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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84화 (184/185)

제184화.

"내 동생은 어쩜 이렇게 멍청한 걸까. 너무 잘 속아.”

베르돌트는 노래라도 부르듯 흥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라그나르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간신히 그를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아, 혹시 내가 건 저주도 알고 있나?”

라그나르의 간절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가득 찼다.

“제발, 다프네….”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라그나르에게는 저주가 걸려 있어. 각성이 되면 주변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모두 망가트려 버리지.”

“시전자가 죽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 저주인지라 평생 사랑하는 이 또한 제대로 품지 못했어야 했는데…. 참 대단하지. 널 사랑하는 걸 선택하다니."

“지금껏 관심 가지지 않으려 했는데. 이제는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야.”

베르돌트는 의외로 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치사하잖아. 자기 혼자 완벽한 드래곤이라니. 부모 잘 만나서 이 딴 식으로 편히 사는데 같은 형제로서 억울해서.”

나는 그런 베르돌트를 싸늘히 노려보며 말했다.

“너 그거 자격지심이야.”

"....."

“결국, 네가 가진 게 부족해서 남의 것을 부숴 버리고, 망쳐 버리는 거 그거 진짜 한심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베르돌트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그 자세로 굳었다.

하지만 눈빛은 금방이라도 나를 찢어 버릴 것처럼 매서웠다.

육식 동물 앞의 초식 동물이 된 기분.

무섭고 소름이 끼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고 싶었으나 그런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더욱 라그나르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각성 때 몸이 약해진다 했어.

내가 도망가면 이자가 라그나르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렇기에 더욱 놓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라그나르 말로는 저주가 풀렸다고 했는데.'

혹시 우리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로 안심시켰던 것일까.

“죽기 직전에 하는 반항이야?"

“죽일 테면 죽여 봐. 쉽게 죽어줄 생각 없으니까.”

내 말에 베르돌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꽤 아프긴 하더라."

“꽤 .”

다친 팔을 만지작거리며 하는 말이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죽기 직전에 얼마든지 떠들어 보라는 듯 여유로운 반응이었지만 그의 뒤에 있는 숨은 동요가 느껴졌다.

그렇기에 나는 꺼내고 싶은 말을 아낌없이 꺼내었다.

“열등감에 미쳐서 결국 돌이킬수 없는 선택을 한 것. 그것에 대한 책임 곧 받게 될 거야.”

“감히 누가? 두려워서 벌벌 떠는 네가? 약해진 라그나르가?"

"...."

"어떻게 라그나르의 공격에서 벗어날지를 생각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 같은데.”

베르돌트는 나를 비웃으며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뭐가 나빠. 열등감을 만들어 내는 것을 없애 버리겠다는데.”

“방법이 잘못되었으니까!"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야?”

말이 통하지 않았다.

베르돌트는 내 말을 가볍게 흘려 들으며 라그나르를 가리켰다.

“그 녀석 곧 각성할 거야.”

“그러고 보니 궁금하겠네. 어떻게 각성이 일어났는지.”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공작 부인이 알려 줬거든. 강력한 드래곤의 기운은 어린 드래곤의 각성을 끌어내 준다고.”

“설마… 아까 그 가루가….”

"드래곤 하트를 곱게 갈아서 뿌려 줬어. 고룡의 드래곤 하트니 얼마나 강력했겠어. 라그나르는 지금 그걸 버티고 있는 거야.”

너를 위해서.

그 말과 함께 베르돌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무슨 신파극인지.”

우리 둘을 보며 비웃는 태도는 이미 승자의 여유가 가득했다.

“다, 프, 네.”

한 자 한 자 겨우 꺼내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베르돌트는 입꼬리를 귀까지 끌어 올리며 기쁘게 웃었다.

“시작이네.”

그는 내가 라그나르의 손에 처참히 죽기를 지켜보려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라그나르가 괴로워하기를, 좌절하기를, 모든 것에 희망을 잃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라그나르."

나는 그런 라그나르를 내 품에 끌어안으며 눈을 꼭 감았다.

“난 널 다시는 버리지 않아.”

무섭지만 괜찮아.

귓가에 들리는 것은 라그나르의 거친 숨소리.

“두 번 다시 네 손을 놓지 않아.”

이성을 잃어 가면서도 라그나르가 꺼내는 말은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이런 너를 어떻게 두고 가.'

곧 푹하고 무언가 찌르는 소리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넓게 퍼졌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스스로의 배를 찌르고 있는 라그나르가 보였다.

* * *

“아직 저주도 풀지 않았는데 벌써 나가겠다는 거냐.”

요제프의 말에 라그나르는 쓰게 웃었다.

“더 늦어지면 안 되니까.”

라그나르의 말에 요제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부가 더 잘 알고 있잖아. 인간들의 수명은 우리와 다르게 터무니없이 짧다는 것.”

“알고야 있지.”

“그러니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아.”

라그나르는 어린 소년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반려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다 프네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 함께 보내는 시간으로 충분해."

“그러니 어서 가서 함께 있고 싶어. 사과도 하고 싶고, 쌓인 오해도 풀고 싶어.”

“진심이냐?”

"아니, 사실 반려가 되고 싶어. 만나자마자 그 말부터 튀어나올지도.”

라그나르의 말에 요제프가 싱겁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놈.”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다 멍청하대.”

“내가 서재에 연애 관련 책을 두는 게 아니었지.”

“연애 책 말고 철학 관련된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

라그나르의 말대꾸에 요제프가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만약 딱 하나 방법이 있다면?"

“방법이 있어?”

"네가 크게 다칠 거다.”

마지못해 꺼내는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라그나르는 눈을 빛내며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간절한 눈빛에 요제프는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격의 피해를 네게로 돌릴 수는 있어.”

“그럼 내가 다프네를 공격하려고 해도 나를 공격하게 된다고?”

“공격이 되돌아가는 거지. 공격반사 마법을 응용한 거야.”

“해 줘!

“해 줘!”

라그나르가 어린애처럼 떼를 쓰기 시작하자 요제프가 엄하게 말했다.

“잘 생각해. 각성 시기에 발동되게 걸어 줄 수는 있어. 다만 그걸 잊으면 안 된다. 잘못하면 죽시기가 되면 네 몸이 약해진다는 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괜찮아.”

"…멍청한 놈."

"더는 다프네에게 두려움을 주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거야.”

다프네의 두려움마저 자신이 안고 가겠다는 말에 요제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떠나는 라그나르의 소원을 안 들어줄 수도 없었다.

라그나르는 저주를 푸는 대신 자신에게 공격을 되돌리는 법을 선택했다.

라그나르는 죽음 따위 두렵지 않았다.

소중한 이가 더는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의 손에 더 이상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한 선택.

이것이 라그나르가 선택한 희생이고, 사랑이었다.

* * *

라그나르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멍청한 짓을 했네.”

뒤에서 재미없다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반사 마법을 걸어 놓았을 줄 몰랐는데. 누가 해 준 건가?"

하지만 이내 그가 즐거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니지. 스스로를 죽이는 것도 재미있겠네.”

“진짜 네게 진심인가 봐. 신기하네. 왜 인간을 사랑하지?”

라그나르의 상처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쩔 줄 몰랐기 바빴다.

이 상황에서는 내가 도망치는 게 맞았을까?

어떻게 해야 라그나르가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흐릿해지는 시야를 막기 위해 옷깃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으며 생각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바보, 멍청이, 얼간이.”

나는 욕을 내뱉으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이런 짓을 해! 왜 그런 마법을 걸었어!”

라그나르는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성을 붙잡고서 웃었다.

“…내가 어떻게 널 다치게 해.”

라그나르가 갑자기 나를 거칠게 떼어낸다.

흔들리는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향해 멀어진다.

거센 폭포가 내리치고 있는 곳을 향해 마치 몸을 내던지려는 듯이.

그러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안 돼!”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라그나르는 점점 내게서 멀어졌다.

라그나르는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이것이 최선이라는 듯이.

"싫어, 싫다고!’ 저렇게 피를 많이 흘렸는데 저 상태로 물에 빠진다면 그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미 머릿속은 최악의 결말이 가득 찼다.

뒤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라그나르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모든 것의 주범인 베르돌트가 행복하게 이곳을 벗어날 일 따위 없게 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심장을….’ 라그나르가 잘못된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손에 쥐어진 리볼버를 장전하고 그대로 베르돌트의 심장에 겨누었지만 나는 그의 목숨을 취할 수가 없었다.

“뭐, 지?”

베르돌트의 몸에 이상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완전한 드래곤이 되는 건가?"

그는 희망이 섞인 목소리로 제 몸에 감도는 힘을 느끼며 지금껏 보여 주었던 그 어떤 때 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한순간이었다.

“으아악!”

베르돌트의 몸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불에 타오르듯이, 혹은 약에 녹아내리듯이, 전기에 감전된듯이 점점 흉측해져 가는 몸이 서서히 무너진다.

당황한 베르돌트가 제 몸을 살폈지만 그렇다고 망가진 몸아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예전에 혼혈이 완벽한 드래곤이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취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

"뭐?"

“하지만 그게 아니야. 많은 생명의 미움을 받은 이가 어떻게 드래곤이 되겠어. 악룡이 되어 신의미움을 받을 뿐이지. 너는 신에게 저주를 받아 죽고 말 거야.”

그게 네 최후야.

내 말에 베르돌트가 아니라며 지금껏 보아 줬던 여유로운 모습을 던져 버린 채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법은 없었다.

나는 리볼버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정해진 최후였고, 곧 사라질 자에게 신경 쓸 필요 없었다.

라그나르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다행.”

힘겹게 내뱉은 말은 문장을 만들지도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어느새 그의 이성이 완전히 끊기는 그 순간.

라그나르가 폭포로 몸을 내던졌다.

내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두려움 따위 날려 몸을 내던진다.

모든 것이 끝이 난다 해도 라그나르가 내 옆에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

무서웠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도 곧 내게 닥쳐 올지도 모르는 죽음도 무서웠다.

두려움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크기를 키워 갔다.

결국, 이 모든 두려움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을 알고 있었다.

'라그나르가 내 옆에 없다는 것.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소중한 사람을 또다시 내 눈앞에서 놓친다는 것이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 다시 잃고 싶지 않다.

내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라그나르를 뒤따라 뛰어내렸고, 간신히 그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낙하하면서 거센 바람 소리가 귓가에 가득히 차올랐으나 그럼에도 가장 크게 들리는 것은 크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였다.

“사랑해, 라그나르.

들리지 않을 사랑을 고백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죽음을 각오한 그 순간.

심장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고, 라그나르에게서 흘러나온 또 다른 빛이 우리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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