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7화 (7/125)

#7

“그게, 네 이름이라고?”

―응, 찍!

나는 살짝 멍해졌다. 저건 이름이라기보단 설명에 더 가깝지 않나?

“음, 그러니까 네 이름이 회갈색 터비체 매력적이고, 앙드마즌 발이 눈에 띄…….”(음, 그러니까 네 이름이 회갈색 털빛에 매력적이고, 앙증맞은 발이 눈에 띄…….)

―‘앙증맞은 발’이 아니라 ‘앙증맞은 연분홍색 발’이야, 찍!

“너무 길어. 우리들은 이름을 그러케 짓지 안아.”(너무 길어. 우리들은 이름을 그렇게 짓지 않아.)

들려오는 항의에 나도 모르게 칭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하나도 안 긴데, 찍?

“나한텐 긴 것 가타. 아니면 내가 새로 지어 줘도 돼? 인간 식으로.”(나한텐 긴 것 같아. 아니면 내가 새로 지어 줘도 돼? 인간 식으로.)

―네가?

“응. 계속 실수할 거 가타서.” (응. 계속 실수할 것 같아서.)

실로 충동적으로 말한 계책이었지만,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나는 ‘애니’라는 내 이름에 꽤 불만이 많았다. 제대로 된 이름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남의 이름을 지어 준다고 생각하니 기대되었다.

“그리고 칭구가 된 기념으로 어때? 너도 네 방식대로 내 이름을 지어 줘도 조아.”(그리고 친구가 된 기념으로 어때? 너도 네 방식대로 내 이름을 지어 줘도 좋아.)

―그럼 좋아, 찍!

냉큼 돌아온 대답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름을 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룩스, 어때?”

―그게 뭐야, 찍?

“별이라는 뜨시야.”(별이라는 뜻이야.)

그리고 내가 아는 고대어 중 예쁜 뜻을 가진 몇 안 되는 단어이기도 했다.

어렸을 적 원장이 글자를 읽을 수 있게 가르친 덕에 기본적인 건 안다.

하지만 쓰기도 잘 못할뿐더러 어려운 단어는 잘 몰랐다.

그래도 몇 개는 주워들은 게 있었다.

이 단어도 그런 경우였다.

다만 이렇게 바로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이유는 언젠가 새 부모를 만나 내 이름이 생긴다면 별처럼 반짝거리는 이름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헛된 바람이란 걸 잘 알지만.

―별! 나 별 좋아해, 찍!

생쥐는 내가 지어 준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다행이다.”

내 마음에 든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에도 들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럼 이제 내가 네 이름을 지어 주면 되는 거지, 찍?

“응.”

나는 살짝 긴장했다. 어떤 이름이 나올지 왠지 무섭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네 이름은! 연분홍색 머리가 솜사탕 같아서 먹음직스럽고 익기 직전의 블루베리색 눈이 맛있어 보이지만, 내 말을 알아듣는 아주 이상하고 신기한 이야, 찍!

내 예감은 아주 잘 들어맞았다.

―마음에 들어, 찍?

“으, 응.”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마음에 드러.”(아주 마음에 들어.)

저 이상한 이름을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 *

‘망할 년!’

원장은 다소 거친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평소라면 애니를 반성의 방에 가둬 놓는 것만으로 기분이 풀렸을 테다.

하지만 오늘은 경우가 달랐다.

‘말롱 자작 부인에게 밉보이다니!’

시설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그녀는 굉장히 들뜬 상태였다.

말롱 부인은 보육원의 최대 후원자인 셰인트 백작가의 고명딸이었다.

그녀에게 잘 보인다면 다음 후원금액이 늘어날 게 분명했다.

물론 지금도 후원 금액은 충분했고, 그 외에도 거래를 통한 부가적인 수입이 짭짤했다.

그러나 돈맛을 잘 아는 원장은 늘 돈이 많길 바랐다.

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게다가 이번에 보육원을 찾은 고객 중에는 부유하기로 소문난 소리야 왕국의 귀족도 있었다.

‘타국과 거래를 뚫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돈과 마찬가지로 줄도 많으면 좋다.

언제까지고 셰인트 백작가에만 의탁할 수는 없는 만큼 이번에 새로운 연줄을 잡을 계획이었다.

비록 말롱 부인이 그녀가 애써 교육하고 있던 애니를 골랐을 때는 당황해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해 노여움을 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는 새로 키우면 됐고 후원금도 여전했으므로.

전혀 예상치 못한 게 있었다면 애니, 그년이 귀머거리도 아니면서 그동안 저를 속여 왔다는 것이다.

며칠도 아니고 무려 9년이라는 아주 오랜 기간을!

어디 그뿐인가?

생쥐와 친구라는 헛소리까지 해 말롱 부인을 기겁하게 만들고, 벌레까지 밟게 했다.

척 보기에도 화가 단단히 난 말롱 부인을 뒤따라가 열심히 해명하고 애원했다.

그러나 말롱 부인은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고 매몰차게 떠났다.

‘오늘로 우리가 다신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그 말만 남기고.

만일 셰인트 백작가가 완전히 손을 떼면 자신은 새로운 연줄을 찾을 때까지 순수하게 보육원의 원장으로 존재하게 될 터였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쓰이는 돈은 모두 자신의 사비일 게 분명했다.

‘절대 안 돼!’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소리야 왕국의 귀족이라도 잡겠다고 마음먹고 돌아왔건만, 이게 웬걸.

어느 틈에 간 건지 그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후였다.

“아악!”

다시금 치미는 분노에 원장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벽에 던졌다.

쨍그랑!

하필, 잡은 게 잉크병이었던 지라 새까만 잉크가 벽을 가득 물들였다. 저가 던져놓고 놀란 원장이 벽지로 다가갔다.

“아아, 이게 얼마짜린데!”

분을 풀고 싶어 던진 거였건만, 오히려 불필요한 소비만 늘었다는 생각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게 다 그 애니, 그것만 아니었어도……. 그런데 언제부터 귀머거리가 아니었던 거지?’

까드득, 엄지손톱을 짓씹던 원장은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분명 애니는 갓난아기 때부터 귀머거리였다.

처음 보육원 앞에 버려진 아이를 주워 의사에게 보였을 때, 장애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까.

한때는 그런 애니를 치료하려고 노력했다.

장애가 없는 아이여야 비싼 값에 거래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선천적인 것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제값을 받지 못할 거라면 제가 부릴 것으로 써먹고자 했다.

이미 마리가 있긴 하지만, 그 아이는 마음이 너무 심약했다.

무엇보다 마리는 인위적인 후천적 장애였다.

혀가 굳는 독을 먹여 그렇게 만들었다.

언제 장애가 치료될지 모르는 마리보다는 선천적인 장애로 인해 영영 돌아올 일이 없는 애니가 더 안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애니를 키우면서 귀가 안 들린다는 걸 확신한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귀머거리가 아니었다고?

“아니지. 아니야…….”

지금 애니가 귀가 들린다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후원은 끊겼고 곧 거래도 다 끊길 테다.

‘최대한 이익을 내야 해. 그것도 치워 버리고.’

원장은 열심히 머리를 썼다. 지금 당장 아이를 비싼 값에 팔아넘길 수 있는 곳.

곧 한 곳이 떠올랐다. 바로 ‘암흑 시장’이라 불리는 리슬리란테 경매장이.

셰인트 백작가와 말롱 자작가의 휘하에 있는 곳이긴 하지만, 물건을 파는 것까지 거부하진 않을 터였다.

‘그나마 얼굴은 반반하니 꽤 받을 수 있겠지?’

결심한 원장은 펜을 들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2. 악당, 벨로크 대공

갑자기 벽이 무너지고, 화염으로 물든 곳에서 커다란 붉은 새가 날갯짓하며 비명 지른다.

―죽여! 죽여! 죽여!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한껏 흥분하고 어딘가 광기가 느껴지는 소리에 나도 함께 미칠 것만 같다.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부여잡아도 들려오는 소리에 괴로워하던 때 누군가의 구두코가 보인다.

고개를 들자 마주친 붉은 눈.

비명도 못 지른 채 굳어 있는데 모든 게 무너져 내리며 떨어진다. 그리고 나도.

“허억!”

숨을 들이켜며 일어나자 어두컴컴한 공간이 날 반겼다.

내 옆에 몸을 만 채 자는 작은 생쥐도 보인다.

그제야 어제 일들이 떠오른다.

생쥐에게 ‘룩스’란 이름을 지어 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잠들었던 것도.

‘……꿈이었구나.’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던 때였다.

끼익끼익, 듣기 싫을 정도로 귀를 긁는 소음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배식구가 열리며 누군가 그 사이로 그릇을 내밀었다.

아, 여기서 나는 소리였구나.

“뭐 해? 안 받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그릇을 받자 쯧!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배식구가 닫혔다.

‘원장인가?’

아직 목소리에 익숙해지지 않아 확신은 못 하겠지만 맞는 듯했다.

배식구 사이로 들어온 손은 명백히 ‘어른’의 것이었고, 이 보육원에서 어른은 원장과 마리 언니가 전부였다.

하지만 마리 언니는 말을 못 하니 남은 건 원장뿐이다.

‘그런데 밥을 안 줄 거라고 하지 않았나?’

미심쩍어 원장이 갖다준 스튜를 건드리지 않고 보기만 하던 때였다.

룩스가 킁킁거리며 일어났다. 눈도 못 뜬 주제에 상체만 들고 코를 벌름벌름 움직인다.

―맛있는 냄새, 찍!

허우적거리던 룩스가 눈을 번쩍 뜨더니 그릇 앞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나, 이거 먹어도 돼, 찍?

“……머글 수 이써?”(먹을 수 있어?)

아니, 그보다 생쥐한테 스튜를 먹여도 되는 건가?

―응! 나는 용감한 생쥐다, 찍!

용감한 거랑 스튜를 먹어도 되는 거랑 어떤 관련이 있다고.

“알아써. 대신 조금만 먹는 고야.”(알았어. 대신 조금만 먹는 거야.)

―조금만 먹을게! 약속, 찍!

그래,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과 수저를 들었다.

수저를 움직이자 스튜가 다 식어 뭉텅이로 덩어리졌다.

‘그럼, 그렇지.’

원장이 바로 만든 음식을 갖다줄 리 없지.

그래도 밥을 챙겨 주는 게 어딘가 싶지만.

“자, 여기.”

―신난다, 찍!

한 스푼 크게 떠서 수저째 룩스에게 주니 신나게 스튜를 먹는다.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좋네.’

나도 먹어 두는 게 좋겠지? 언제 또 밥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어?”

그릇에 입을 대고 스튜를 마시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랑 맛이 미묘하게 다른데? 좀 쓴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상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뭐지?

“룩스? 스튜 맛, 갠차나?”(룩스? 스튜 맛, 괜찮아?)

―찍?

“뭔가 이상하지 않아?”

―맛있기만 한데, 찍?

그냥 내 착각이었던 건가?

―혹시 배부른 거면 나한테 다 줘도 돼, 찍!

“이거 다 머그면 너 배 터져 주거, 바보야.”(이거 다 먹으면 너 배 터져 죽어, 바보야.)

―난 바보 아니야, 찍!

나는 찍찍거리며 항의하는 룩스를 뒤로하고 다시 스튜를 먹었다.

룩스가 이상한 것 같지 않다면 그런 걸 테니까.

‘명색이 동물이니까 나보단 이런 거에 더 예민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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