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목마르진 않니? 물 줄까?”
“갠차나요.”(괜찮아요.)
“혹시 사탕 좋아하니?”
내 거절에도 기사 제복을 입은 남자는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단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설탕을 원재료로 쓰는 사탕은 정말 비싼 간식이었다.
말롱 자작 부인의 하녀로 일할 때도 몇 번 못 먹어 봤을 정도로.
그런데 처음 보는 내게 선뜻 주겠다니?
‘엄청 착한 사람이거나 그만큼 부유한 사람인가 보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고.
보통의 아이라면 남자의 호의에 기뻐하며 사탕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겐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다 못해 부담스러웠다.
“진짜 갠차…….”
―사탕! 나 먹을래, 찍!
“고마씀니다.”(고맙습니다.)
거절하기 위해 막 입을 열었을 때 들려오는 룩스의 외침에 넙죽 사탕을 받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렴. 근처에 있을 테니까.”
남자는 내 어깨를 한번 다독이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멍하니 사탕 겉껍질을 매만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감촉이 기분 좋은 것과 별개로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진 않았다.
‘아까는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지…….’
나는 막 개구멍을 나왔을 때를 떠올렸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경매장 사람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다행히 날 찾은 사람들은 경매장 사람이 아니라 벨로크 대공가의 기사였다.
날 발견한 기사들은 웬 달과 꽃이 함께 있는 문양을 보여 주며, 자신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니 안심하라고 날 달랬다.
그러며 나처럼 경매장에서 탈출한 다른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정작 나는 대공가의 문양을 몰라 그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지만.
하지만 바로 도망치기보단 믿는 척하며 도망칠 기회를 엿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단은 이렇게 따라온 상태였다.
그렇게 따라오니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 된 것이었다.
―사탕 줘! 사탕, 찍!
―그런데 사탕이 뭐야?
―아주 달고 맛있는 거야, 찍!
―그래?
룩스에 이어 하늘다람쥐까지 내 손에 있는 사탕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까만 눈망울들의 시선을 받으니 살짝 부담스럽다.
‘너희,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옆에서 시끄럽게 외쳐 사탕을 받긴 했는데 막상 주려니 망설여졌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많은 사탕을 먹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찍!
―정말? 얼마나 많이 먹었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먹었어! 원래 있던 곳에 정말 많았거든, 찍.
‘원래 있던 곳이라면, 보육원?’
사탕은 비싸서 구경하기 힘들 텐데 그게 보육원에 있었다고?
―아마? 가짜 노란 머리 여자가 앉던 책상 위에 늘 있었어, 찍.
‘원장 얘기구나.’
그제야 어떠한 기억이 떠올랐다. 원장은 사탕을 좋아해 책상 위에 가득 두곤 했었지.
몇몇 아이들이 훔쳐 먹다 걸려 된통 혼나기도 했고.
―사탕 줘! 사탕, 찍!
‘알겠어. 잠깐만 기다려.’
룩스의 재촉에 나는 지금 하던 생각을 치웠다.
이미 나온 곳이니 더는 그곳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바로 옆에 있는 바위에 사탕을 몇 번 찧은 뒤 포장지를 까니 산산이 조각난 사탕 조각들이 보였다.
“자, 머거.”(자, 먹어.)
룩스와 하늘다람쥐 앞에 조각들을 놓아 주자마자 둘이 달려들었다.
―마, 맛있어! 어떻게 세상에 이런 맛이……!
―그렇지? 나는 거짓말 안 해, 찍.
―입 안에서 별들이 춤추는 것 같아!
그 뒤로 룩스와 하늘다람쥐는 열심히 사탕 조각을 핥기 바빴다.
―애니! 넌 안 먹어, 찍?
“난 갠차나.”(난 괜찮아.)
고개를 살짝 내저은 나는 속으로 말했다.
‘다 먹으면 말해 줘. 우리 또 도망갈 거거든.’
―찍?
―응?
내 말에 룩스와 하늘다람쥐가 사탕을 핥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도망쳐? 저 인간들 좋은 인간들 아니야, 찍?
―맞아! 사탕도 주고 좋은 인간 같은데?
“보통은 그러치.”(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처음부터 날 찾는 듯했어.’
그렇지 않고야 날 보고 “여자애, 찾았습니다!”라고 말할 리가.
게다가 저 사람들은 벨로크 대공가의 기사라고 했다.
저들에게 그런 명령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벨로크 대공밖에 없을 터.
미친 살인귀로 소문난 대공이 왜 날 찾으라고 했을까?
‘이유야 뻔하지.’
내가 준 목걸이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생각해 보니 내가 거슬려서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괜히 도와줬나 봐.’
나 좋을 대로 대공을 붙잡고, 도와준 거라 고마워할 거란 생각은 안 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갚을 줄은 몰랐던 만큼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이런 감정을 느끼느냐면 할 말 없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대공이 오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날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멀리.
‘이렇게 아이들이 많으니 나 하나쯤은 슬쩍 사라져도 모르겠지?’
마침 기사들도 날 안 보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 같았다.
‘룩스, 내 소매 속으로 들어와.’
―정말 도망가려고, 찍?
‘응.’
룩스는 더 말하지 않고 내 소매 속으로 들어왔다. 이어 나는 하늘다람쥐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도 올라와.’
―나도?
‘나랑 가기 싫어?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야! 안 싫어!
하늘다람쥐가 후다닥 내 팔로 뛰어 올라왔다.
‘좋아, 이제 슬쩍 사라지자.’
나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뒤쪽으로 슬금슬금 물러나 휙 돌아섰다.
사람들 눈에 안 띌 만한 수풀로 숨어들었을 때였다.
“야, 분홍 머리!”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가 섞인 무리가 서 있었다.
‘분홍 머리라니, 날 말하는 거야?’
물론 내 머리카락이 연분홍색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불리니 상당히 기분 나쁜걸.
“얘 맞지?”
“응, 맞아.”
내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동안 아이들이 속닥거렸다.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그중에는 내가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열쇠를 주게 만든 남자아이도 섞여 있었다.
가장 덩치가 큰 소년이 험악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너 아까 왜 그냥 갔어?”
“그냥 갇다니?”(그냥 갔다니?)
“아까 말이야! 다들 저기에 갇혀 있을 때!”
“맞아! 너 혼자 나가려고 했잖아!”
소년에 이어 여자아이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아이들도 “맞아, 맞아!”라고 동조했다.
하지만 영문 모를 소리였다.
“열쇠 줘자나.”(열쇠 줬잖아.)
“네가 언제? 열쇠를 갖다준 건 다람쥐였어!”
“응. 그러니까 그게 내가 주라고 한…….”
“거짓말! 다람쥐가 어떻게 네 부탁을 들어줘!”
―뭐라니? 얘가 부탁한 거 맞는데?
―쟤네 바보다, 찍!
“그 다람쥐가 열쇠를 주지 않았더라면. 또 이 오빠가 빨리 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우린 아직도 갇혀 있었을 거야.”
“맞아! 그리고 그 초록 머리 남자한테 두들겨 맞았겠지! 너 때문에!”
“너 혼자 나가려고 하고!”
“넌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했어!”
왁왁 쏟아지는 불만에 나는 입을 닫았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주 작게 남은 양심이 걸렸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으니까.
아마 회귀하기 전에 외면해 내내 죄책감을 안겨 준 남자아이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나 혼자 도망쳤을 것이다.
“미안…….”
“이 쓰레기야!”
퍽!
막 진심을 담아 사과하려는데 돌멩이가 날아왔다.
다행히 돌멩이는 아슬아슬하게 내 몸을 비켜 뒤에 있던 나무를 맞히고 떨어졌다.
‘지금, 날 맞히려고 한 거야?’
하마터면 맞을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쟤, 쟤네 방금 뭐 한 거야? 저거 던진 거야?
―내 친구 괴롭히지 마, 찍!
하늘다람쥐와 룩스가 화냈으나 아이들은 다시 나한테 던지려는 듯 돌멩이와 흙을 집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냅다 룩스와 하늘다람쥐를 끌어안고 도망쳤다.
나야 운 나쁘게 맞아도 조금 아프고 말 테지만, 나보다 작은 룩스와 하늘다람쥐가 잘못 맞을까 걱정되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가야 쟤네들을 피할 수 있지?
이곳 지리를 모르는 나는 정신없이 달리기 바빴다. 그렇게 정신없이 도망치던 때였다.
“악!”
단단한 무언가에 얼굴이 부딪쳤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난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아…….”
―애니, 찍?
―얘, 괜찮아?
“갠차…….”(괜찮…….)
무심코 대답하며 고개를 든 나는 차마 말을 끝까지 마칠 수 없었다.
벨로크 대공이 그 특유의 무심한 붉은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 벨로크 대공?’
나는 깜짝 놀랐다.
왜, 왜 대공이 여기에 있는 거지? 어떻게 날 찾은 거야?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룩스와 하늘다람쥐를 꼭 안아 품에 숨기며 속마음을 전했다.
‘잠깐 조용히 있어 줘.’
다행히 둘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야, 이 쓰…… 어!”
퍽!
내 뒤에서 날아온 돌멩이가 대공의 얼굴을 정확히 때리고 떨어졌다.
그로 인해 대공의 멀끔한 뺨에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