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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9화 (9/125)

#9

내가 멈칫한 동안 남자는 킥킥, 질 나쁜 웃음을 흘리며 내 볼을 톡톡 건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은 이게 전부였는지 남자는 다시 나가 철창 문을 잠갔다.

그리고 가볍게 채찍을 휘두르며 걸어가 복도 끝에 있는 의자에 다리를 꼬며 앉았다.

그와 동시에 언제 들어갔는지 모를 룩스가 소매 밖으로 머리를 삐죽 내밀었다.

―후아! 숨 막히는 줄 알았어! 나 잘 숨어 있었지, 찍?

“응, 잘해써.”(응, 잘했어.)

―방금 인간 남자가 뭐라고 떠들고 간 거야? 기분 나빴어, 찍!

“그냥, 자주 확인할 거라고 하네.”

―그렇구나. 그런데 ‘유젠 님’은 뭐야, 찍?

“유젠 님?”

―저 남자도 말하고 너도 말하던데, 찍.

“유젠 님이 아니라 유진 님 아니야?”

―잘 모르겠어, 찍.

“근데 어떠케 아라드러써? 다른 사람 말도 아라드르 수 잉는 거야?”(근데 어떻게 알아들었어? 다른 사람 말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그건 아니고, 유젠 님만 여러 번 들리길래 물어봤어, 찍!

그러니까, 사람 말을 완전히 알아들은 게 아니라 유진의 이름만 들었다는 건가 보네.

“그럼 네가 드른 건 유진 님이 마즐 거야. 저 남자의 이름이 유진이거든.”(그럼 네가 들은 건 유진 님이 맞을 거야. 저 남자의 이름이 유진이거든.)

―아하! 저 인간의 이름이 유진님이구나, 찍!

“이름은 ‘유진’만이야. ‘님’은 존칭이라서.”

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속닥거렸다.

―존칭, 찍?

“음, 그냥 조흔 거야.”(음, 그냥 좋은 거야.)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게 어려웠던 나는 얼버무렸다.

―그럼 나도 붙여서 말할래! 나는 룩스 님이 되는 거지, 찍?

그게 설마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몰랐지만.

‘진실을 알려 줘야 하나?’

―무슨 진실?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찍?

‘그게……. 방금 가르쳐 준 존칭 말이야. 그건 남이 해 주면 좋은 거지만 내가 하면 부끄러운 느낌을 주는 게 있거든.’

―그럼 아까 그 남자랑 내가 부끄러운 짓을 한 거야, 찍?

‘응.’

―헉! 아니야! 룩스 님 아니야! 나는 부끄러운 생쥐 아니야, 찍!

‘그래, 그래.’

나는 방방 날뛰는 룩스에게 진정하라는 의미로 작은 머리통을 간질이듯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나, 방금 속으로만 말하지 않았나?

‘룩스.’

―왜, 찍?

시험 삼아 부르니 룩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하는 생각을 아는 거야?’

―찍?

룩스는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단 눈치였다.

굳이 육성으로 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전달이 된다니…….

이게 가능한, 아니지, 이런 걸 따지면 끝도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 내가 과거로 돌아와 살아난 것부터가 말이 안 되니까.

‘그럼 내가 하는 생각도 다 전달되는 건가?’

나는 룩스를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룩스는 “왜 그래, 찍?” 하고 물을 뿐, 별다른 반응은 안 보였다.

‘방금 내가 한 생각은 못 들었어?’

―무슨 소리, 찍?

말을 걸려는 의도가 아니면 전달도 안 되는 건가?

결론을 내린 나는 조금 안도했다. 모든 생각이 룩스와 연결되면 힘들 테니까.

―다시 밧줄 끊어 줄게, 찍.

‘음, 그보다 다른 걸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뭔데, 찍?

‘어렵진 않을 거야.’

나는 룩스에게 부탁하려고 하는 일을 전했고, 내 말을 들은 룩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끝이야, 찍?

‘응.’

―알겠어! 그럼 다녀올게, 찍!

힘찬 목소리로 대답한 룩스가 순식간에 내 어깨에서 내려가더니 쇠창살 너머로 사라졌다.

* * *

‘왜 안 오지?’

나는 초조하게 쇠창살 너머를 응시했다. 룩스가 나간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쉽게 해낼 수 있을 줄 알고 부탁한 일이었는데 돌아오질 않으니 걱정되었다.

‘설마 다른 사람한테 잡힌 건……. 아니야, 아닐 거야.’

애써 끔찍한 상상을 부정했지만, 초조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룩스에게 부탁한 것은 바깥 동태를 살피는 것이었다.

일단 난 이곳을 나가는 게 목표였다. 그러려면 탈출로나 인원을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았고.

그러나 룩스가 돌아오지 않자 후회되었다.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던 때였다.

―다녀왔어, 찍!

룩스가 상큼한 목소리로 외치며 등장했다. 내 품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생쥐를 보며 나는 안도했다.

‘다친 곳은 없어?’

―엣헴! 이 룩스 님이 잠깐 나갔다 왔다고 다칠 리 없잖, 헉! 나 또 부끄러운 짓 했어, 찍!

‘괜찮아. 저 남자와 달리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건 귀엽거든.’

―내가 좀 귀엽긴 하지, 찍!

이런 겸손을 모르는 생쥐 같으니.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런 룩스의 모습에 위안되었다.

‘걱정했어. 너무 안 돌아와서.’

―용감한 생쥐에게 순찰쯤은 어렵지 않지! 걱정하지 마! 그보다 주목! 순찰 결과를 가르쳐 줄게, 찍!

룩스의 외침에 나는 집중했다.

―일단 건물 입구에 남자 한 명이 있어. 그리고 남자 셋이 건물 주변을 돌아다녀, 찍.

‘그게 다야? 주변에 울타리나 담 같은 건 없었어?’

―당연히 있지! 엄청 높고, 또 튼튼해 보였어, 찍!

“그렇구나…….”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탈출하기 어렵겠는걸.

운 좋게 감시인들을 피한다고 해도 벽을 넘어가지 못하면 금방 잡힐 테니까.

절로 기분이 침울해졌다.

‘기왕 생길 능력, 동물로 변신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새나 고양이로 변할 수 있었다면 쉽게 탈출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너무 시무룩해하지 마! 여기만 나가면 벽 자체는 쉽게 넘어갈 수 있어, 찍!

‘벽을 넘어갈 수 있다고?’

반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돌아다니다 멋진 누님 쥐를 만나 들은 거야. 벽에 꽤 큰 구멍이 있는데 안 쓰는 판자로 가려져 있어서 아는 인간이 몇 없다고 했어, 찍.

벽에 난 개구멍을 통과해서 나가자는 얘기였구나.

‘거기 위치는 알아?’

―몰라! 하지만 누님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 거야! 다시 다녀올게, 찍!

“잠……!”

내가 잡기도 전에 룩스는 재빨리 사라졌다. 혼자 남은 나는 허망하게 읊조렸다.

“……가 버렸네.”

* * *

“밥 먹을 시간이다, 꼬맹이들아!”

쇠창살 사이로 빵 덩어리가 날아 들어온다.

‘식사 시간만이라도 손을 풀어 주면 좋을 텐데.’

나는 바닥을 뒹구는 빵을 보며 짧게 불평했다.

그릇에 담아 주지 않아 위생이 안 좋은 건 둘째치고 손이 묶여 있어 집기 힘들었으니까.

심지어 빵은 맛없는 데다 딱딱하기까지 했다. 한참 씹어야 겨우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차라리 굶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지만, 먹을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려면 힘을 비축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저 쓰레기 같은 놈 때문이란 이유가 컸다.

나는 다른 철창에다 빵을 던지는 유진을 바라봤다.

‘벌써 어제 일이네.’

내가 들어온 뒤로도 나 말고 새로운 아이가 몇 명 더 들어왔다.

그리고 사달은 그중 한 명이 빵을 먹지 않으면서 일어났다.

유진은 곧장 그 애를 데리고 나와 무자비하게 때렸다.

그 끔찍한 광경에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했다.

동시에 확신했다.

저 남자는, 내가 알던 유진이 맞는다고.

사실 나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 말롱 자작저에 찾아온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저급하고 비열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게다가 허세를 부리는 것도 얼마나 심한지!

제 과거 일화를 과장해 영웅담처럼 말하고는 했다. 특히 벨로크 대공과 관련된 이야기가 그랬다.

‘자신이 미친 살인귀로 소문난 벨로크 대공의 팔을 날렸다던가?’

유진이 이걸 자랑거리처럼 말하는 데는 벨로크 대공이 아주 뛰어난 마법사라는 이유가 있었다.

마법사는 팔을 통해 마나를 옮기고 마법진을 생성해 마법을 썼다.

즉, 팔은 마법을 쓰는 데 필요한 매개체였다.

그래서인지 마법사들에게 팔은 ‘목숨과 같다’고들 한다나.

물론 다 주워들은 지식이라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벨로크 대공은 직계 황족에게만 전해진다는 ‘불새’의 축복까지 받아 일반 마법사보다 더 강력하고 뛰어나다고 했다.

문제라면, 그 엄청나게 강한 힘들을 세간에 알려진 소문처럼 누군가를 죽이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

‘벨로크 대공이 얼마나 미쳤는지 알아? 제 부인도 죽였다니까? 그거 때문에 황위 계승 서열 1위였는데 쫓겨났지.’

히죽거리며 검지를 제 관자놀이 위에 갖다 대고 빙글빙글 돌리던 유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뒤로 계속 우리 쪽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는데, 그 미친놈은 정도랄 게 없어요. 한번 건드리면 아주 끝을 보거든.’

‘…….’

‘그런데 내가 그 대공의 팔을! 날린 거야!’

그러며 유진은 자신이 어떻게 벨로크 대공을 불구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내게 제법 상세하게 떠들었다.

부인을 죽인 이후, 벨로크 대공은 암흑 지대만 골라 급습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각 곳에서는 대공을 경계하고 대비책을 세웠다.

유진이 있던 리슬리란테에서는 마법사를 고용해 ‘외부인’은 통과할 수 없는 결계를 만들었다고.

긴박한 상황에서 결계를 떠올린 유진은 대공을 유인해 그의 팔을 날려 버렸고, 암흑 지대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팔을 잃은 대공은 마법을 못 쓸 테고, 이제 암흑 지대에서 행패를 부리지 못할 거라면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렇게 셰인트 백작님의 신임을 받게 되었지. 그리고 이 화상 보이냐?’

‘…….’

‘이게 바로 그때 얻은 훈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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