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
“엉엉엉! 사, 사장님 좋아요!”
“이놈이 갑자기 미쳤나! 야! 정신 차려!”
갑자기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어대는 핫산 때문에 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제 모, 목숨을 다 바쳐서 일할게요. 싸, 싸랑합니다. 사장님!”
아니 이 시키가.
왜 오바야?
니가 뭔 논개냐?
뭔 목숨을 바쳐!
니가 오래오래 살아야 내가 이득인데!
“바, 밖에 아무도 없냐!”
마침 사무실 앞을 지나가던 김 여사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이스 타이밍이야.
김 여사!
“이건 또 뭔 일이래?”
“기, 김 여사! 이 놈 좀 어떻게 해봐! 갑자기 퍼질러 앉더니 질질 짜고 있어!”
김 여사도 대성통곡하는 핫산을 보고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자연스레 녀석을 감싸 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엉엉 울던 핫산이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다.
김 여사는 품에 안긴 핫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후우.
김 여사의 연륜이 이리 유용할 줄이야.
저게 바로 어머니의 힘이라는 건가?
“아무튼 떠돌이 상단 건은 다 처리했고.”
떠돌이 상단 본부에서 구해온 다른 이들에게도 적당한 급여와 함께 일자리 및 숙소를 배정해 주었다.
핫산이 가장 마지막 순서였을 뿐.
나는 머릿속에 기록해 두었던 할 일을 떠올렸다.
으음.
뭐가 남았더라?
- 좀비 퇴치제 성능 개량.
- 입주민들과의 면담.
- 개조 석궁 판매.
- ...
아니, 뭔 놈의 일이 이리 많아!
날이 날수록 일이 점점 더 쌓이는 느낌이었다.
일을 미루거나 안하는 것도 아니고 그날 처리해야 하는 일을 모두 끝내고 있음에도.
아.
스트레스 받는다.
“끄어어...”
갑작스러운 현자 타임 때문일까.
몸에 가득하던 활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꼿꼿하던 자세가 흐물흐물해지며 의자와 한 몸이 되었다.
어제 밤새서 움직인 피로까지 나를 덮쳐왔다.
아, 안 돼.
지금 잠에 빠지면...!
의자에 축 늘어져 있던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손을 들었다.
나, 나와라 잔고!
눈앞으로 익숙한 글씨들이 표시된다.
[현재 잔고]
- 순 자산 : 52억 8천 2백만 원.
- 부채 : 0원.
눈이 번쩍 떠졌다.
으갸갸갸!
썰물처럼 빠져 나가던 힘이 다시 되돌아왔다.
자세를 바로 한 내 입가에는 어느새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역시 잔고 확인하는 것만큼 뿌듯한 일이 없지!
비타민이 별 거냐!
나는 옆쪽 창문을 열어 바깥에 두었던 캔 음료를 집어 들었다.
냉장고는 없지만, 서늘한 바깥바람 때문에 캔은 차가운 상태를 유지하는 중.
찰칵!
탄산 특유의 찌릿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다시 기운을 차린 나는 밀린 업무로 복귀했다.
이제 처리할 게...
좀비 퇴치제 개량이었지?
“에잉.”
갑자기 짜증나네.
좀비들만 있었으면 기존 제품으로 평생, 펴어엉생!
사골까지 우려먹을 수 있었는데!
“망할 놈들.”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공장 업그레이드를 멈추지는 않았다.
- 공장을 업그레이드 하시겠습니까?
- 1. 퇴치제 독성 강화
- 2. 설비 전환
여기서 2번을 선택하면, 퇴치제가 아닌 다른 물품들을 생산할 수 있었다.
수면 가스나 최루탄 같은 것들.
어떻게 아냐고?
해봤으니까 알고 있지.
지난번 떠돌이 상단 놈들에게 써먹는다고 작은 라인 하나를 바꿔둔 상태.
앞으로도 경비대가 쓸 수면 가스나 최루탄은 모두 그 라인에서 생산할 예정이었다.
나머지 라인들은 전부 퇴치제 독성 강화를 선택할 거고.
- 공장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비용을 산출하고 있습니다...
- 예상 소요비용 : 2억원.
나는 명치를 손으로 슥슥 쓰다듬었다.
드럽게 비싸네.
솔직히 무지막지한 업그레이드 비용을 볼 때마다 속이 쓰렸다.
그렇다고 그걸 안 할 수도 없는 노릇.
괴물들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라운드밤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퇴치제로선 발목만 붙잡는 게 한계였다.
언젠가 더 강한 놈들이 나오면, 퇴치제의 쓸모는 더욱 줄어들 터.
차라리 그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게 나았다.
시장 변화에 발 맞춰 따라가야 명일 제약 꼴을 피할 거 아냐.
“업그레이드.”
공장이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 공장 설비를 튼튼한 것으로 교체했습니다.
- 기계를 막 굴려도 잘 고장 나지 않습니다.
- [설비 고장 확률 감소]
- 설비가 교체되었습니다.
- 퇴치액 농도가 다소 짙어집니다.
- 이전보다 독성이 더욱 강화됩니다.
- [퇴치제 독성 강화]
그럼 어디 한 번 돌려볼까?
나는 부지런히 움직여 신제품을 생산했다.
정신없이 움직이기를 한참.
쿠웅.
완성된 신제품이 상자에 담겼다.
전반적인 구성이나 형태는 예전 좀비 퇴치제와 흡사했다.
버튼을 눌러 액체를 분사하는 방식.
하지만 그 겉의 디자인은 살짝 달라져 있었다.
- 괴물 퇴치제.
오호.
아예 이름이 달라졌어?
난 괴물 퇴치제를 허공에 한 번 뿌려봤다.
치익!
좀비 퇴치제가 구수한 참기름 냄새였다면, 이번 괴물 퇴치제는 소독약 냄새였다.
이거 어디서 많이 맡아본 건데...
아!
생각났다.
소독차 뒤꽁무니!
정말 오랜만에 맡는 추억의 냄새네.
나는 괴물 퇴치제를 시범적으로 올려봤다.
등록만 누르지 않으면 경매장에 올리지 않고도 상품 정보를 볼 수 있었으니까.
- 판매 물품을 스캔하고 있습니다...
- 스캔 완료.
- 아래 내용이 물품 정보에 표시됩니다.
- 괴물 퇴치제.
- 그리디 산업에서 제작한 괴물/괴생명체 퇴치제.
- 접촉한 모든 비(非)인간 개체들은 일시적으로 기절하게 됩니다.
- 개체에 따라 반응 차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상품 정보에는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 모든 비(非)인간 개체들은 극도의 거부 현상을...
좀비와 괴물 꽃, 라운드밤 할 것 없이 모두 퇴치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이거라면 좀비 퇴치제의 명성을 충분히 이어갈 수 있어.
나는 서둘러 움직였다.
하나만 빼고 다른 공장의 설비를 전부 교체해야 했다.
덕분에 생산이 잠깐 중단됐지만 상관없었다.
덜컹!
드르륵!
업그레이드로 멈춰선 것도 겨우 몇 분.
재단장을 끝낸 공장들이 다시 신제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떠돌이 상단 놈들을 시켜 구형 제품들을 한곳에 모았다.
반나절 동안 생산된 거라 물량이 상당하네?
요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사장님?”
“어?”
사무실 직원 하나가 어느새 내 뒤에 와 있었다.
“입주민 면담하실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 약속을 못 지키는 사람이 될 수는 없지!
나는 서둘러 사무실로 복귀했다.
좀비 퇴치제는 1+1을 하던 할인을 하던 소비하면 되니까...
아예 이사벨 패션 쪽 사은품으로 줄까?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고개를 든 나는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저것들은...
아!
그 녀석들이네.
명일 제약에서 구해온!
거기서 구해온 놈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나는 모든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과 간단한 신상명세까지 달달 외우고 있지.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녀석들은 ‘상류층’에 해당했다.
가지고 있는 재산이 상당해서 명일 제약에서도 ‘고급형 쉘터’에 머물렀던 자들.
“무슨 일로?”
서로를 힐끔 보는 입주민들.
아니.
여기까지 오고 나선 왜 눈치를 보는 건데?
이런 못난 놈들!
“언제까지 날 기다리게 할 거야? 나 바쁜 몸이다.”
“...요청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요청!
그걸 말하란 말이야.
내 시선에 흠칫한 입주민 대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호, 혹시 펜트하우스나 고급형 주택 같은 거는 분양 안 하십니까?”
“펜트하우스? 고급 주택?”
“네, 물론 지금 저희가 살고 있는 <안전지대>도 나쁘지는 않지만...사실 예전에 살던 곳보다는 조금 못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서요.”
“그래?”
진지한 얼굴로 의견을 청취하는 나와 달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들의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시선들.
무슨 의미로 노려보는지는 나도 대충 알 것 같았다.
- 감히 우리 사장님의 역작을 무시해?
- 당신들 제정신이야?
뭐 이런 거겠지.
입주민들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해댔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쯧!
이 녀석들 하여튼 과잉 충성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이것들아.
그래도 우리 고객인데 대화는 해봐야 하지 않겠니?
“니들 일 안 하냐?”
“죄송합니다. 사장님.”
입주민들을 째려보던 직원들이 곧바로 각자의 업무에 복귀한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의 입주민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기분 나쁘게 들리실 수 있는 건 압니다. 사실 지금 지내는 <안전지대>도 절대 어디 가서 떨어지는 수준은 아닌 것도 알고요. 다만 저희는...”
“이것들 이상한 놈들이네. 내가 왜 기분이 나빠?”
“네?”
아니, 고객이면 리뷰도 달 수 있고 의견도 낼 수 있지.
꼭 입 닫고 있어야 하는 법이라도 있나?
호갱님들의 피드백이 얼마나 중요한데!
지금까지 팔아온 물건들 상당수가 고객들의 니즈와 의견을 수렴한 것들.
난 언제든지 정당한 의견과 제안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게 내 사업을 더 크게 만들 거고!
“니들이 하고 싶은 말은 이거지? 원래 살던 곳만큼은 아니어도 더 나은 곳에서 살고 싶다? 이왕이면 호화스럽게?”
“마, 맞습니다! 바로 그거죠.”
더 나은 주거환경을 위해 돈을 쓰고 싶다는 데 어쩌겠어.
그 소원 들어 드려야지.
나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으음.
어디 견적 한 번 내보자.
펜트하우스라면...
건물 꼭대기에 있는 최고급 주거 형태를 뜻하는 거지?
그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그냥 지금 있는 <안전지대> 옥상에다 집을 따로 만들어서 얹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집이 얼마나 넓은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못 해도 한 동에 2채는 넣을 수 있을 것 같고.
고급 주택도 뭐...
“쌉가능이지.”
“네?”
흐흐.
내 웃음을 본 입주민들이 흠칫 몸을 떤다.
어허.
뭘 그리 긴장하시나.
릴렉스 하셔.
릴렉스.
누가 보면 너희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다.
“니들.”
“...?”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가만히 있어도 돈을 가져다 바치겠다고 할 줄이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허! 니들 용산이나 신도림 안 가봤어?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냐고! 펜트하우스 가격으로!”
“아.”
당황한 입주민들이 서로 눈을 맞춘다.
뭔가 눈으로 대화를 나누려는 것 같긴 한데...
그게 쉬운 건 줄 아냐?
결국 놈들도 눈으로의 대화는 포기하고 말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입주민 하나.
“3, 3억이면 될까요?”
오호.
처음부터 억 단위로 부르시겠다?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말을 꺼냈던 입주민이 황급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그 상황이 예전과는 좀 다르지 않습니까! 마, 마음 같아선 몇 십억씩 지르고 싶지만 그럴 혀, 형편이 못 됩니다!”
누가 뭐래?
나도 대충 안다고.
내 적당히 사정 봐드려야지!
나는 속으로 킬킬 웃으면서도, 이를 절대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딱히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항상 하던 습관대로.
하지만 입주민들은 이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3억은 좀 저, 적긴 했지. 5, 5억! 아니! 6억으로 하겠습니다!”
2배로 훅 뛰어버린 가격.
이게 웬 횡재냐?
나도 모르게 헤헤 웃을 뻔 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좋아.
이런 착각 마음에 들어.
잘만 하면...좀 더 올려볼 수 있겠는데?
나는 최대한 무심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겨우 그게 끝?”
“...”
나는 보란 듯이 팔짱을 끼었다.
낚여라...낚여라...
어서 미끼를 물어라.
대어들아!
그리고 이 돈 많은 녀석들은 알아서 걸려들었다.
“8, 8억! 아니 10억!”
“나는 더 드릴 수 있습니다! 12억!”
“15억! 15억까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