에게 보여 주었어야 할 애정이.

‘아니지. 정말 마리아에게 주어져야 했던 것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유니스는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을 사랑한다 속삭이던 콘란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그의 눈빛도 떠올렸다.

진실을 알게 되자마자 대화는커녕 그녀를 무시하고 자신의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집을 계속 비우며 신경 쓰이게 하던….

아마도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

'정말 사랑한 게 맞을까.'

콘란드가 유니스에게 보여준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애정이고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운명이었다.

하지만 운명에 맹신한 결과는 그 모든 것을 부정이라도 하려는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엉망이었을지도’어쩌면 처음부터 이곳이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유니스는 그제야 자신이 참한심하게 느껴졌다.

'내가 무어라고.'

공작저에서 다프네와 이야기했던 그날.

올라오는 화를 이기지 못해 가짜라며 망언을 꺼내었지만 그건 진실한 속마음이 아니었다.

유니스는 못난 어미를 보호해주기 위해 베르돌트의 공격에 제 앞을 지켜주던 자식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더 잘해 줄 것을.'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후회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욱 빨리 알아차릴 것을.’

유니스는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삼키며 추위에 달달 떨리는 몸에 힘을 주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이 모든 상황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겠지.'

유니스는 차가운 현실에 내던져져 드디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미치도록 부끄럽고, 또 과거의 제가 원망스러우며, 바르게 잡을 기회조차 놓친 자신이 한심했다.

유니스는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몸을 세우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찌나 까마득한지 주변을 감싼 것은 모두 어둠뿐이었다.

까만 어둠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저것이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택하는 죽음.'

유니스는 과거의 자신이 정한 운명 속에 얽혀만 있던 삶에서 겨우 벗어났다는 생각을 하며 숨을 내뱉었다.

새하얀 입김이 공중에 널리 퍼져 사라졌다.

마지막 선택을 앞둔 그녀는 요며칠 살겠다고 아등바등 몸서리친것과 다르게 처연해 보였다.

'지금의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네. 마지막에 모두를 보고라도 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디 이 선택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폐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유니 스는 짙은 후회의 마음을 차곡차곡 접으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떠오른 콘란드의 얼굴에 망설임이 서렸다.

'사실 나는…. 아니, 이제 와서 깨달아도 너무 늦은 거겠지.'

유니스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뛰어들기 위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순간 마법진에서 익숙한 인영들이 튀어나왔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타나 유니스는 참던 눈물을 떨구었다.

'이 와중에도 당신은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구나.'

콘란드는 마리아와 카스토르의 손에 억지로 딸려 왔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쩌면 귀찮은 여자를 이제야 끝내 버릴 좋은 기회라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슬퍼하지 말자. 이 모든 것을 만든 것은 나니까. 책임지고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자.'

그럼에도 유니스는 미련이 남아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사실은 거짓말이었어.”

"......."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아.”

뒤늦게 깨달은 마음.

어차피 닿지 않을 마음.

'나 홀로 가진 마음.'

“그러니 우리 이젠 그만하자."

유니스는 망설임 없이 발을 떼어 벼랑 끝으로 몸을 던졌다.

원망스럽지만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경멸하는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 유니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몸은 붕 떠오르더니 낭떠러지 아래로 거침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유니스는 마지막까지 죽음으로 도망치는 선택을 하였다.

남은 이들의 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채.

그녀는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 * *

유니스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유니스!!!"

그 순간 헤로니스 공작이 달려가 손을 뻗었으나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벼랑 아래의 어둠으로 사라졌다.

이미 크게 다친 몸으로 까마득히 높은 곳에 떨어졌으니 아마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비겁하네..'

헤로니스 공작은 마치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벼랑 아래를 향해 손을 뻗은 채 굳어 있었다.

애석하게도 닿지 않는 손을 접지도 못한 채 아래로 향한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다.

'결국, 자신이 편한 대로 선택했구나.'

차라리 남아서 그에 대한 죗값을 치르지.

마리아와 카스토르 또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엄마…”

"어머니….”

떨리는 목소리가 어찌나 서글픈지 두 사람은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정말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구나.’

이건 정해진 운명을 맹신하며 모든 책임을 회피하려던 자의 최후의 모습이었다.

공작은 유니스를 차갑게 외면했던 자신은 떠오르지도 않는지 애절한 눈빛으로 슬퍼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쯤이면 됐잖아! 이쯤이면!”

헤로니스 공작은 눈물이 가득히 고인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소리쳤다.

지금껏 보여줬던 태도와 확연히 변한 것에 비죽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유니스가 죽음으로 죗값을 치렀으니 그만 용서해 줄 때도 되었잖아!”

“가여운 유니스.….”

“가엽다고요? 그녀는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가는 걸 선택한 거예요. 정말로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면 남아서 죗값을 받는 걸 선택했겠죠.”

“그 입 닥쳐!”

공작의 눈물 젖은 소리에도 나는 거침없었다.

"닥쳐야 할 건 당신이야.”

"......."

“애초에 당신이 다른 여자에게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당신에게 마음을 품지 않았더라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야."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책임을지는 건 당연하잖아.”

공작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당신은 도망칠 생각하지 마. 남아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이것이 내가 헤로니스 공작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였다.

모든 관계의 파멸.

최악의 결말.

이것은 비겁한 도망자의 말로였다.

**

더는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들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나는 뒤따라온 플뢰르에게 그들을 맡기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 내 옆에 작은 푸른 빛 구슬이 갑자기 나타나 주위를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제가 부른 정령이에요. 라그나 르 씨를 찾는데 도와줄 거예요."

마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그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난 그녀에게 짧게 고맙다는 말을 남긴 후 정령이 이끄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한참을 거친 숲속을 뛰어다녔을까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물의 정령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나는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거칠게 닦으며 경련하는 다리에 힘을 주어 땅을 박차고 달렸다.

숲속을 지나 나타난 것은 달빛이 환히 비추는 또 다른 벼랑 끝이었다.

“폭포….”

조금 전에 들리던 물소리의 정체는 폭포였나 보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고, 멀쩡히 서 있는 사람과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그나르!"

라그나르가 몸을 둥그렇게 만 채 쓰러져 괴로운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나는 베르돌트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 그를 살펴보았다.

"도망가, 다프네.….”

간신히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위태로운 목소리.

힘겨운 목소리 사이로 간절한 애원이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느꼈던 데자뷔.

후회로 점철된 어린 날의 기억과 지금 이 순간이 겹쳐졌다.

라그나르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날 밤과의 데자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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