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8화 (8/125)

#8

……라고 생각했는데요? 아니었습니다.

덜컹덜컹, 제법 시끄럽게 움직이는 마차 소리를 들으며 나는 허망한 눈으로 룩스를 바라봤다.

언제 들어간 건지 모르겠으나 룩스는 내 주머니 속에서 뽀옹! 뽕!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생쥐는 코골이 할 때 다 이런 소리를 내는 걸까? 아니,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룩스.”

―으응, 맛있는 감자, 냠냠. 너무 커서 다 못 먹겠죠, 찍…….

“룩스!”

―으와아악! 애니, 찍?

드디어 룩스가 눈을 떴다. 큰 소리에 제법 놀란 듯했지만.

―잘 자고 있었는데 왜 깨웠어, 찍?

“뭐 이상한 거 업써?”(뭐 이상한 거 없어?)

―이상한 거? 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찍.

“그리고?”

―내가 알던 곳이 아니다, 찍?

참 잘했어요, 하고 칭찬 도장이라도 찍어 줘야 하나.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룩스가 놀란 듯 찍찍거리며 주위를 돌아다녔다.

―찍찍! 이상한 곳이야! 우리가 아까 있던 곳이 아니야, 찍!

“잘 모르겠지만 우린 옴겨지고 있는 거 가타.”(잘 모르겠지만 우린 옮겨지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룩스에게 아주 작게 말했다.

처음 눈뜨자마자 이곳을 살펴봤다. 그 끝에 알아낸 게 몇 개 있었다.

첫째, 나는 보육 시설이 아닌 이상한 곳에 있다.

둘째, 내가 타고 있는 이것은 이동하고 있다. 아마도 수레나 마차겠지.

셋째, 내 양손을 밧줄로 묶어 놓은 걸 봤을 때 이 마차의 목적지가 좋은 곳은 아닐 거란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원장이 꾸민 일이라는 것 정도일까.

―옮겨지고 있다고? 도대체 언제 우릴 이렇게 한 거지, 찍?

“수면제를 머꼬 잠든 사이에 옮긴 게 아니까 시퍼.”(수면제를 먹고 잠든 사이에 옮긴 게 아닐까 싶어.)

―수면제, 찍?

“잠들게 하는 약 마리야.”(잠들게 하는 약 말이야.)

―찍? 언제 그런 약을 먹었어, 찍?

“아까 먹었던 스튜 기억해?”

―그 감자랑 당근이 있는 맛있는 거 맞나, 찍?

“마자. 거기에 섞여 이써슬 거야.”(맞아. 거기에 섞여 있었을 거야.)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내가 잠들면 둔감해진다지만, 옮겨지는 걸 눈치 못 챌 정도로 둔감하진 않았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였다.

‘원장이 스튜에 수면제를 섞어 내게 먹이고, 내가 잠든 동안 옮겼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이게 유력한 가설이었다.

‘룩스가 너무 의심 없이 잘 먹길래 괜찮은 줄 알았더니…….’

하긴, 룩스를 탓할 건 아니지. 같이 먹었으니.

애초에 원장이 갑자기 먹을 걸 갖다준다든가, 스튜의 맛이 평소랑 다르게 조금 쓰다고 느꼈을 때 재빨리 눈치채야 했는데.

―그런데 아까부터 손은 왜 아래에 숨기고 있어, 찍?

“숨긴 게 아니야. 묶였어.”

나는 팔을 들어 룩스에게 묶인 손목을 보여 줬다.

―정말이네! 그렇게 묶이면 재밌어, 찍?

“……?”

―네가 묶은 거 아니야, 찍?

“아니야.”

스스로 이런 식으로 묶을 리가.

“우리가 잠든 사이에 다른 사라미 무끈 거 가타.”(우리가 잠든 사이에 다른 사람이 묶은 것 같아.)

―다른 인간이? 왜, 찍?

“음……. 글쎄.”

사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날 팔아넘긴 거야. 암흑 시장에.’

말롱 부인의 하녀로 일하면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냥 옮기면 시끄럽고 꽤 번거로워서, 편하게 수면제를 먹인다고 했지.’

원장도 편리성을 고려해 내게 수면제를 먹인 게 분명했다.

이런 경우를 생각지 못했다면 거짓일 것이다.

다만……. 방심했다. 말롱 부인에게 밉보여 연줄이 끊긴 줄 알았으니까.

어쨌거나 지금 내가 최우선으로 잡아야 할 목표는 하나였다.

이곳을 탈출하는 것.

“룩스, 혹시 이 밧줄을 푸러 줄 수 이떠?”(룩스, 혹시 이 밧줄을 풀어 줄 수 있어?)

―요새 내가 이빨이 연약해져서…… 못 할 것 같아, 찍!

“정말? 그런 줄도 모르고 아까 스튜 머그 때 당근이랑 감자를 줬네. 내 배려가 부족해떠 거 가타. 미안해. 앞으로는 다 빼고 궁물만 주께.”(정말? 그런 줄도 모르고 아까 스튜 먹을 때 당근이랑 감자를 줬네. 내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아. 미안해. 앞으로는 다 빼고 국물만 줄게.)

―자, 잠깐! 다시 보니 할 수 있을 것 같아, 찍!

“아니야. 네 연야칸 이빨을 혹사할 필요는 업떠.”(아니야. 네 연약한 이빨을 혹사할 필요는 없어.)

―애니! 나는 용감한 생쥐야! 할 수 있어, 찍!

룩스는 내가 말리기도 전에 내 손목 위로 올라와 줄을 갉았다.

사각사각, 줄이 갈리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물었다.

“어때? 푸를 수 있을 것 가타?” (어때? 풀 수 있을 것 같아?)

―밧줄이 생각보다 질기지 않아서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찍.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밧줄을 끊어 낸다고 한들 상황이 희망차게 변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그래도 결박된 것보단 손이 자유로운 게 낫겠지.’

그렇게 룩스에게 내 손목을 맡겨 둔 지 얼마나 되었을까.

연신 덜커덩덜커덩 움직이던 마차가 멈췄다.

벌써 도착한 거야?

당황한 나는 손을 꼼지락거려 소매 끝을 겨우 잡아 벌렸다.

“룩스, 이 안으로 드러와! 그리고 아무 소리도 내면 안 돼! 아라써?”(룩스, 이 안으로 들어와! 그리고 아무 소리도 내면 안 돼! 알았어?)

―알았어, 찍!

다행히 룩스는 더 묻는 거 없이 곧장 내 소매 속으로 숨어들었다.

나는 재빨리 바닥에 누워 잠든 척했다.

끼이익, 녹슨 소리가 고막을 긁는다. 아까 배식구가 열릴 때와 비슷한 소리.

문이 열린 건지 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환한 빛이 쏟아져 온다.

연이어 들리는 목소리.

“뭐야, 아직 자고 있잖아?”

나도 모르게 흠칫하게 될 정도로 낮고 굵직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한 명이 아니었다.

“아까 애 데려올 때 원장이 약 먹여서 재웠다고 한 거 잊었어? 우리야 편하고 좋지.”

역시 수면제였구나.

“그래도 너무 오래 자는 거 아니야? 반나절이 지났는데.”

“거기 원장이 어디 허투루 일을 처리하는 거 봤어? 애 몸 생각 안 하고 막 처넣어 먹였겠지. 그 시설에 있는 벙어리 계집애를 생각하라고.”

“그건 또 그렇네.”

“혀가 굳는 약을 구해 달라 해서 어디다 쓰려나 했더니 자기 시설 애한테 먹여서 계속 부려 먹을 줄은 몰랐지.”

남자들의 대화를 들은 나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마리 언니밖에 없었으니까.

언니가 후천적으로 말을 못 하게 됐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고 때문인 줄 알았는데…….

“하여간 독한 년이야. 보육원 원장이라면서 애들을 넘기질 않나, 멀쩡한 사람 혀를 굳게 해서 부려먹질 않나.”

“…….”

“난 그 여자 보고 여자도 애들한테 독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잖아. 여자들은 모성애 같은 거 있다고 하지 않나?”

“몰라. 그 원장은 없나 보지.”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누군가 날 번쩍 들어 짐짝처럼 제 옆구리에 끼었다.

으악, 나 죽어!

순식간에 배가 짓눌린다. 그 압박감에 하마터면 비명이 나올 뻔했다.

“똑바로 안아. 그러다 떨어뜨릴라.”

“이까짓 애새끼 하나 떨어뜨릴 것 같아? 떨어뜨리면 내가 네 다리 사이로 기어서 들어간다.”

“미친 새끼, 말 꼬락서니하고는.”

킥킥,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난 전혀 웃지 못했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내 몸도 덜렁덜렁 흔들렸으니까!

다행히 스튜가 다 소화되었는지 나오는 건 없었지만, 속이 울렁거리고 높아진 시야가 무서웠다.

어디든 좋으니 제발 날 내려 줬으면 좋겠다.

‘배 아파…….’

다행히 남자는 내 허리가 끊어지기 전에 날 내려 줬다.

철컥, 소리가 나고 다소 번잡하던 주위가 조용해졌다.

‘갔나?’

슬쩍 실눈을 뜨니 남자들은 간 듯 안 보인다.

‘갔구나.’

안도하며 눈을 완전히 뜬 나는 흠칫 놀랐다. 주변에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의 아이들이 무척 많아서였다.

나는 금방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설마 했는데.’

정말 암흑 시장에 보내다니.

―애니, 나가도 되냐, 찍?

“아, 응.”

내 말에 룩스가 소매 밖으로 나와 내 어깨 위로 쪼르륵 올라왔다.

―인간이 많네, 찍.

“……그러게.”

―밧줄, 마저 갉아 줄까?

“그래 주면 고마…….”

끼익, 쾅!

막 룩스에게 대답하려던 찰나, 문이 세차게 열렸다.

벽에 부딪힌 문짝이 큰 소리를 내며 자잘하게 진동했다.

하지만 그것을 오래도록 보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청록색 머리의 남자 때문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새로 온 게 있다던데.”

아이들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던 남자가 날 발견하고 창살 너머로 씨익 웃었다.

“아하, 너로군.”

남자는 비교적 키가 작았지만, 어깨가 넓고 근육이 다부졌다.

전체적인 모양새를 생각하면 퍽 웃긴 모양새였으나 더벅머리 아래 언뜻 보이는 뺨의 큰 흉터와 다부진 몸은 어린 내게 제법 무섭게 느껴졌다.

게다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손버릇도 안 좋을 게 분명했다. 저 두꺼운 손에 맞을지 모른다고 상상하니 절로 몸이 떨린다.

내가 겁먹은 동안 남자가 철창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불시에 턱이 붙잡혔다.

“읏.”

배려 없는 손길에 내가 얼굴을 찡그렸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다.

“흐음, 꽤 귀엽게 생겼군. 크면 미인이 되겠어. 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남자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내 턱을 놓았다. 그리고 손목에 걸고 있던 웬 가느다란 줄을 내 목에 걸었다.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난 상대가 꼬맹이라고 해도 자비를 베풀진 않거든. 알아들었으면 고개 끄덕여.”

시키는 대로 고개를 움직이자 남자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흘렸다.

“좋아. 이틀 후에 경매가 열릴 때까지 이렇게만 지내자고.”

“…….”

“그리고 그 목걸이는 빼지 말도록 해. 그랬다가는 아래층으로 이동하다 신체 일부가 날아갈 테니.”

신체가 날아간다고……?

나는 남자가 걸어 준 목걸이를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줄 끝에 작은 돌멩이가 달려 있었다.

“뭐, 손도 묶여 있는 데다 이 유진 님이 수시로 확인할 거라 뺄 수 있을 리 없지만.”

유진 님?

잠깐, 이 남자가 ‘유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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