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넣으라면 그냥 넣어!
퍼억!
나를 협박하던 괴물 놈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괜찮으십니까?”
“이것들 좀 치워봐라. 무거워 죽겠다.”
괴물들을 제압한 명수와 광운이 황급히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어디 면상이나 한번 볼까?
괴물들의 생김새는 칼과는 꽤 달랐다.
칼이 ‘인간형’이었다면···
이놈들은 그 경계에 있다고 해야 하나?
엉덩이 쪽에 꼬리가 달려 있었고, 신체 부위도 참으로 오묘한 게 많았다.
“얘네가 전부지?”
“네, 동작 감지기가 울린 후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다른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들이 몰래 경계선을 돌파했다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계속 명수와 광운이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명수와 광운이가 바로 뒤에서 쫓아다니는데도 못 알아차리는 걸 보면 실력도 썩 대단하지는 않은 거 같고.
“끌고 가라.”
“회장님은 안 가십니까?”
“나 옷 좀 갈아입고 가게. 이 시키들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녔길래 옷에서 썩은 내가 나는 거야?”
“먼저 가서 준비해 두겠습니다.”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경비대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괴물 놈들을 끌고 사라졌다.
에잉.
하여튼 망할 시키들.
납치를 하고 뭘 하려면 좀 빨리 할 것이지.
덕분에 또 심야 근무하게 생겼잖아?
나는 잠깐 컨테이너 숙소에 들려 옷을 갈아입었다.
바깥에 다시 나오니 최 비서가 텀블러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회장님, 믹스 커피입니다.”
“줘 봐.”
나는 거침없이 텀블러에 있던 커피를 전부 비웠다.
찐한 커피가 들어가면서 살짝 졸리던 정신이 또렷해진다.
난 빈 텀블러를 다시 최 비서에게 돌려줬다.
“넌 이거 갖다 두고 퇴근해.”
“네? 하지만 회장님이 아직 일을 하시는데···.”
“아, 난 됐으니까 넌 얼렁 들어가라고!”
내가 꼭 모양 빠지게 야근 수당 주기 싫어서 보내는 거라고 이야기해야겠냐?
주저하던 최 비서가 고개를 숙인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냐!”
아 거참.
직원 하나 퇴근시키는 게 이리 어려울 줄이야.
나는 경호팀을 이끌고 경비대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등짝!
등짝을 보자!
***
“하아아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내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회장님, 칼을 불러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아침부터 호출당한 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왜 불렀··· 습니까?”
“왜? 내가 너 때문에 밤을 샜는데?”
“그건 또 무슨 헛··· 아니, 이야기십니까?”
이 시키?
너 분명 방금 헛소리라 하려고 했지!
순간 분노한 내가 벌떡 일어나 녀석의 팔뚝을 후려쳤다.
“윽! 악! 억!”
“이 망할 놈의 시키. 너 잡으러 왔다는 괴물 때문에 내가 밤을 샜는데! 뭐? 헛소리? 왜? 뭔 주둥이가 그리 길어!”
비명을 지르며 맞기만 하던 칼이 멈칫했다.
“나··· 아니, 저를 잡으러 와요?”
“그래! 너 잡으러 웬 놈들이 짝지어 여기 쳐들어왔잖아!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돌아다녔던 거야!”
물론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다 알고 있었다.
칼 이놈에게 대충 듣기도 했고, 잡은 괴물들에게서 실망봉을 통해 알아내기도 했으니.
칼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놈들을 찾아다녔고, 그 소문을 들은 괴물 쪽에서 녀석을 제압할 놈들을 보낸 상황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쪼금 약하긴 하던데···.
암튼.
“광운아.”
“네, 회장님.”
광운이가 들고 있던 작은 보관함을 칼 앞에 내려두었다.
쿵!
“이건··· 뭡니까?”
“넌 눈이 없냐?”
괜히 한 마디 얻어먹은 칼이 투덜거리며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휘둥그레지는 눈.
보관함에는 칼이 들고 다니던 예전 장비들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 무식한 도끼와 기타 소지품 전부가.
“이, 이건 왜 주시는 겁니까?”
“니가 해결해.”
“···네?”
아이.
이 시키 진짜 말 여러 번 하게 만드네.
“니가 해결하라고! 그놈들한테 복수해야 한다면서! 그놈들도 지들이 보낸 히트맨 연락 끊긴 거 알면 또 보낼 거 아냐! 그럴 바에야 먼저 그쪽을 치는 게 낫지!”
“······.”
“니가 싼 똥은 니가 치우란 말이다!”
잠시 멍하게 있던 칼이 돌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하긴 개뿔! 니가 싼 똥 너보고 치우라는데 뭐가 감사하고 지랄이야?”
“그래도 감사합니다.”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던 칼이 멈칫했다.
그가 쓰던 장비 밑에는 커다란 배낭 하나가 추가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 가방 안에 식량이랑 괴물 놈들 근거지 위치 넣어놨어. 가면서 봐.”
“···알겠습니다.”
뭐냐.
너 설마 우는 거 아니지?
아 제발.
질질 짜지 좀 마라.
놈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다 끝내고 돌아오면··· 그땐 평생 회장님을 모시겠··· 습니다.”
“얼씨구. 너 지금 뭐 착각하는 거 같은데. 넌 이미 나한테 평생 묶인 몸이에요!”
“하하.”
씨익 웃은 칼이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녀석에게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진심을 다한 인사.
한동안 허리를 숙인 채 있던 칼이 사무실을 나섰다.
내가 광운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준비됐지?”
“네, 눈치채지 못하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쫓을 겁니다. 지시도 이미 내려두었습니다. 가급적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되, 유사시엔 지원하라고요.”
“그래.”
나는 창문 밖으로 멀어지는 칼의 모습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진 않아도 교관으로 써먹어야 하는 놈이잖아? 어쩔 수 없어. 도망가지 못하게 경비대 애들도 붙였으니 괜찮을 거야.”
***
타타탁!
다급한 발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헉, 허억.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회장님.”
“말도 없이 온 건 난데 니가 왜 죄송해?”
“그, 그래도···.”
나는 숨을 몰아쉬는 엔터테인먼트 사장을 보며 혀를 찼다.
숨넘어가겠다.
이놈아.
“앉아서 숨 좀 돌려.”
“가, 감사합니다.”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자기 자리에 앉는 사장.
나는 녀석이 충분히 호흡을 안정시킬 수 있게 기다려 주었다.
“영화관 운영은 좀 어때?”
“생각보다 많은 주민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아포칼립스 이전의 한국만 해도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횟수는 상당한 편이었다.
시장 자체는 인구 때문에 엄청 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영화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 수익 자체는 다른 곳에 비해서도 상당한 수준.
세상이 망하고 나서도 그 열기는 식지 않았다.
영화관이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 이후, 거의 모든 주민들이 최소 한 번은 영화관에 들를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또 영화관에 와서 영화만 보는 경우는 드물잖아?
자연스레 팝콘과 콜라, 나쵸 따위를 사 먹기 마련.
당연히 티켓 판매 수익과 간식 판매 수익은 꾸준히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오기 전에 매출 자료를 봤는데 예상을 웃도는 수익을 내고 있더라고?
나야 뭐.
흡족할 수밖에 없지!
“니 공이 커. 아주 잘 해주고 있어.”
“감사합니다.”
사실 김 실장이 지금 사장을 앉힐 때만 해도 걱정했던 게 사실이었다.
지금 사장은 영화관이나 멀리 플렉스 사업 경험이 없었거든.
물론 이쪽 경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불안감은 있었다.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장 녀석은 결과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버렸고.
나중에 다른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도 잘 해주기 바란다.
요 녀석아.
마음 같아선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지만···.
나는 애써 꿈틀거리는 손을 억눌렀다.
함부로 칭찬해 주면 안 돼.
괜히 칭찬 일찍 해줬다가 거만해지는 경우가 상당히 있더라고.
될성부른 나무를 떡잎 단계부터 망칠 수는 없지.
앞으로 열심히 하도록!
내 항시 너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잖아?”
“아, 네. 제가 김 실장한테 듣기로는 크리스마스와 이브, 그리고 그 다음 토요일, 일요일을 쉰다더군요.”
하긴 너도 사장단이니 들었겠구나?
“4일 동안 영화관을 무료로 개방할 예정이다.”
“4, 4일 동안이나요?”
엔터테인먼트 사장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회장님, 4일 동안 무료로 영화관을 개방하시면··· 영화관 수익에는 큰 지장이 있을 겁니다.”
“내가 그걸 모르겠냐?”
그 누구보다 아까운 사람은 바로 나야!
나!
이게 다 내 돈으로 만들어진 건데.
마음 같아선 꺼이꺼이 울고 싶었지만, 그놈의 체면이 뭐라고···.
끄응!
“아깝지만 어쩔 수 없어. 직원 놈들과 입주민 녀석들의 피폐한 마음을 관리해야 하니까!”
“······.”
신체 건강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정신 건강.
아무리 몸이 멀쩡하더라도 마음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골병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진짜 오늘만 보고 사는 놈이라면 정신 건강이고 나발이고 싸그리 긁어모았겠지.
마음의 병에 걸리든 말든 내가 신경 쓸 게 뭐야?
하지만 난 절대 무너지지 않을 백년, 아니. 천년 기업을 만드는 게 목표라는 말씀.
애초에 멍청이들과는 꿈 자체가 다른 만큼 모래 위에 성을 지을 수는 없었다.
번거로워도 정도를 걸을 수밖에!
“아무튼 무료로 개방하는 동안 틀 영화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떤 영화가 좋을지 모르겠단 말이야?”
“아.”
“니 생각은 어때?”
잠시 고민하던 엔터테인먼트 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는 컴퓨터를 켰다.
“현재 확보되어 있는 영화 목록이 저한테 있습니다. 그걸 같이 보시면서 이야기하시죠.”
“오냐.”
나와 엔터테인먼트 사장이 화면에 표시된 목록을 쭉 살폈다.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꽤 많은 영화들이 있었다.
장르나 종류도 다양했다.
국내외 여부도 가리지 않았고,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B급이나 C급 영화 등도 포함된 채.
흐음.
이거 너무 많아서 선택이 어려울 지경인데?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엔터테인먼트 사장이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다.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새삼··· 많군요.”
“잘 골라보자고!”
나는 우선 최소한의 기준을 정했다.
“일단, C급이나 유사 영화는 제외.”
대부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영화 위주였지만, 그중에는 영화라고 하기 어려운 C급 혹은 그 이하 수준의 영화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것들을 가장 먼저 빼버렸다.
좋은 것만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그딴 걸 보여줘서 되겠어?
“회장님 말씀하신 것들은 일단 제외했습니다.”
“장르별로 영화를 따로 분류해 봐. 코미디, 로맨스, 액션, 공포 영화 등등.”
입주민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 취향도 다양하기 마련.
최대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섞어두면 100%는 아닐지라도 절반 이상은 만족시킬 수 있을 터였다.
“최신 영화를 넣되, 옛날 영화라고 무조건 빼버리진 말고.”
요즘 나온 영화들이 CG 같은 측면에선 훨씬 뛰어나지만, 옛날 영화들 중에서도 좋은 것들은 많았다.
“알겠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사장은 신중한 얼굴로 영화 목록을 추려냈다.
그러기를 한참.
“여기 있습니다. 회장님.”
“어디 보자···.”
-렁샷.
-펄프펙션.
-호러하우스.
-정직한 정치인.
-겨울제국.
-······.
나쁘지 않구만.
어느 한쪽 장르에 편중된 것도 없고.
아니.
그런데 말이야.
“뭐야. 왜 그게 없어?”
“네? 어떤 영화를 말씀하시는 건지.”
“그거 있잖아! ‘나홀로 집에’!”
명절특선영화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영화잖아.
그게 왜 없는 거야?
단골손님이 빠지면 섭하지!
“저··· 회장님?”
“왜!”
“요즘은 ‘나홀로 집에’ 대신 ‘해리포터’가 들어가는 추세입니다. 아무래도 ‘나홀로 집에’가 오래전 영화이다 보니···.”
너 이놈.
지금 나 노땅 취급하냐?
내 표정을 본 엔터테인먼트 사장이 다급히 손을 내젓는다.
“그, 그게 아니라···.”
“잔말 말고 넣어! ‘나홀로 집에’ 1부터 3까지!”
“그거 4편과 5편도 있지 않습니까?”
“난 3편까지만 인정해. 4편과 5편은 영··· 아무튼! ‘나홀로 집에’ 3편까지 넣고! ‘해리포터’ 시리즈도 빼먹지 않도록!”
“아, 알겠습니다.”
내가 있는 한 ‘나홀로 집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