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7화 (17/125)

#17

* * *

“불편한 건 없으십니까?”

도리도리.

“더 필요하신 건…….”

“엄서요. 다 조아.”(없어요. 다 좋아.)

나는 냉큼 대답했다. 그제야 집사 할아버지의 얼굴에 안도가 스민다.

“다행입니다.”

……사실 다 거짓말인데.

난 여기가 아주 불편했으니까.

하지만 일단 속내를 감추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게 있어서였다.

나는 조심스레 집사 할아버지의 옷자락 끝을 붙잡았다.

“저기요, 집사 하라바지.”(저기요, 집사 할아버지.)

“이런, 아까 미처 말씀을 못 드렸군요. 그냥 더스틴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말도 편하게 해 주십시오.”

“으, 응. 더스틴 하라바지.”(으, 응. 더스틴 할아버지.)

순간, 집사 할아버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나도 이상한 호칭이란 걸 안다. 집사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나는 모셔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랫동안 하녀로 일했던 내게 ‘집사’는 높은 사람이자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도 모자라 하대까지 하라니!

물론 집사 할아버지한테는 마치 말롱 자작 부인이 내게 공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질 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하대까지는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이름만 부르는 건 못 하겠어.’

익숙해지면 또 모를 일이지만, 아직은 그렇게 굴 자신이 없었다.

에잇! 이럴 땐 모르는 척 말 돌리기다!

나는 집사 할아버지가 바로잡아 주기 전에 선수 쳤다.

“대공님은 언제 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아가씨.”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거구나.

“그럼 나가서 노라도 돼요, 아니, 돼? 얘네랑 가치.”(그럼 나가서 놀아도 돼요, 아니, 돼? 얘네랑 같이.)

나는 자꾸만 튀어나오는 공대를 고치며, 아까와 달리 제법 비워진 바구니 속에 누워 있는 룩스와 하늘다람쥐를 가리켰다.

집사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좋았어.

그 뒤, 채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우리도 나가서 놀아야 해? 난 나가기 싫은데, 찍.

‘나갔다 돌아오면 간식 바구니를 보충해 줄게.’

―난 세상에서 나가는 게 제일 좋아, 찍!

―나도! 좋아!

역시 이 방법이면 될 줄 알았지.

집사 할아버지는 날 보살필 하녀 언니 두 명을 붙여 줬다.

내 목욕 시중을 들어 줬던 하녀들이었다.

오늘 처음 봤지만 그래도 아까 한번 봤던 사람들이니 나을 거라면서.

집사 할아버지 나름의 배려인 듯했지만, 순수한 목적으로 놀러 나가는 게 아닌 만큼 내겐 그 배려가 꽤 불편했다.

‘필요 없다고 혼자 놀고 싶다고 하면 이상해 보이겠지?’

눈에 띄면 대공에게 보고가 들어갈 확률도 높을 테고.

짧은 고민 끝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사 할아버지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저택 밖으로 나온 나는 뛰어노는 척하며 이곳저곳을 잔뜩 들쑤시며 다녔다.

정원은 물론이거니와 구석구석까지 한참을 쏘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하는 걸 찾을 수 없었다.

‘없어!’

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일부러 놀고 싶다는 핑계까지 대며 나왔건만, 개구멍이 하나도 없다니…….

분명 대공가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이 틀림없다.

하지만 난 이런 곳에서 살 자신이 없었다.

마침 벨로크 대공을 포함해 벨로크가의 사람들은 건강 검진 때문에 내 나이는 알게 됐어도 내 이름은 몰랐다.

그래서 오늘 밤에 도망칠 계획으로 개구멍을 미리 봐 둔 다음, 간식 바구니를 꽉꽉 채워 달라고 해 일용할 양식을 비축해 그대로 도망칠 계획이었는데…….

‘개구멍이 없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혹시 몰라 정문에 가 그곳도 슬쩍 살펴봤다.

제복을 잘 차려입은 기사들을 보고는 바로 단념했지만.

‘말롱 자작저에는 개구멍이 있었는데.’

자작가의 기사들이 종종 훈련하는 척하다 그곳을 통해 나가는 걸 몇 차례 봤기에 대공저도 그럴 줄 알았다.

찾아본 끝에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아흐윽, 힘 빠져.’

역시 대공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망할 대공가라고 해야 하나.

더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내 몸은 마음을 따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다. 돌아가자.’

이렇게까지 찾았는데 없는 걸 보면 다른 곳에도 개구멍은 없을 거야.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하녀 언니들이 내 손과 발을 깨끗이 씻겨 줬다.

그리고 내가 나가서 노는 동안 사 왔다는 새 잠옷까지 입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유가 될 수 있었다.

“으, 힘드러…….”(으, 힘들어…….)

나는 침대 위에 풀썩 엎어졌다.

―그냥 우리 시키지, 찍.

―맞아. 나 그런 거 잘 찾아내는데.

룩스와 하늘다람쥐가 사이좋게 말했다.

―나 혼자 나가서 더 찾아볼까?

‘괜찮아. 더 찾는다고 나올 거 같지는 않거든.’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나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으며 바랐다.

제발, 내가 무언가 방안을 찾아낼 때까지 대공이 내 존재 자체를 잊어 줬으면 좋겠다고.

* * *

절반에 불과했지만, 내 바람은 이루어지긴 했다.

날 두고 가 버린 대공이 그 뒤로도 안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며칠이나!

집사 할아버지는 내가 서운해할 줄 알았는지 매일 찾아와 날 챙기고 위로의 말을 해 주고 갔다.

대공이 한번 저택을 나서면 며칠씩 안 들어오는 일이 잦다며, 돌아오면 날 챙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면서.

조금도 그런 걱정을 안 하고 있던 나로서는 집사 할아버지에게 살짝 미안해졌다.

대공이 날 안 챙겨서 아주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날 잊어 주면 더 좋고.’

어쨌든 대공이 돌아오지 않은 며칠 동안 나는 대공저에서 도망칠 방법을 고민했다. 큰 소득은 없었지만.

결국, 내가 택한 방법은 잘 안 보이는 곳에 조금씩 구멍을 파는 일이었다.

이름하여 ‘없던 개구멍 만들기’!

대놓고 땅을 파면 티가 날 게 분명하니 나는 일부러 룩스와 슈가에게 부탁해 흙 놀이를 하는 척했다.

겨울 양식을 비축하는 동물처럼 땅을 파서 그 안에 씨앗이나 나뭇잎들을 묻고 다시 흙으로 덮는 놀이를.

참고로 ‘슈가’는 며칠 전에 내가 하늘다람쥐에게 지어 준 이름이었다.

매번 하늘다람쥐라고 부르는 건 너무 긴 데다 룩스가 한 말이 시발점이었다.

―왜 누님에게는 이름을 안 지어 줘? 친구끼리는 이름 부르는 거라며. 누님은 우리와 친구가 아닌 거야, 찍?

―정말이야? 섭섭해! 나도 이름! 이름 지어 줘!

하늘다람쥐의 재촉에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슈가라고 지어 줬다.

배 부분의 털이 새하얀 게 설탕 가루 같아서였다. 다행히 슈가는 제 이름을 좋아했다.

어쨌든 같이 어울리는 상대가 동물들이라 그런지 다들 내가 땅을 파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히 파라며 모종삽까지 갖다줬지.’

덕분에 내 탈주로 확보는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틀 정도만 더 파면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오늘도 땅을 파러 가기 위해 하녀 언니들을 불렀다.

“샤비 온니, 첼시 온니.”(샤비 언니, 첼시 언니.)

“네, 아가씨.”

“룩스랑 슈가랑 나가서 놀고 시픈데 그래도 돼?”(룩스랑 슈가랑 나가서 놀고 싶은데 그래도 돼?)

“물론이죠.”

하녀 언니들이 일어나는 걸 보며 나는 룩스와 슈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둘이 자동으로 내 팔을 타고 올라와 품에 안겼다.

“모종삽을 가져가실 거죠?”

“네에.”

“해바라기씨랑 다른 씨들도 가져가실 거고요?”

“네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 언니들이 척척 내 놀이 짐을 챙겼다.

‘며칠 동안 나가서 흙 놀이를 한 보람이 있네.’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건 하녀 언니들뿐만 아니라 룩스와 슈가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땅에 파묻는 척하면 되는 거지, 찍?

‘응. 부탁할게.’

내게서 씨앗을 나눠 받은 둘이 담 주변으로 흩어졌고, 나는 모종삽을 들고 다니며 땅을 팠다.

* * *

그 시각, 벨로크 대공가의 집사인 더스틴은 나흘 만에 돌아온 제 주인을 반기고 있었다.

“일이 고되셨나 봅니다.”

“리슬리란테를 뒤집어 놨다고 시키는 게 많더군. 몇몇이 시끄럽게 짖어 대는 걸 달래느라 힘들었다고.”

“그래도 이렇게 돌아오셨으니 이번에는 저택에 오래 머무르시겠군요. 아가씨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아가씨?”

아시드가 장갑을 벗다 말고 더스틴을 바라봤다.

실로 생뚱맞은 말이었다. 이 저택에 그런 호칭을 들을 만한 이는 아무도 없을 텐데.

“전하께서 나흘 전에 딸로 삼았다며 데려오신 분 말입니다.”

“딸? 아아, 그 재밌는 은인 말이군.”

잠시 기억을 더듬은 끝에 해답을 찾아낸 그는 좁혔던 미간을 풀었다.

‘재밌는?’

한편, 더스틴은 언젠가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듯한 느낌을 받았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었지만.

“그러고 보니 신경을 못 썼군. 그 애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잘 계십니다.”

“말썽을 피우진 않았고?”

“예. 천성적으로 얌전하신 분인 듯하더군요.”

더스틴이 덧붙였다.

“요구하는 것도 별로 없고 투정을 부리는 일은 아예 없다고 합니다. 혼자서도 잘 놀고, 데리고 있는 동물들도 얌전해 샤비와 첼시가 모시기 수월하다고 하더군요.”

“샤비와 첼시?”

“제가 임의로 아가씨의 전담 하녀로 배정한 이들의 이름입니다.”

“그렇군.”

아시드는 의외라고 느끼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분명 사고를 쳤을 줄 알았는데.’

이곳에 데려다 놓은 뒤 나흘 동안 황제가 시킨 일을 하느라 여자애에 대해 깡그리 잊고 있었다.

집사가 말해 준 덕에 지금은 제가 데려온 아이에 대한 기억을 완벽하게 떠올린 참이었지만.

자신의 팔이 온전히 존재하도록 도와준 은인.

그 대가로 원하는 걸 말해 보라 했더니 하녀로 고용해 달라고 말해 황당해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떠오른 기억이 있어 아이가 원하는 걸 쥐여 줄 수 있었지만.

‘저는요, 늘 가족이 가꼬 시퍼떠요. 그리고 돈이 만코, 대단한 집안이었으면 조켔어요.’

‘그래야 제 칭구와 오래오래 함께 살 수 이뜰 테니까요!’

어눌한 발음으로 명랑하게 대꾸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힘도 없는 데다 어린 것이 귀부인을 물 먹여 입양을 피하던 모습이란.

그때의 기억이 워낙 인상 깊었던 터라 아시드는 여자애가 그 비슷한 사고를 쳤을 줄 알았다.

돌아온 대답은 그의 기대와 정반대의 것이었지만.

“그 애는 지금 뭘 하고 있지?”

“흙 놀이를 하고 계실 겁니다.”

“……흙 놀이?”

“하녀들이 말하길 흙 놀이를 그렇게 좋아하신다고 하더군요. 매일 나가 동물들과 함께 땅을 파고 덮길 반복한다기에 하녀들을 시켜 모종삽도 전해 드렸습니다.”

말하던 더스틴이 “아!” 하고 작게 소리치고는 창문 너머,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마침 지금도 나와 계시는군요. 보이십니까?”

그곳에는 벤치에 앉아 있는 젊은 하녀 둘과 구석에서 작은 동물들과 함께 있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보고받은 대로 흙 놀이를 즐기시는 모양이야.’

애니가 노는 걸 직접 눈으로 본 건 더스틴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다시 제 주인에게 시선을 돌린 찰나였다.

“꽤 귀여운 짓을 하는군.”

줄곧 무표정이던 아시드의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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