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알긴 개뿔! >
“회장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응?”
시간을 확인한 내가 화들짝 놀랐다.
오.
뭐야.
벌써 이렇게 됐어?
황급히 몸을 일으킨 내게 광운이가 들고 있던 코트를 입혀줬다.
평상시 입던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
오늘같이 외부 행사가 있을 때 입으라고 이사벨라가 새로 만들어 준 옷이었다.
평소 입던 것보단 좀 고급스러운 디자인.
처음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싶었는데···
막상 입다 보니 자연스레 익숙해진 상태.
사무실 앞쪽에는 차량이 준비되어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니 차량으로 모시겠습니다.”
“오냐.”
나와 경호팀을 태운 스렉스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확실히 걷는 것보다 차가 빠르긴 하단 말이야.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음에도 금방 도착했으니.
차량은 그리디 모터스 공장 앞에 멈췄다.
행사장 앞에 걸린 현수막이 바람에 거칠게 펄럭인다.
-그리디 모터스 X 모던 모터스.
-인수 합병식.
내가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그리디 산업 주요 간부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다소 낯선 얼굴들도 섞여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오늘 모던 모터스를 대표해 참석한 김상진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군.”
가볍게 인사를 한 나는 곧장 마련된 자리로 가 앉았다.
단상 위에 배치된 의자들.
가장 앞쪽에 있는 게 바로 내 자리였다.
내 맞은편, 단상 아래쪽으로는 그리디 모터스 직원들과, 전(前)모던 모터스 출신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솔직히 처음에 인수 제안을 넣었을 땐 큰 기대 없이 한 거였거든.
나나 김 실장이나 비슷한 생각이었다.
모던 모터스라면 옛 세상의 대기업.
대기업 출신이라면 나름 자기들만의 자부심이라는 게 있을 테니.
뭐 단호하게 거부하면 딴말 안 하고 지들 의사를 존중해 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저쪽에서 돌아오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던 모터스 애들과 이야기를 계속해 봤고.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의 인수 합병식.
사실 모던 모터스 경영진이나 오너 쪽과 하는 게 아니라 인수합병이라는 표현이 알맞은 건 아니지만···
뭐 어때.
어쨌든 저 녀석들이 모던 모터스 출신은 맞잖아?
아무튼!
모던 모터스 출신들은 모두 내 쪽, 그리디 모터스로 흡수될 예정이었다.
흡수되는 인적 구성도 꽤 다양했다.
현장 노동자도 있지만, 대표로 나온 저 녀석처럼 설계 엔지니어나 기타 직군도 골고루 있는 편.
내가 흡수한 건 인력만이 아니었다.
저 놈들이 쓰던 공장과 관련 시설, 부지는 내가 적당한 가격에 매입한 상태.
내가 준 매입 비용을 인원수에 맞춰서 나눈다고 했으니 불만은 그다지 없을 거고.
써먹을 수 있는 차량 관련 부품과 도구는 다 본사로 가져왔지만, 땅이나 건물 같은 건 우선 남겨둘 예정이었다.
당장 쓸 곳은 없지만 나중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어찌어찌 써먹긴 하겠지?
“그럼 지금부터 그리디 모터스와 모던 모터스의 인수 합병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모던 모터스에서 참석한 김상진 씨의 축하 말씀이 있겠습니다.”
부드러운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지난번 파티 때 활약했던 연주자들에게 녹음을 의뢰한 음악이었다.
10초 내외의 짧은 배경음악 몇 개와 짧은 걸 조금 더 길게 늘린 몇 분짜리 하나.
내 옆에 앉아있던 상진이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갔다.
“안녕하십니까? 모던 모터스를 대표해 자리에 서게 된 김상진이라고 합니다.”
단상 아래의 직원들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고개를 꾸벅 숙인 녀석이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읽었다.
“우선 저희를 환영해 주신 그리디 모터스 임직원 분들과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새 시대의 국민기업이라 불리는 그리디 산업과 함께 할 기회를 얻어 무척이나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야 했다.
짜샤!
그렇게 아부 떤다고 인사고과에 반영이 될 것 같아?
상진의 그리디 산업 찬양은 그 이후로도 계속됐다.
나도 처음엔 기분 좋게 허허 웃었지만···
야. 이놈아.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
지금 듣고 있는 직원 녀석들 얼굴에서 혼이 빠져나가려고 하는 거 안 보이냐?
그렇다고 열심히 말하고 있는 저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애써 집어삼켰다.
“···아무쪼록 이번 인수 합병을 통해 그리디 모터스가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동차 회사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졸기 직전이었던 직원들이 하품을 하며 박수를 쳤다.
그리디 모터스는 물론, 모던 모터스 출신들조차 다행이라는 표정을 드러낼 정도.
자리로 돌아온 상진이 나를 향해 허리 굽혀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냐. 열심히 하도록!”
-이제 회장님의 축하 말씀이 있겠습니다.
방금까지 상진이 있던 자리에 선 내가 직원 놈들을 슥 훑었다.
박수를 치면서 잠깐 잠에서 깨긴 했지만···
여전히 다들 동태 눈깔이로구만.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졸고 있는 시키들 기상!”
“각자 양옆에 있는 놈들이 졸고 있으면 당장 깨워주도록!”
살짝 멍한 얼굴로 나를 보던 직원 놈들이 피식 웃었다.
어때?
이제 잠 좀 깼지?
확인차 둘러보던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서로 깨워주라고 했음에도 아직도 졸고 있는 놈이 있어?
내가 팔을 들어 직원 한 놈을 콕 찍었다.
“야! 거기!”
지목당한 놈은 정작 지를 부르고 있는 것도 모르고 꿈나라 삼매경에 빠져든 상태.
“다섯 번째 줄 중앙! 머리 짧은 놈!”
어지간하면 적당히 봐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넌 좀 심한 거 같다?
주변에 있던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졸고 있는 녀석에게 쏠렸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녀석을 깨우고 나서야 나는 연설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쯧쯧쯧!
“난 말이다. 니들한테 거창한 비전 같은 걸 말하지는 않으마.”
솔직히 그거 하나 마나 한 이야기 아니냐?
그딴 게 뭐가 그리 중요해?
아.
물론.
목표가 없다는 건 아니고.
내 목표는 간단했다.
1단계.
한국 시장부터 장악한다.
2단계.
세계 시장으로 진출한다.
3단계.
돈을 많이, 매우 많이 번다.
이런 당연하면서도 진부한 이야기를 굳이 저것들한테 늘어놓을 필요는 없잖아?
이런 것보단 저놈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혹은 알고 싶어야 하는 걸 말해줘야지!
“니들이 알아야 할 건 단 하나. 회사가 잘 되고 돈을 많이 번다? 그럼 니들에게도 그에 걸맞는 보상이 지급된다!”
우리 솔직해지자.
까놓고 말해서 니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아무래도 ‘돈’ 아니냐?
내 약속하마.
어떤 일이 있어도 월급과 보너스는 떼어먹지 않는다고!
그러니 니들은 안심하고 일에 집중해!
“내 말 이해했냐?”
“네, 회장님!”
방금의 흐리멍텅한 눈은 사라지고, 눈빛이 되살아난 녀석들이 일제히 화답한다.
그래.
바로 그 눈빛이야.
마음에 들어!
“오케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끝.”
“회장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이다음 순서로는···.”
자리로 돌아가려던 내가 멈칫했다.
여기서 뭘 더 할 필요가 있나?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자자, 그만! 행사 이 정도 했으면 충분히 오래 했다. 여기서 끝내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섯!”
“······.”
“빨리 안 일어나냐?”
그제야 말뜻을 알아먹은 직원 녀석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킨다.
내가 녀석들에게 팔을 크게 휘둘렀다.
“뒤로- 돌아!”
내 지시에 맞춰 몸을 돌린 직원들.
이제 녀석들은 내가 아닌, 그리디 모터스 공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뛰어-갓!”
얼결에 달려간 녀석들은 그대로 모터스 공장에 복귀했다.
공장에 들어간 직원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이쪽을 본다.
“뭐 하고 있냐? 지금 스렉스 주문이 얼마나 밀려 있는지 몰라? 얼렁 각자 라인으로 복귀하란 말이다!”
“아, 네!”
쓸데없는 행사로 시간 끌 필요 있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끼리릭-
잠시 조용하던 공장이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모두 돌아간 것을 확인한 나도 단상에서 내려왔다.
내 눈치를 보던 상진이 꾸벅 인사하더니 서둘러 공장으로 뛰어갔다.
흥.
계속 안 가고 있으면 뭐라 하려고 했는데.
“회장님 차로 모시···.”
“돌아갈 땐 걸어가자. 급한 일 없으니까.”
나는 올 때와는 달리 느긋하게 걸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직은 한가한 오전 시간대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입주민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덕분에 나도 조용함과 한적함을 만끽하며 산책을 즐길 수 있었···
퍼억!
뭐야.
깜짝 놀랐잖아?
나와 부딪친 건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할매였다.
경호팀 애들한테 다가오지 말라고 손짓한 나는 할매를 꼼꼼히 살폈다.
흠.
다행히 어디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할매, 괜찮으셔? 어디 아픈 곳 있으신가?”
“저기 젊은 양반, 길 좀 물어볼게.”
“응? 길?”
내 말을 못 들은 척 갑자기 딴소리를 했지만, 나는 그러려니 했다.
“어디 가고 계셨는데?”
“강남 타워 가려면 어떻게 가야 돼? 분명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길을 못 찾겠단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강남 타워?
“강남 타워를 가신다고?”
“강남 타워 몰라?”
아니.
그게 뭔지는 잘 알지.
본래 서울의 대표적인 초고층 건물은 63빌딩.
하지만 새롭게 지어진 강남 타워가 그 명성을 뺏었다.
강남 타워 저층은 쇼핑몰.
고층은 호텔 겸 레지던스.
꼭대기 층 일대는 강남 타워를 건설한 회사의 사무실과 관람대로 꾸며져 있었다.
강남 타워는 강남구 삼성동에 세워져 있는 건물.
왜 여기서 강남 타워를 찾고 있어?
“거긴 왜 가시는데?”
“볼 사람이 있어서 가려고.”
“볼 사람 누구?”
할매의 얼굴이 순간 찌푸려졌다.
“그, 그게··· 누구였더라.”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할매···
뭔가 좀 이상한데.
말하는 것도 좀 어눌한 것 같고, 손도 예전 순범이처럼 계속 떨고 있단 말이야.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엄마!”
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작업복을 입은 젊은 직원 한 놈이 이쪽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처음엔 할매만을 보던 놈이 뒤늦게 날 발견하곤 서둘러 허리를 숙인다.
나는 녀석이 목에 걸고 있던 신분증을 슥 훑었다.
임··· 현욱?
그리디 토바코 소속.
주간이 아니라 야간 근무자네?
“회, 회장님. 안녕하세요!”
“니 어머님이시냐?”
“네! 갑자기 안 보이셔서 찾으러 나왔습니다.”
나는 녀석을 위해 뒤로 살짝 물러섰다.
“어여 모셔라.”
“감사합니다.”
직원 녀석이 할매를 향해 다가갔다.
“엄마, 저에요. 현욱이.”
“으, 으응? 현욱이?”
“저 기억 안 나요? 엄마 아들인데.”
“내··· 아들?”
멍하니 직원을 쳐다보던 할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한테 아들이 있었나?”
“···이거 한번 보실래요?”
한숨을 쉰 녀석이 꺼낸 건 사진이었다.
좀 더 젊은 시절의 직원과 할매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이거 보이시죠? 여기가 엄마,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게 바로 저에요.”
“내 아들···.”
“엄마도 참. 저랑 함께 있자고 하시고선 혼자 밖으로 나가시면 어떻게 해요? 깜짝 놀랐잖아요. 자, 어서 저랑 집에 가요.”
조용하던 할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시, 싫어! 싫단 말이야! 은임이는 집에 가기 싫어!”
“어, 엄마!”
“은임이는 밖에서 놀고 싶어요! 집에 들어가기 싫어!”
한참을 쩔쩔매던 직원은 겨우겨우 할매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집에 가면 맛있는 거 먹어요. 알겠죠?”
“알았어요···.”
직원이 나를 향해 재차 허리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회장님. 어머니가 갑자기 치매가 심해지셔서···.”
“실례는 무슨. 어머니나 잘 모셔라.”
할매와 함께 쉘터로 돌아가는 직원.
나는 두 사람이 멀어지는 걸 한참이나 지켜봤다.
에잉.
“순범아.”
“네, 회장님.”
“정훈한국병원에 연락해서 병원장 스킬로 치매도 치료할 수 있는지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만약 치료 가능하다고 하면 진료 예약을 잡아둘까요?”
“예약 잡고 그리디 토바코 임현욱한테 알려주고. 시간 맞으면 니가 같이 갔다 오도록.”
“지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내가 녀석이 들고 있던 업무용 태블릿을 뺏었다.
“가 봐.”
최 비서가 서둘러 병원으로 간 뒤에도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하아.
어떻게 하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한 끝에 나는 겨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노인 요양원, 만들어야겠어.”
곁에 있던 광운이가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다.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보고 못 넘기시는군요.”
“또 뭔 헛소리야?”
내가 녀석을 노려봤지만, 광운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가 아냐!”
“하핫.”
나는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요양원을 짓기로 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불쌍해서 그런 게 아니야! 이게 다 내 직원 놈들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거든? 아니, 생각을 해봐라. 야간에 일했으면 낮에는 푹 쉬어야 하잖아? 그런데 방금처럼 치매 걸린 어머니 돌본다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더구만. 그럼 그놈이 있다가 밤에 제대로 일을 하겠어? 하더라도 반쯤 정신 놓은 상태서 하겠지! 피곤한 상태서 일했다가 불량품 나오면? 생산 물량도 줄어들 게 분명하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으셔도 다 압니다.”
이 쌍노무 시키가?
알긴 뭘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