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화 (프롤로그) (1/125)

#1

프롤로그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오늘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뭔가요?”라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벨로크 대공을 도와준 것이라고!

나는 냉기를 풀풀 풍기는 남자를 보며 꼴깍 침을 삼켰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외양이 매력적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저 공포일 뿐이었다.

아무렴 그를 둘러싼 소문과 내 눈앞에서 벌어졌던 학살을 떠올리면 당연할 테지만.

‘역시 대공을 돕는 게 아니었는데.’

사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지나쳤다면 대공이 다시 날 찾을 일은 없었을 터다.

‘날 죽이려는 거겠지?’

내 과한 망상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엔 이미 본 것도, 들은 것도 많은 참이었다.

게다가 그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날 찾을 이유도 없었겠지.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 댄다. 본능에 사로잡힌 뇌가 입을 움직였다. 지금이 빌어야 할 때라고.

“살…….”

“네 덕에 목숨을 구했으니 보상을 해야겠지.”

으, 응?

생각지 못한 서두에 당황한 나는 그대로 굳었다.

보상을 해 주겠다고?

잇따라 들려온 말은 더욱 상상 이상이었다.

“내가 네 아빠가 되면 되겠군.”

방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니지, 이건 내 귀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이 남자가 내 아빠가 되어 주겠다고 말할 리 없…….

“오늘부터 우린 가족이다.”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공이 한 번 더 명확하게 덧붙였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와 가족이 되어 주겠다는 말은 고아인 내게 정말 고마운 말이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서만큼은 들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을뿐더러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벨로크 대공이었으니까!

거슬리는 건 다 죽이기로 유명한 미친 살인귀이자, 미래에 반역을 일으키는 악당 말이다!

1. 다시 한번

나는 태어날 적부터 소위 말하는 ‘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총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내가 고아라는 점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건 정말 극소수니까.

하지만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비교적 흔한 만큼 나는 그 범위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퍽 억울했다.

두 번째는 많고 많은 보육 기관 중에 하필 이곳, 브리엔츠 보육원에 맡겨졌다는 것이었다.

제국에서 보육 기관은 황실과 몇몇 귀족 가문의 후원으로 운영됐다.

브리엔츠 보육원도 마찬가지였다. 황실과 셰인트 백작가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다른 곳과 차이가 있다면 브리엔츠 보육원의 원장은 욕심이 많고, 제 배를 불리는 데만 눈이 벌게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셰인트 백작가에서 손대던 불법이자 비윤리적인 행위에 협조했다.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꽤 이후의 일이었지만.

어쨌든, 선천적으로 귀가 안 들렸던 나는 원장의 눈에 들었다.

듣지 못하니 어떤 일을 시켜도 될 거란 이유에서였다.

어떻게 보면 다행인 일이긴 했다. 일찍이 다른 곳으로 넘겨져 생사를 알 수 없는 아이들과 달리 나는 그래도 멀쩡히 살아 있었으니까.

동시에 불행이기도 했다. 셈을 잘 못하고, 글자를 잘 외우지 못한다는 이유로 매일 구박당한 것은 물론…….

“예쁜 아이구나.”

우연히, 보육원을 찾은 말롱 자작 부인의 눈에 들어 버렸으니까.

그녀는 브리엔츠 보육원을 후원하는 셰인트 백작의 고명딸이자 말롱 자작의 부인이었다.

부친이 후원하는 보육원을 들렀다 날 발견한 그녀는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그래, 이름이 ‘애니’라고? 귀머거리라 내 말도 못 알아듣고?”

말롱 자작 부인이 모르는 게 있다면 나는 타인의 입 모양을 잘 읽는다는 거였다.

당연히 저 말도 입 모양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속에 얽힌 저의만큼은 읽을 수 없었지만…….

“마침 입이 무거운 하녀가 필요했는데 이 애가 제격인 것 같네. 귀머거리니 말을 옮기지도 못할 테고, 듣지도 못하겠지.”

좋은 뜻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날 보며 웃는 말롱 부인의 인상 역시 썩 착해 보이진 않았고.

“생긴 것도 귀여우니 내 체면 살리기도 좋겠지.”

“부인, 죄송하지만 다른 아이를 골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아이는 제가 이중장부를 쓰기 위해 열심히 교육하고 있는…….”

“우리 아버지가 매달 마담에게 후원하는 금액이 얼마더라?”

“그, 그건!”

“내 남편과 우리 아버지 덕분에 성사시킨 거래가 꽤 많을 텐데 아이 하나 양보할 수 없다고?”

“그럴 리가요, 호호. 마음에 드시면 데려가셔야죠.”

하지만 말롱 부인을 따라가고 싶었던 이유가 딱 하나 있었다.

늘 무섭던 원장이 말롱 부인에게는 꼼짝 못 한다는 것.

내게 그런 그녀의 모습은 구원자처럼 보였다.

‘저 사람을 따라가면 좀 더 편해질 거야.’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던 나는 말롱 부인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왕 가는 것, 이 보육원에서 유일하게 내게 잘해 주던 마리 언니도 데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함께 데려가 달라는 뜻으로.

좋은 기회가 있다면 언니에게도 주고 싶었으니까.

비록 우리가 피 섞인 자매는 아니지만, 문제 되는 건 없었다.

마리 언니는 내게 친언니 이상이었으니까.

“애니……?”

마리 언니는 꽤 당황스러워하며 날 바라봤다.

그러나 나는 꿋꿋하게 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말롱 부인을 바라봤다.

“같이 데려가 달라는 거니?”

다행히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원장도 눈치가 빨랐다.

찰싹!

“어디서 부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거니? 손 놓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원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마리 언니를 잡은 내 손등을 때렸다.

“괜찮아, 마담.”

그런 원장을 만류한 것은 말롱 부인이었다.

“난 자애로워서 한 명쯤은 더 데려가도 괜찮아.”

“예? 하지만, 부인. 이 아이도 벙어리라 제가 열심히 키우던…….”

“그래서 안 된다고?”

“아, 아뇨. 당연히 되죠.”

말롱 부인이 눈썹을 꺾어 올리자 원장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기뻤다.

드디어 이곳을 벗어나는구나.

더는 원장에게 맞지 않아도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시간은 짧았다.

말롱 부인도 원장과 비슷했다. 그녀는 내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제 시중을 들도록 했다.

수화 언어가 아닌, 자신이 내게 명령하기 편한 손짓을 만들고 못 알아듣거나 기분이 나쁠 땐 물건을 던지거나 어떤 식으로든 내게 풀었다.

나는 늘 그녀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그녀가 없을 땐 하녀로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다른 느낌으로 최악이었지만 그래도 원장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말롱 부인이 날 괴롭히는 방식은 원장이 하던 것에 비하면 그래도 나았으니까.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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