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됐다. 치아라.
“마, 망할 새끼들···.”
촤악!
“컥.”
비명을 지른 생존자가 목에서 피를 내뿜으며 널브러졌다.
칼을 흔들어 핏물을 털어낸 괴물이 주변을 살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히 서 있던 생존자들은 모두 처참한 몰골로 바닥을 나뒹구는 중.
바닥에 쓰러진 생존자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괴물이 눈을 번뜩였다.
“잔머리를 굴리는 놈이 있었군.”
피잉!
팔찌에서 쏘아져 나간 짧은 화살이 누군가의 등을 꿰뚫었다.
“억!”
엎드린 채 죽은 척을 하고 있던 생존자가 몸을 부르르 떨다 축 늘어졌다.
확인 사살을 끝마친 괴물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 멀었나?”
“다 끝났네.”
새로 모습을 드러낸 괴물이 들고 있던 시체를 바닥에 내던졌다.
다른 생존자들과는 달리 고문의 흔적이 짙게 남은 채.
“알아낸 건?”
“일단 이 근방에서 카르후가 보인 건 맞다. 그놈 때문에 인간들이 대외 활동을 잠시 멈췄을 정도라고 하니까.”
“그래? 첩보가 정확했다는 이야기잖아?”
서로를 본 괴물들이 피식 웃었다.
“별일이 다 있지?”
“그러니까 말이야. 뒷걸음질 치다 오우크를 잡은 꼴이로군. 그래서 그놈이 어디로 갔는지도 알아냈나?”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입맛을 다신 괴물이 시체를 걷어찼다.
퍽.
“안타깝게도 그것까진 모르는 것 같더라고.”
“쯧, 쓸모없는 놈들.”
“인간들이 다 그렇지 뭐.”
혀를 찬 괴물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동료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걸 받은 동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또 뭐야?”
“인간들이 서로 연락할 때 쓰던데? 이 동네의 통신 아티팩트로 보인다.”
“잠시만.”
건네받은 괴물이 마나 무전기를 꼼꼼히 살폈다.
손으로 무전기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물론, 일순 눈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기까지.
“통신 아티팩트가 맞군.”
“그래?”
“상인 놈들이 파는 것과 대충 비슷해. 마나를 이용한다는 원리는 같은데 세부적인 게 조금 다른 거 같지만. 마법진을 쓰지 않고 이상한 물건을 썼어.”
“마법진을 안 썼다고? 마법진을 안 썼는데 어떻게 아티팩트를 만든 거지?”
“잘 보게.”
괴물이 거침없이 손에 힘을 줬다.
파칵!
상당한 내구도를 자랑하는 마나 무전기였지만, 괴물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정확히 두 동강 났다.
박살 난 무전기 속에서 뭔가를 휙 집어 드는 괴물.
괴물의 손에는 작은 칩이 들려 있었다.
-그리디 디펜스.
-무전기 신호제어 칩.
-제조번호 29182.
“확실하진 않지만 이게 마법진의 역할을 대신했을 가능성이 높아. 아마 인간들의 방식인 것 같은데.”
다른 괴물이 미간을 찌푸렸다.
“꽤나 정밀한 물체 같은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패턴으로 금속 물질이 박혀 있군.”
“흐음.”
박살 난 무전기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괴물이 그 잔해를 주섬주섬 주워 담았다.
“어쩌려고?”
“일단 챙겨서 가보자고. 혹시 아나? 그 상인 놈들이 비싸게 쳐줄지.”
“델몬트 상인들이? 난 그놈들이 뭘 비싸게 매입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어찌 되었든 나쁜 일은 아니지 않나. 어차피 우린 카르후를 잡을 때까진 이곳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 처지. 짜잘한 물건들이라도 모으면 다 돈이라고.”
“뭐··· 그건 마음대로 해. 다만 카르후를 잡는 게 우리 임무라는 건 잊지 말고.”
“당연한 소리를.”
괴물은 투덜거리면서도 동료가 무전기 잔해를 모두 담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기다려줘서 고맙네. 대신 오늘과 내일 탐색은 내가 맡지.”
“정말이지? 나중에 무르기 없어!”
반색한 괴물이 허리에 차고 있던 짧은 막대기를 건넸다.
“빈말로나마 겸양을 떨 생각은 없나 보군.”
“자네도 알 텐데. 이 망할 탐지기가 미친 듯이 체내의 마나를 빨아먹는 걸.”
한숨을 쉬며 막대기를 받은 동료가 체내의 마나를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츠츠츳!
마나가 주입된 탐지기가 은은한 빛에 휘감겼다.
끝에 달려있던 얇은 끈이 빳빳해지며 두 괴물의 머리 위를 느릿하게 회전한다.
둥근 원을 그리며 끝없이 회전하는 끈.
“고생하는 자네한테 할 말은 아닌데.”
“아닌데?”
“이 탐지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건지 슬슬 의심이 되는군. 핏방울 하나만 있으면 찾을 수 있다더니··· 정작 여기 와선 인간들을 족쳐 얻어낸 정보가 더 많잖아.”
“그 부분은··· 인정하지.”
표정이 구겨지는 동료를 보며 피식 웃은 괴물이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어디 인간들 더 안 나오나? 이 망할 탐지기만 믿고 가는 것보단 차라리 인간들이 더 낫겠어.”
“인간 이야기를 해서 말인데.”
“응?”
탐지기를 잡고 있던 괴물이 저 앞쪽을 가리켰다.
“저 앞에 또 다른 인간들이 있는 것 같군.”
“그래?”
지루함에 몸서리치던 괴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자넨 천천히 오라고! 내가 먼저 가서 정리하고 심문도 하고 있을 테니!”
괴물이 힘껏 바닥을 밀었다.
콰직.
움푹 들어가는 바닥.
괴물의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저 멀리 있던 인간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저마다 무기를 든 생존자들은 아직도 괴물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한 상황.
괴물이 그대로 칼을 뽑아 비스듬히 휘둘렀다.
서걱!
잘려나가는 몸통과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핏물.
그제야 괴물의 존재를 알아차린 생존자들이 서둘러 대응에 나선다.
“괴물이다!”
생존자들 역시 전투 경험이 있는지 괴물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쏴!”
연사석궁들이 일제히 화살을 토해냈다.
피피핑!
“또 이거냐!”
사방에서 화살이 쏟아졌지만 괴물은 코웃음을 쳤다.
이전에 상대했던 인간들 역시 비슷한 전법을 썼기 때문.
겨우 이 정도 공격으로는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능숙하게 화살을 튕겨내고 피해낸 괴물은 금방 공격 목표를 결정했다.
‘저놈이군!’
괴물이 첫 번째 제물로 삼은 것은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
덩치도 제일 왜소했고, 눈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훌쩍 뛰어오른 그가 생존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이놈을 잡고 곧장 그 옆에 있는 놈을 무력화해서 합격진을 파훼한···.’
카앙!
괴물의 눈이 가늘어졌다.
“막아?”
단칼에 베어버리려 생각했던 인간이 힘겹게나마 그의 칼을 막아내고 있었다.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
생존자들은 괴물이 멈춰선 그 순간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찔러!”
“쑤셔라!”
뒤통수를 향해 날아드는 각종 무기들.
‘하.’
사나운 미소를 지은 괴물이 마주 상대하고 있던 생존자를 발로 뻥 찼다.
생존자가 팔로 몸을 감쌌지만, 날아가는 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법.
자유로워진 괴물이 귀신처럼 몸을 돌려 칼을 휘두른다.
촤악!
약간의 저항감이 있긴 했지만, 괴물로서는 있는 힘을 아끼지 않고 휘두른 공격.
달려들던 생존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하지만 괴물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본래 계획은 몸을 아예 동강 내버릴 생각이었지만, 칼이 중간쯤에서 걸려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잠시 멈칫했던 생존자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결국 괴물은 칼에서 손을 놓아야만 했다.
“지금이다!”
“놈이 무기를 버렸다!”
“멍청하긴.”
괴물이 양팔을 들어 올렸다.
손목에 채워져 있던 팔찌가 미미하게 진동했다.
핑! 피잉!
연사석궁만큼의 압도적인 속사는 아니었지만, 꽤나 빠른 속도로 발사된 화살이 생존자들을 노렸다.
“헙!”
티-잉.
그걸 가까스로 막아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엎어지는 생존자들도 있었다.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든 숫자.
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생존자들은 어느새 자기들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죽은 인간에게 박혀 있던 칼을 뽑아낸 괴물이 섬뜩하게 웃었다.
“인간 주제에 나를 엿 먹여?”
“우, 우리가 언제···.”
물론 괴물은 그걸 일일이 설명해줄 정도로 배려심 넘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스스슷.
칼을 휘감는 푸르스름한 빛무리.
마나를 이용해 칼의 절삭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린 괴물이 본격적인 인간 사냥에 나섰다.
인간들 역시 황급히 무기를 들어 올렸으나, 상황은 방금과 너무 달랐다.
서걱!
언제 막아냈냐는 듯 숭텅숭텅 잘려나가는 몸과 무기.
이에 겁을 집어먹은 생존자들은 마주 싸우기를 포기하고 도망을 선택했다.
“으, 으아악!”
“도망쳐!”
하지만 그마저도 성공한 이는 없었다.
인간들이 도망치던 방향에서 탐지기를 든 괴물 동료가 접근하고 있었으니까.
촤악!
“허억.”
“끄아악.”
한 손에는 탐지기를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생존자를 토막 내버린 괴물 동료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인간들이 도망칠 기회를 준 거야?”
“···그럴 일이 있었다.”
“흠, 자네 벌써 피곤해진 건가?”
“그게 무슨! 이놈들은 좀 달랐단 말이야! 이상하게 앞전 놈들보다 좀 힘이 센 것 같았다고.”
“인간이 힘이 세봤자 그게 그거지.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라니까?”
화가 잔뜩 난 괴물이 어디론가 향했다.
“이리 나와!”
“제, 제발! 살려주세요!”
괴물이 끌고 온 건 처음에 공격했던 왜소한 체격의 인간.
자기 무리가 모두 죽은 걸 목격한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이 인간은 뭔데?”
“넌 이놈이 내 공격을 2번이나 막았다고 하면 믿겠어?”
괴물 동료의 눈이 커졌다.
“···2번이나?”
“너도 믿기지 않지? 나는 오죽하겠나!”
“아니, 어떻게?”
그들이 괜히 인간을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어지간한 인간들은 그들에게 상처도 입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평범한 칼질 한 번조차 막아내지 못하는 인간들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기사’들이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편.
하지만 이곳에는 ‘기사’와 같은 존재들이 없었다.
무기가 제법 깜찍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
당장 조금 전에 만났던 인간들만 해도 칼질을 버틴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딱 봐도 기사나 종자도 아닌 것 같은데.”
겁에 질린 마지막 생존자를 살피던 괴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뭐지?”
“뭘 말하는 건가?”
“이거.”
이제 자세히 살펴보니 생존자는 이상한 지지대? 뼈대 같은 것을 착용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른 생존자들을 보니 그들 역시 이 괴상한 물건을 착용한 상태.
괴물이 생존자의 멱살을 잡았다.
“너와 니 동족들이 차고 있던 이거, 뭐 하는 물건이지?”
“제발··· 제발 살려만 주시면 시키는 건 다 하겠습니다!”
“쯧.”
괴물이 생존자의 뺨을 후려쳤다.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빨을 토해내는 남자.
“말해! 이게 뭐 하는 물건이냐고!”
“그, 그리디 산업에서 판매하고 있는 강화 외골격입니다!”
“강화··· 외골격?”
통역 장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괴물과 동료에겐 꽤나 낯선 단어였다.
“이 물건이 하는 일은?”
“히, 힘을 더 강하게 해주고··· 허, 허리와 목 같은 곳이 다치지 않게 해줍니다! 판매하는 곳에서 작업할 때 쓰라고 만든 건데, 사람들은 전부 전투용으로 씁니다!”
“하?”
괴물이 재차 외골격을 봤지만, 딱히 마나의 흐름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이런 뼈다귀 같은 게 근력을 강화한다고?’
그들이 알고 있던 상식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괴물이 외골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생존자 역시 단순한 사용자일 뿐.
제품의 구동원리나 그런 거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했다.
괴물은 자기가 새삼스레 다른 세상에 와 있음을 자각했다.
“일단 카르후에 대해 물어보는 게 어때?”
“그렇게 하지.”
고개를 끄덕인 괴물이 미리 준비해 온 카르후의 몽타주를 생존자에게 보여줬다.
“이놈을 본 적 있나? 이름은 카르후. 약 한 달 전쯤 이 근처를 지나갔다고 하던데.”
“아, 압니다!”
아무 기대 없이 물었던 괴물과 동료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놈 지금 어디 있지? 빨리 말해!”
“그, 그리디 산업 쪽으로 갔습니다! 이 근방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인간이 누구냐고 물으면서요. 저, 저쪽입니다! 저쪽으로 쭈욱 가시면 나와요!”
“호오, 그렇단 말이지.”
시선이 마주친 두 괴물이 동시에 웃었다.
“찾았군.”
콰득!
목이 돌아간 생존자가 힘없이 널브러졌다.
“후딱 처리하고 가자고.”
괴물들은 생존자가 알려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높게 솟은 건물들.
“저긴가 보군.”
곧장 돌파하려던 괴물들은 결국 몰래 잠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디 산업이라는 곳이 생각보다 그 규모가 컸고, 전투병 숫자도 상당히 많아 보였기 때문.
두 괴물은 스스로의 무력에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무의미한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저곳이 적당해 보이는군. 마나 흐름은 없지?”
“마법의 흔적은 없어. 깨끗해.”
“좋았어.”
괴물들은 어렵지 않게 경계선을 넘어 본사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본사 주변에도 마찬가지로 경비 태세가 펼쳐져 있었지만, 둘은 시간을 좀 들여 통과할 수 있었다.
‘인간치곤 제법이야. 우릴 1시간 동안 묶어두다니.’
기어코 본사 잠입에 성공한 둘은 카르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을 찾아 나섰다.
“내 생각 들어볼래?”
“그러지.”
“규모가 꽤 커서 일일이 찾는 건 좀 비효율적일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 적당히 지위가 높아 보이는 놈을 하나 납치해서 물어보자고.”
“나쁘지 않군.”
마침 적당해 보이는 먹잇감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저놈 어때?”
“누구?”
“머리 까지고 배 나온 놈. 저놈한테 다들 굽신거리는데?”
주변에 있는 이들이 모두 근육질에 단련된 체형이었기에 알아보기는 쉬웠다.
‘머리 까지고 배 나온 놈’을 확인한 동료가 피식 웃었다.
“적당해 보이는군. 강단도 없어 보이고. 목에 칼을 들이대면 다 불어버릴 놈이야.”
둘은 최대한 조용히 ‘머리 까지고 배 나온 놈’을 뒤쫓았다.
때마침 그자 역시 인기척이 드문 곳으로 향하고 있는 중.
주변에 다른 인간들이 없음을 확인한 둘이 재빨리 ‘머리 까지고 배 나온 놈’을 덮쳤다.
“쉿-”
“협조하면 목숨만은 살려줄 수도 있다.”
그들의 예상대로 납치된 놈은 덜덜 떨며 협조를 약속했다.
“무, 무엇을 원하십니까?”
“카르후라는 놈을 아나? 이곳으로 향했다고 하던데.”
‘머리 까지고 배 나온 놈’의 목소리가 달라진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 난 또 뭔가 했는데 칼을 찾아온 거였어?”
“뭐?”
“됐다. 치아라.”
퍽!
둔중한 충격과 함께 두 괴물이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