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고맙다 태규야! >
[물류 전송기 세트]
눈앞으로 스르륵 떠오르는 글씨들.
나는 당혹스러움을 애써 억누르고 글씨에 집중했다.
도대체 뭐 하는 데 쓰는 물건인지 알아둬야 했다.
-원활한 물류 전달을 위해 제작된 특별한 장치.
-기둥을 중심으로 반경 5미터 내에 있는 모든 물자(비생물)를 다른 기둥이 있는 곳으로 전송할 수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전송되지 않으며, 신체 구성 요소가 파괴될 수 있다.
-극도로 민감한 장치이기에 취급에 주의 필요.
전송?
설마 영화에 나오던 것처럼 텔레포트라도 하는 건가?
여기 설명만 보면 그런 느낌인데.
마음 같아선 여기서 바로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지만··· 이런 실험을 해보기엔 여기가 너무 난장판이었다.
일단 돌아가야겠다.
“나 먼저 간다.”
“네, 경호팀이랑 먼저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기 정리 다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경호팀!”
나는 우선 물자 전송기인가 뭔가부터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귀하신 몸이니 그냥 들고 가는 것보단, 상자에 넣어서 운반하는 게 훨씬 안전하겠지.
“야, 물어.”
크릉!
귀찮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젓는 핫도그.
요것 봐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빨랑 안 물어?
애써 내 시선을 외면하던 녀석이 마지못해 입을 살짝 벌려 상자를 문다.
나는 그제야 노려보던 눈을 풀었다.
어차피 할 거면서.
왜 똥고집을 부려?
부지런히 현장을 정리하는 경비대와 경찰대를 뒤로하고, 난 경호팀과 먼저 공장으로 복귀했다.
-그리디 산업.
경비대 대신 시설 경비를 맡은 경찰대원들이 날 보곤 서둘러 달려 나온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다들 나한테 인사하면서도, 괴물들과의 전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
야.
니들 눈 돌아가는 거 다 보인다.
“괴물들은 모두 착해졌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나간 애들도 곧 돌아올 거고.”
“그렇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여긴 별일 없었지?”
“네, 조용했습니다.”
“분위기는?”
“평소 같습니다.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를 겁니다.”
내가 주변을 슥 훑었다.
경찰대의 말이 맞았다.
공장은 평상시처럼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고, 입주민들 역시 밝은 얼굴로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깔끔한 옷차림에 밝은 얼굴.
종말이 온 세상을 덮쳤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광경.
살짝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풀어졌다.
그래.
니들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니들의 현재 위치에서,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종말?
괴물?
생존?
그딴 건 신경 쓰지도 마!
바깥의 사특한 것들은 이 싸장님이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니들은 나한테 돈만 벌어다주면 돼!
***
아우크들의 존재를 경고해 주었던 태규는 전투가 끝난지 하루가 더 지나고 나서야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
“···그래서 고놈들은 더 이상 깝치지 못할 거야.”
멍하니 듣고 있던 태규가 돌연 침상에서 내려왔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러냐.
태규가 바닥에 넙죽 엎드린다.
엎드리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머리를 쿵 찍기까지.
“감사합니다!”
“이, 일어나. 얼렁!”
이 미친놈이.
누굴 엿 먹이려고?
이거 누가 보면 욕하기 딱 좋은 구도네.
아무도 못 봤겠지?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막 병실로 들어오던 핫산과 눈이 마주쳤다.
“······.”
어버버 하던 핫산이 입을 열었다.
“싸, 싸장님. 갈비지.”
“이 시키가?”
지 딴에는 내가 못 알아듣겠지 하고 지껄인 거 같은데···
나 미국에서 꽤 오래 살았거든?
“이 놈이 미쳤나. 뭐? 쓰레기?”
“헉!”
몸을 흠칫 떤 핫산이 다급히 등을 돌려 병실을 뛰쳐나갔다.
놈을 뒤쫓으려던 나는 병실 입구에서 멈춰 섰다.
생각해보니 내가 쫓아갈 필요가 없네.
나중에 행정처 가서 김 여사를 혼내면 되잖아?
흥.
이게 바로 한국식 내리 갈굼이다.
김 여사도 보통 성격이 아닌데.
미리 애도를 표하마.
“넌 언제까지 엎드려 있을래?”
“아··· 네.”
애매하게 엎드려 있던 태규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젠장.
위엄 가득한 모습만 보여야 하는데···
나는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크흠!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아, 그리고 그 괴물들 물리쳤다고 하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푸른집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애들이 이미 가 있어.”
“가, 감사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당연한 소리를 뭐 그리 해?
그럼 입 싹 닦고 모른 척하려고 했냐?
그렇게 안 봤는데···
나는 슬그머니 근로감독관 안경을 톡톡 두드렸다.
[이태규(27)]
-현재 업무: 사장님께 감사하기.
-수행 가능: 근접 전투, 조직 관리, 행정 업무 처리, 악운 극복.
-최고 적합: 악운 극복.
나는 나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츄릅!
와.
이거 완전···
문무를 모두 겸비한 놈이잖아?
내 지금껏 수많은 놈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모든 분야에 걸쳐 다양한 능력을 지닌 녀석은 처음이었다.
싸움도 할 줄 알아.
서류 처리와 관리도 가능해.
그런데 운도 좋다고?
증말 어메이징하구만!
물론 각 적성의 최고치가 얼마인지는 볼 수 없지만, 어쨌든 다양하게 할 줄 아는 녀석이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이곳저곳 빵꾸 날 때마다 돌려 막기 좋겠네.
“우선 너나 잘 챙겨! 지금 너도 남 걱정할 상태 아닌 거 알지?”
목숨이 위급하지는 않지만, 태규 이 녀석도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상태.
저 상처들이 완전히 아물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자기도 알긴 하는지 태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얼렁 침대로 기어들어 가야지?”
똑똑똑!
“들어와!”
문이 열리고 광운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사장님, 푸른집 근거지에 갔던 대원들이 복귀했습니다.”
침대에 반쯤 누웠던 태규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다.
“생존자들은? 찾았냐?”
“네, 외진 곳에 숨어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몇몇은 상태가 안 좋아서 급히 수술에 들어가 있는 상태···.”
“수술실이 어딥니까!”
태규는 어느새 침대에서 나와 문으로 향하고 있는 중.
꽤나 재빠른 움직임이었지만, 문가에 자리 잡고 있던 광운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텁!
“이, 이거 놓으십쇼! 당장 제 동료들을 보러 가야 합니다.”
“진정하시죠.”
광운이 눈으로 내 의사를 물어왔다.
어떻게 하긴?
다시 눕혀!
광운이 그대로 태규를 끌고 와 침대에 강제로 눕혔다.
물론 태규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광운이를 힘으로 이길 수는 없는 법.
결국 보다 못한 내가 한 마디를 던졌다.
“너 계속 반항하면 구속구까지 채운다?”
“아, 알겠습니다.”
“마음이 급하겠지만 좀만 참아라. 니가 지금 들어가면 수술이 잘 끝나겠냐?”
“그건 그렇죠.”
그제야 겨우 진정하는 태규.
“나중에 걔들 상태 나아지면 병원장이 알아서 면회 허가할 거야. 그때까지 좀만 참아라.”
“네···.”
“너도 푹 쉬고.”
일단 부상 다 회복하면 그땐 꽤나 바쁘게 일해야 할 테니.
나는 광운이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사무실로 가자.”
“네.”
새롭게 개편한 사무실은 입주민들로 북적거렸다.
공간을 확연하게 나눠둔 덕분에 민원인이 직원들이 일하는 곳까지 침범하는 일도 없어졌고.
직원용 출입구에는 경찰대원 하나가 지키고 서 있었다.
나를 본 대원이 목례를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어디 보자.
처리할 업무가 뭐가 있더라?
일단 오늘치 서류 작업은 다 끝냈고.
남은 게···
-진실의 소리함.
진실의 방이냐?
이거 어떤 놈 작명센스야.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서랍 한구석에 박아두고 있던 열쇠로 소원 수리함을 전부 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없어?
소원 수리함을 모두 열어봤지만, 나온 거라곤 겨우 2개가 전부였다.
뭐 나야 할 일 줄어드니 좋긴 한데···
설마 이거 누가 빼돌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군대처럼 필적 조회해서 누가 쓰는지 찾아낸다거나 말이야.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접힌 종이들을 펼쳤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불철주야 저희를 위해서 힘쓰는 노고를 알기에 이 건의를 쓰는 것이 정말 망설여···.
“뭔 잡설이 이리 길어!”
공치사로만 1쪽을 꽉 채우다니.
정말 대단한 놈이야.
아니.
그리고!
이름은 도대체 왜 쓰는데?
소원 수리함이 뭔지 몰라?
당연히 니들 이름은 빼고 써야지!
이 놈들 군대에서 소원 수리 안 써본 사람처럼 왜 이래?
어?
내가 군대에 있을 땐 심심하면 쓴 게··· 커험.
헛기침을 한 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그제야 본격적인 건의 내용을 볼 수 있었다.
-따뜻한 이불이 지난번에 주어지긴 했지만,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어 날이 더욱 추워졌습니다. 혹시 난방은 불가능할까요? 물론 전기가 끊겼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난방이라.
일단 메모!
나는 다른 종이를 펼쳤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덕분에 목숨을 구한 김○○입니다. 사장님은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장님이 지어주신 쉘터와 일자리가 아니었다면, 저는 진즉에 저 바깥에서 굶어 죽었을지 모릅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읽어가던 내가 한숨을 쉬었다.
다들 레퍼토리가 왜 이렇게 비슷해?
본론부터 말하란 말이다.
본론부터!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혹시 전등 사용은 어려울까요? 물론 곳곳에 횃불을 켜두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횃불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7-8시 이후로는 너무 어두워져서 쉘터 내부에서 생활이 다소 불편합니다. 물론 촛불 따위를 켜두긴 하지만 충분히 밝지 못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곳곳에 촛불을 켜두자니 화재가 발생할까봐 걱정이 됩니다.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이 건의 2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긴 했다.
“전기.”
종말로 인해 끊겨버린 전기를 다시 공급할 수 있게 되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일단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 받을 수 있으면 난방은 물론, 조명 문제까지 모두 처리할 수 있지.
뭐 단순히 그 2가지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전기나 만들어보자.
-신규 사업 계획을 시작합니다.
난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생각해냈다.
-전력 발전.
-사업 계획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예상 소요 비용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계였다.
초기 사업 자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전력 발전 [에너지 산업]
-필요 자본금 [???억 원]
“끄응.”
나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역시 바로 물음표 나와 버리네.
지난번 경매장 사업 처음 시작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 때도 처음에 ???으로 떴었지.
그럼 스케일을 줄이거나 뭔가 제약을 걸어야 한다는 거 같은데.
아니!
제조업은 싸게 해주면서!
왜 꼭 이런 건 비싸게 받아 처먹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이건···
되려나?
-전기 배터리 제조 [에너지 산업]
-필요 자본금 [50억 원]
“돼, 됐다!”
솔직히 50억이나 쓰는 것도 심장이 쿵쾅거리지만···
???보단 50억이 낫지.
그래도 지불할 수 있는 액수잖아?
나는 서둘러 그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공장 설비가 필요합니다.
-공장 건설에 필요한 환경 조건이 존재합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환경 조건?
이런 건 처음인데.
-일정 수준 이상의 유속을 갖춘 천(川) 및 강(江), 바다(海).
천? 강? 바다?
에라이 시벌!
확실한 건 내 공장과 쉘터 쪽에는 그런 지형이 없었다.
뭐 저쪽 산 위로 올라가면 지하수 떠먹는 약수터는 나올 수도 있겠네.
“광운아!”
“부르셨습니까?”
“혹시 이 주변에서 물 좀 흐르는 천이나 강 본 적 있냐? 바다는 당연히 없을 거고.”
“천이랑 강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광운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거기에 천 같은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 어디?”
“푸른집이요. 이태규 씨가 원래 있던 곳.”
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