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85화 (완결) (185/185)

제185화.

콜록, 콜록.

나는 거친 기침을 토해 내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히 주변에 얕은 물가가 있어 헤엄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라그나르를 안전한 곳에 눕힌 후 나는 푹 젖은 옷자락의 물기를 짜내며 조금 전 보았던 빛들을 떠올렸다.

차가운 물속에 몸이 내던져져 그대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뻔했다.

한겨울의 냉기가 가득한 폭포임에도 불구하고 차갑지 않다고 느껴진 이유는 어째서였을까.

각성 때문에 평소보다 뜨거웠던 라그나르의 체온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심장에서 피어난 빛 때문일까.

혹은 라그나르에게서 퍼져 나온 하늘빛 때문일까.

나는 심장 위에 손을 얹으며 신기한 기분에 감싸였다.

평소보다 더욱 두근거리는 소리가 잘 들려온다.

무어라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라그나르와 내가 연결된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심장에서 피어난 빛, 그리고 서로 연결된 것 같은 신기한 감각.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몸.

"반려의 인….”

그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갑자기 맺어진지는 모르겠으나 둘 다 무사할 수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지우며 라그나르를 살폈다.

다행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라그나르의 복부에서 멈출 기미없이 흘러내리던 피도 멈춰 있었고, 그곳에 난 상처도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어쩌면 신의 축복일지도.'

이 순간 피어난 반려의 인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던 거겠지.

누군가는 신의 저주를 받고, 누군가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기뻐서 그제야 입가에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라그나르는 열에 달뜬 것을 제외하고는 멀쩡해 보였다.

'우선 안전한 곳을….’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라그나 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하늘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늘색 빛 가루는 우리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더니 공중에 떠올라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를 안내해 주려는 듯이 한곳으로 향하는 것에 나는 라그나르를 부축하며 천천히 그 빛을 따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쩐지 이곳이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듯 하늘색 빛은 한곳에 도달하자마자 공중에 멈추었다.

"고맙습니다.”

나는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마음을 다잡으며 감사의 인사를 꺼내었다.

“고마워요, 요제프."

라그나르와 함께 왔었던 요제프의 레어 앞에서 나는 라그나르에게서 피어난 하늘빛이 요제프의 기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늘색 빛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듯 공중에 널리 퍼지며 사라졌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며 참아 냈다.

그리고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지난번에 정리해 둔 탓에 설치되어 있던 함정 마법도 없이 깔끔한 길을 걷다 보니 요제프의 시체가 있던 곳에 도달했다.

“으윽.”

그때 라그나르가 갑자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우선 평평한 곳에 라그나르를 내려놓고 안쪽에서 담요나 이불을 찾아올 생각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올게!”

나는 기억을 되새겨 침실이 있던 곳을 찾아내었고, 그곳에서 이불을 챙긴 뒤 급하게 돌아갔다.

"저게 뭐지?”

그런데 라그나르가 있던 곳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큰일이 생겼을까 나는 화들짝 놀라며 발에 속도를 가했고, 도착하자마자 본 경이로운 광경에 말을 잃고 말았다.

라그나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거센 빛이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그의 몸집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빛은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내 은은한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나타난 것은 이 동굴의 반을 채울 만큼 거대한 몸체였다.

아마도 라그나르의 본체인 것 같았다.

나는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천천히 거대한 검은색 비늘로 뒤덮인 드래곤에게로 걸어갔다.

여전히 열에 들떠서 거센 숨을 쉬고 있었다.

“이게 각성이구나.”

나는 놀라움을 삼키며 들고 온 이불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봐도 작은 것 같지.…?"

나는 둥글게 몸을 만 라그나르의 주위를 빙 돌다가 꼬리 중간에 겨우 이불을 덮어 줄 수 있었다.

나는 라그나르가 동그랗게 말고 있는 사이의 빈틈에 들어가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여분으로 챙겨 온 담요를 덮으며 라그나르의 비늘을 천천히 쓰다듬어 보았다.

뜨겁기는 했으나 반짝거리고 윤이 나는 비늘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거대한 형체의 두려움을 느낄 만도 하건만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이 신기하면서도 즐거웠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는 후련함, 그리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에서 피어난 안도감.

나는 라그나르의 비늘을 한참이고 쓰다듬으며 계속 속삭였다.

“사랑해.”

돌아오는 답은 없다.

열에 들뜬 거친 숨소리만 들려오는 것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속삭였다.

“진심으로 사랑해.”

이번에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어서 일어나 줘.”

손을 놓지 않았으니까 이 정도는 바라도 되는 거겠지?

어느새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라그나르의 거친 숨소리는 마치 태풍의 바람처럼 소리가 거셌으나 오히려 미풍보다 더욱 안정감을 주었다.

안정감, 안도감, 그리고 행복감.

“사랑하는 나의 반려, 어서 일어나 내 곁으로 돌아와 줘.”

나는 잠이 들 때까지 한참이고 그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모든 일이 끝난 새벽이 그렇게 지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나는 주변이 시끄러워진 것을 버티지 못하고 무거운 눈을 떴다.

온몸이 으슬으슬하고, 기침이 나올 것 같아 담요를 더욱 끌어 올리려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라그나르?”

라그나르의 몸이 줄어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모습으로, 내가 잘 알고 있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잠결에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는지 나는 그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나는 귓가에 들리는 라그나르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아가씨!"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았으나 격앙된 목소리에 다시 힘겹게 눈을 떴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플뢰르였다.

곧 여러 발소리가 들려왔고, 감동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어요!

아가씨!"

“다프네!”

플뢰르의 뒤로 아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큰 동굴에 널리 퍼졌다.

"나 여기 있….”

라그나르를 떼어 놓고 손을 들어올리려 했으나 그가 빠져나가는 나를 잡고서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라그나르?"

내 목소리에 라그나르의 두 눈이 잘게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보라색 눈을 마주하자마자, 그 안내가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는 눈, 그 안에 내가 비치는 것이 보이자 나는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렇게 무사히 빠르게 내 곁에와 줬다는 것에 한참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감동의 순간에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네 얼굴 보고 싶어.”

하지만 라그나르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고, 곧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부드럽고도 정중한 입맞춤에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었다.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해서.

라그나르와의 입맞춤은 오래가지 않았다.

짧은 입맞춤 후 고개를 뗀 그가 나를 살펴보더니 환히 웃었다.

"나도 사랑해, 다프네.”

새벽에 한 나의 사랑 고백에 답을 해 주듯 꺼낸 말에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환히 웃었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아주 행복하게.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에 집중했다.

무사히 살아 돌아온 지금 우리 주변에 누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빈민가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체포하겠습니다.”

시몬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을 잊지 못할 것이다.

눈앞에 드러난 증거에 부정하지 못하던 그 모습도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황제는 불명예스럽게 황좌를 내려놓아야 했다.

황후는 슬픔에 젖어 시몬을 설득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곧 빈민가를 둘러쌌었던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전 제국에 널리 퍼졌다.

전 황제의 사주, 위험한 연쇄 살인마, 모든 것을 묵인하고 전 부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공작과 그를 도운 오벤 백작.

당장이고 죄인들에게 참혹한 벌을 내려야 한다는 시위가 일어나고, 제국이 혼란스러웠으나 시몬은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약속하며 그들을 해산시켰다.

마리아와 카스토르는 플뢰르의 도움을 받아서 콘란드를 데리고 함께 황성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한순간에 어머니를 잃었고, 최악의 하룻밤을 보내었다.

콘란드는 강제로 공작 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빈 헤로니스 공작의 자리를 둘러싸고 이야기가 많았으나 마리아도 카스토르도 공작 위를 이어받지 않았다.

고용인들에게 퇴직금을 제공해 주고, 필요한 최소의 경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황실과 빈민가에 나누어 기부하였다.

둘은 시몬에게 공작 위를 거두어 달라 부탁하였고, 시몬은 기꺼이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헤로니스의 이름을 버리고 온전히 마리아와 카스토르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제국에 공작 위가 사라진 셈이 되었지만, 그 누구도 그 선택에 대해 어리석다 표현하지 않았다.

그것이 두 사람이 부끄러움을 알고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었으니까.

헤로니스 공작이었던 콘란드는 자식들의 선택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모든 것이 모래처럼 내 손을 빠져나갔구나. 가문도, 사랑하는 이도.”

이것은 콘란드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다.

콘란드는 마지막으로 황제 대리인 시몬에게 청했다.

“프레이르가 죽은 첨탑에서 똑같은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이하겠습니다.”

시몬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였으나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고작 일주일의 시간이었지만 모든 것은 마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 갈때쯤 대공저에서 다프네가 눈을 떴다.

**

몸이 아주 가볍고, 또 개운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서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습게도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라그나르였다.

얼마나 시간이 오래 지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상태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차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문이 열리고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그나르는?"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얼굴을 보고 싶어. 데려다줘."

플뢰르가 내 물음에 당황하더니 급하게 내 어깨에 숄을 얹어 주고서는 방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손님방의 문이 열렸고, 따스한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 아래 놓인 침대 위에 내가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제 막 일어난 듯 머리를 누르며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니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듯 귓가에 가득 찼다.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따뜻해 푸스스 미소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너는 정말 약해서 내가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되겠어. 벗어날 생각하지 마.”

내 말에 라그나르가 웃었다.

너무나도 기쁘다는 듯이 한겨울에 꽃이 피어나듯 아주 환하게 웃었다.

"반려의 인도 맺어졌으니까 이제 넌 내 거야. 멋대로 목숨 던지는 일 용서 못 해.”

“응. 나도 사랑해.”

라그나르가 내 허리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우리의 고개가 서로 가까워졌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우리를 감쌌다.

나는 죽음을, 라그나르는 나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내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위협할 많은 것들이 있을 테지만 함께라면 분명 서로를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마주 보며 안도와 행복이 섞인 웃음을 지었다.

둘 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이겨 내었으니 이제 어떤 것도 무섭지 않았다.

잃느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지켜낼 것이다.

'언제든지 이겨 낼 수 있다.'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거센 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눈보라.

분명 내게 겨울은 춥고, 시리고, 괴롭기만 한 계절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내게 춥고 무서운 계절이 아니었다.

라그나르의 입가를 매만지며 나는 환히 웃었다.

차갑기만 하던 겨울에도 꽃은 피어나더라.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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