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말이 마구마구 꼬이는 게 느껴졌지만, 고치거나 무언가를 더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는 유진이 내게 걸어 줬던 목걸이를 벗어 내밀었다.
“이거! 이거 가져가요!”
“…….”
날 내려다보는 대공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으며,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무표정이었다.
그로써 한 가지, 확실히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대공이 보인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처음 보는 여자애가 “당신, 이거 안 들고 가면 팔 날아가요!”라고 하는데 믿을 수 있을 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특이한 거겠지.’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대공을 붙잡지 않았으면 모를까, 난 이미 그를 붙잡는 대형 사고를 친 후였다.
대공은 유진이 조금 시끄럽게 굴었다고 바로 그를 죽였다.
‘맥없이 물러나면 쓸데없는 일로 붙잡았다고, 나까지 죽일 거야.’
그러니 내가 대공을 붙잡은 건 절대 사소한 이유 때문이 아님을 증명해 내 말을 믿게 해야 했다.
꿀꺽, 침을 삼킨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진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차마 고개를 돌릴 엄두는 안 나서 대공과 눈을 마주한 채로.
“저 초록 머리 남자가 그래써요! 이 목걸이가 업스면 팔이 나라갈 거라고요!”(저 초록 머리 남자가 그랬어요! 이 목걸이가 없으면 팔이 날아갈 거라고요!)
만약 아직 유진이 살아 있어 지금 내 말을 들었다면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고 역정 냈을 것이다.
그는 내게 신체를 잃을지 모른다고 말했지, 팔이 날아간다고 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유진은 이미 죽었다. 죽은 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다.
게다가 내가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었다.
교묘하게 왜곡한 건 인정한다.
그래도 유진은 내게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걸.
비록 이번 삶에 한 말은 아니고,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그런 거긴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벨로크 대공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이거 가뎌가세요! 이게 이쓰면 안 나라가요!”(이거 가져가세요! 이거 있으면 안 날아가요!)
말하면서도 내가 잘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이게 통하기만을 바랄 뿐.
대공은 말없이 날 빤히 바라봤다.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선에 심장이 쿵쾅쿵쾅 거세게 뛰어 댄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불쑥 내 쪽으로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게 됐다.
역시 이걸로 내 말을 믿게 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나 봐…….
“가져가 보긴 하지.”
내 손에서 목걸이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바로 눈을 떴지만, 이미 대공은 내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에야 겨우 긴장이 풀렸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나, 잘한 거 맞겠지?
* * *
암흑 시장, 리슬리란테의 운영 책임자인 빈센테는 멍한 눈으로 죽은 제 부하들을 바라봤다.
꽤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 왔다는 사실 외에도 자신 역시 곧 저들과 비슷한 신세가 될 거라는 직감이 그를 허망하게 만들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그는 기분이 좋았다.
경매를 통해 큰돈을 벌어들일 생각에 들떠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뒤바뀌었다.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 때문에.
‘아시드 로넨 벨로크.’
전 황제와 죽은 첫 번째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불새의 축복을 받은 강한 마법사.
그러나 어느 순간 미쳐 제 아내는 물론 황궁에서 일하던 시종과 시녀까지 죽였다.
그 일로 많은 귀족이 아시드의 폐위를 주장했다.
대신 전 황제가 들인 두 번째 황후이자 지금의 황태후가 낳은 이복동생이 황위를 물려받았다.
그래도 전 황제의 친아들이라는 이유로 대공 작위를 받았건만…….
그 뒤로 더 미친 건지. 아니면 원래 있었으나 그동안 억눌렸던 광기가 그 계기로 피어난 건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의 벨로크 대공이 예전과 달라진 것은 확실했다.
그는 제 마음에 안 드는 자를 가차 없이 죽였으니까.
게다가 틈만 나면 암흑 지대를 습격해 학살했다.
그리하여 ‘미친 살인귀’라는 칭호를 얻은 자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였다.
벨로크 대공이 벌인 학살에서 겨우 도망쳐 살아남은 생존자는 ‘벨로크 대공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대공이 찾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공이 습격하면 그곳은 초토화되었다. 생존자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암흑가에 발을 좀 담근 이들은 벨로크 대공이라면 두려워하고 학을 뗐다.
빈센테 역시 그랬다.
아직 벨로크 대공에게 습격받은 적은 없으나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돈을 들여 마법사와 기사를 고용하기에는, 벨로크 대공을 능가하는 이가 없었다.
‘대공이 습격해 온다면 그야말로 꼼짝없이 죽게 되겠지.’
그렇게 종종 두려움에 떨던 때, 늘 뒤를 봐주는 그의 주인이 흑마법사들을 잔뜩 보내 주었다.
벨로크 대공의 습격에 대비한 결계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한 달이라는 시간을 공들인 끝에, 흑마법사들은 마법을 완성해 경매장 곳곳에 결계를 만들었다.
‘아무리 벨로크 대공이라 해도 이 마법 결계를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럼 이 결계만 있으면 벨로크 대공은 우리 경매장에 들어오지 못하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이 결계는 대공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반응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필요한 겁니다.’
흑마법사는 빈센테에게 작은 광물이 가득 든 상자를 건네주었다.
‘이, 이게 뭡니까?’
‘그냥 돌멩이입니다만, 이 결계를 지나갈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 두었습니다. 일종의 통행증이라 보시면 됩니다.’
‘…….’
‘아참, 그 원석이 없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즉시 그 대가를 내놓게 될 테니 주의하십시오.’
‘대가라면……?’
‘사지 중 하나를 내놓게 될 겁니다. 어딜 내놓게 될지는 변칙적이지만, 자주 쓰는 부위를 내놓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따로 시험해 봐도 좋습니다. 그럼.’
흑마법사들은 그대로 떠났다. 제 주인이 보내 준 자들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계의 효력을 실험해 보고 싶긴 했다.
이런 건 확실할수록 좋지 않겠는가.
빈센테에게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널린 게 상품들이었으므로.
그렇게 흑마법사가 한 말이 사실이란 걸 확인했다.
‘분명 그랬는데, 어떻게 이자가 여기까지 온 거지……?’
심지어 사지 중 하나를 잃게 될 거라던 말과 달리 벨로크 대공은 멀쩡했다.
어느 한 곳 잃지 않은 채.
‘저 결계도 대공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인가?’
빈센테는 누군가 벨로크 대공에게 목걸이를 줬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 한 채 그저 한탄했다.
이미 죽음을 직감했지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아니, 살아야만 했다.
리슬리란테의 운영자로 살아오며 모아 둔 그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평생 쓰고도 남아 자손에게도 물려주고 또 물려줘도 될 만큼.
그 돈을 두고 죽는다고?
‘절대, 못 죽지.’
결심한 빈센테는 실낱이라도 잡기 위해 입을 열었다.
“차, 찾으시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
얼핏 보기에 대공은 아까와 똑같아 보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운영 책임자로 살아온 빈센테는 타인의 변화를 잡아내는 데 능숙했다.
그는 벨로크 대공에게서 무언의 동요를 읽었다.
그리고 감히 확신했다.
벨로크 대공이 찾는 게 뭔진 몰라도 이곳에 있는 게 틀림없다고.
“사실 전 대공께서 오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가진 것에 흥미를 보이실 거라고 여겼거든요.”
“네놈이 가지고 있다고?”
역시!
사실상 도박이었으나 돌아온 대꾸에 빈센테는 쾌재를 부르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리슬리란테에서는 장물도 다뤘으나 주로 다루는 것은 노예였다.
‘벨로크 대공이 찾는 거야 뻔하지. 자기 취향의 여자를 찾는 걸 거야. 그러고 보니 부인을 죽이기 전까지는 꽤 애지중지했다지? 그 뒤로 더 미쳤다고 했으니…….’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한 빈센테가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예, 잘 찾아오셨습니다! 죽은 부인과 닮은 여자를 찾으시는 거지요? 시간만 주신다면 대공께서 만족하실 결과를……!”
빈센테는 말을 끝까지 마칠 수 없었다.
갑자기 시야가 뒤집혔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보게 된 것은…….
“시간 낭비였군.”
무심한 어조로 읊조리며 뒤돌아서는 대공의 뒷모습과 갑자기 솟아난 불에 휩싸인 경매장의 모습이었다.
* * *
거센 화염이 주변을 매섭게 집어삼켰지만, 아시드의 걸음은 여유로웠다.
그가 일으킨 화염이었기에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주위에 보호막을 드리운 아시드는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낡아 빠진 가는 가죽 줄에 작은 돌이 걸린 게 전부인 목걸이는 실로 볼품없었다.
그러나 이 목걸이가 그를 구했다.
‘그냥 가면 주거요! 아, 아니, 죽능 게 아니라 날아가요! 팔!’
‘이거! 이거 가져가요!’
처음에는 걸리적거리는 게 꽤 귀찮아 죽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목걸이를 내민 순간, 그는 거기에 걸린 마법을 읽어 냈다.
마법은 별거 아니었다. 그저 이 목걸이를 건 자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게 해 주는 단순한 마법이었다.
단지 그의 흥미를 이끈 게 있다면 그 마법이 ‘흑마법’이었다는 것.
‘저, 초록 머리 남자가 그래써요! 이 목걸이가 업스면 팔이 나라갈 거라고요!’
겁에 질려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떨면서도 꿋꿋하게 목걸이를 내밀던 모습이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상관없었다.
아시드는 그 어떠한 함정에서도 헤쳐 나올 자신이 있었다.
‘날 속인 거라면 죽이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목걸이를 받은 아시드는 머지않아 여자아이의 말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