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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8화 (18/125)

#18

아주 찰나였지만, 우연히 그 미소를 목격하게 된 더스틴은 매우 놀랐다. 동시에 아시드가 모습을 감췄다.

사라진 제 주인의 모습에 더스틴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확인했다.

짐작대로 여자아이의 앞에 있는 아시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며 더스틴은 생각했다.

‘전하께서는 아가씨를 정말 좋아하시는구나.’

* * *

정신없이 땅을 파던 때였다.

―애니, 나 힘들어, 찍.

―나도…….

룩스에 이어 슈가가 조심스레 말했다. 예상했던 바이기에 나는 선뜻 말했다.

“그럼 그만하구 쉬어.”(그럼 그만하고 쉬어.)

―너는? 안 쉬어도 돼?

“응, 난 갠차나.”(응, 난 괜찮아.)

사실 거짓말이었다. 나도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해.’

아니, 버텨야 했다. 탈출은 내 의지에서 비롯된 거였고 내 일이었으니까.

내 말에 날 도와 땅을 파고 씨앗을 묻던 슈가와 룩스가 뒤로 벌러덩 누웠다.

‘미안하네.’

나흘 동안 묵묵히 날 도와준 만큼 절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그저 내가 원한다는 이유로 도와줘서 특히 그랬다.

‘이 고생도 곧 끝이지만.’

나는 하녀 언니들을 힐끔거렸다. 수다에 빠진 그녀들은 간간이 내 위치만 확인할 뿐, 내가 하는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설마하니 내가 도망치려고 담 밑에 구멍을 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해서인 듯했다.

덕분에 나는 땅을 정말 깊게 팔 수 있었다.

‘중간 점검차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다리만 넣어 볼까?’

막 구멍에 발을 밀어 넣던 그 순간이었다.

옆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어디선가 들어 본 음성이 들려왔다.

“뭘 하는 거지?”

이 목소리는, 설마……?

뻣뻣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돌려 옆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벨로크 대공이 팔짱을 낀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상했는데도 막상 대공과 시선이 마주치니 나도 모르게 몸이 튀어 올랐다.

“우왁!”

그러다 구덩이에 발을 넣어 뒀다는 것도 까먹고 일어나려다 뒤로 엉덩방아 찧었지만.

으아아, 아파!

“아, 아가씨, 헉! 주인님……!”

내가 순간적으로 내지른 소리가 제법 컸는지 하녀 언니들이 내 쪽을 바라봤다가 대공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벨로크 대공은 내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뭘 하는 거냐고 물었는데.”

대신 그렇게 물을 뿐.

“흐, 흑 노리하고 있었어요.” (흐, 흙 놀이 하고 있었어요.)

“흙 놀이?”

“네에. 룩스랑 슈가랑 가치 땅 파서 씨앗도 뭇꼬, 나문닢이랑 꼳도 뭇꼬 이써서요.”(네에. 룩스랑 슈가랑 같이 땅 파서 씨앗도 묻고, 나뭇잎이랑 꽃도 묻고 있었어요.)

헤헷.

나는 굳은 입매를 움직여 억지로 웃었다.

제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세요. 넘어가…….

“흙 놀이가 담 밑에 구멍을 파서 도망치는 걸 말하는 줄은 몰랐군.”

……줄 리가 없지.

벨로크 대공이 담 밑에 크게 파 놓은 구멍과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내 다리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이딴 짓을 하다니, 죽여야겠군.’이라며 날 베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스산한 웃음이었으니까!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하녀 언니들도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도둑은 힘들겠지만 내 딸은 드나들 수 있겠군.”

확인 사살에 가까운 핀잔까지!

완벽하게 내 계획을 꿰뚫어 보는 말에 나는 울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정말 슥삭! 될지도.

당연하지만 나는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살고 싶단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떤 이유를 대야 대공이 그냥 넘어가 줄까.

“왜 도망치려고 했지? 더스틴에게 부탁했으니 대우에 부족한 건 없었을 텐데?”

대공이 설핏 미간을 좁히더니 하녀 언니들을 바라봤다.

“아니면 저들이 널 괴롭히던가?”

흘긋, 바라보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 순간 하녀 언니들이 느낀 공포는 명확해 보였다.

“샤비 온니랑 첼시 온니는 그런 적 엄서요! 온니들은 제게 잘해 줘써요!”(샤비 언니랑 첼시 언니는 그런 적 없어요! 언니들은 제게 잘해 줬어요!)

왜 애꿎은 하녀 언니들 괴롭히냐! 죄는 나 혼자 지었다!

앗, 아닌가? 언니들이 모종삽을 갖다줬으니까.

비록 내가 이런 데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그런 거지만…….

“그럼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순간, 직감이 무언의 압박처럼 날 눌러 왔다. 여기서 그를 납득시켜야만 할 거라고.

후읍, 숨을 들이켠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벨로크 대공을 보며 눈에 힘을 줬다.

눈물아, 어서 나와라!

물론 내 속 외침과 달리 눈물은 한 방울도 안 나왔지만.

어쩔 수 없다. 말이라도 하자.

“이써요. 부족한 거.”(있어요. 부족한 거.)

“…….”

“아빠, 해 준댔자나요.”(아빠, 해 준댔잖아요.)

말하면서도 심장이 쿵쿵 뛰어 댄다.

괜히 이 말을 했다가 후회하는 건 아닐까.

오히려 지금 이 말을 해서 그의 화만 사게 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다. 돌이킬 수 없다면 확실하게 해야겠지.

“가족이라고 해뜨면서, 여기에 버려두고 안 왔자나요.”(가족이라고 했으면서, 여기에 버려두고 안 왔잖아요.)

말하고 나니 어째서인지 조금 서러워졌다.

내가 대공을 도운 건 그가 유진에게서 날 구해 줘서였다.

보상을 말하라는 말에도 난 단 한 번도 그의 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직 대공이 자기 멋대로 내가 바라는 걸 재단하고, 가족이 되어 주겠다며 데려왔을 뿐.

그리고 그가 한 일이란 날 휙 던져 놓고 가 버린 것이었지.

“내 아빠 해 준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미워요.”

아까 그토록 흐르라고 외칠 때는 죽어도 안 나오던 눈물이 조금씩 고였다.

계획대로 되었지만, 기쁜 마음보다는 억울함이 더 컸다.

지금은 그냥, 너무 화가 났으니까.

원하지 않는 곳에 난데없이 입양되었는데, 심지어 첫날부터 휙 버려지질 않나!

여기에 있기 싫어 도망치려니까 왜 도망치려고 했냐고 저렇게 눈을 치켜뜨며 살기를 풀풀 내뿜다니!

아저씨, 양심 있어요? 응?

어느덧 가득 고인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대공을 쏘아보던 나는 아차, 했다. 감정이 너무 앞서 나간 나머지 상대가 누군지 까먹었다!

어떡하지? 건방지다며 죽이려나?

한껏 마음을 졸이던 때였다.

“……그런가.”

어라?

나는 놀란 눈으로 대공을 바라봤다. 이렇게 쉽게 수긍할 줄 몰랐으니까.

“확실히 모두 내 과실이군.”

그렇죠? 아저씨가 잘못한 거 맞는 것 같죠? 그러니 그냥 도망가게 내버려 둬라. 응?

간절히 대공을 바라보던 때였다. 돌연 그가 내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더니 들어 올렸다.

“으헉!”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깜짝 놀라 바둥거리기도 잠시,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받쳐 주는 손에 나는 발버둥을 멈췄다.

그러자 날 보고 있되, 묘하게 비켜 나간 붉은 색 눈이 보인다.

기분 탓인가……? 왜 대공이 씁쓸해 보이지?

늘 무섭고 악당 대공이란 인식이 강했던 만큼 나는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아니야, 내 착각이겠지. 저 대공이 씁쓸해한다니? 그것도 날 보면서? 말도 안 됐다.

“앞으로는 최대한 널 챙기지.”

네, 네에?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동안 들려온 소리에 나는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제가 원했던 대답은 그게 아닙니다만?

“그러니 그만 울도록.”

뒤이어진, 예상치 못한 다정한 말에 나는 순간 바보처럼 ‘어라?’ 하고 굳었다.

대공이 내게 한 말이 믿기지 않았으니까.

지금 위로해 주는 건가?

“우는 아이는 질색이니까.”

……는 무슨! 역시 그럴 리 없지!

* * *

그러한 소동이 있고 나서 대공은 하녀 언니들에게 내 방이 어딘지 물어 직접 나를 데려다줬다.

더 하는 말도, 하는 것도 없이.

그 바람에 대공의 팔에 안겨 이동하는 내내 어색해서 힘들었더랬다.

‘마법도 잘 쓰는 인간이 왜 그때는 그냥 데려다줬나 몰라.’

대공답지 않은 대처에 멍하니 아까 일을 곱씹는데 룩스와 슈가가 내 무릎 위로 쪼르르 올라왔다.

―애니, 이제 어떡해, 찍?

‘뭐가?’

―그 무서운 인간한테 걸렸잖아.

―이제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찍?

그 말에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아까 대공에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외친 게 떠올랐기에.

―아빠 해 준댔잖아요, 찍!

―내 아빠 해 준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내가 사랑을 바라는 어리광쟁이인 줄 알 정도로 미친 헛소리였다.

아무리 위기를 모면하려 했어도 그렇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지금이라도 개구멍으로 도망칠까?’

제법 파 뒀으니 어떻게든 몸을 쑤셔 넣으면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는 안 되겠지.

대공한테 들켰으니 지금쯤 내가 열심히 판 개구멍은 막혔을 것이다.

설사 그대로라고 한들 지금 도망치면 하녀 언니들이 피해 볼 게 분명했다.

나는 살기를 잔뜩 흘리던 대공과 하얗게 질린 하녀 언니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솔직한 감상으로, 나는 내가 도망친다고 해도 대공이 별로 신경 안 쓸 줄 알았다.

‘그래서 하녀 언니들에게도 피해가 안 갈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제는 아니란 걸 알았다.

대공이 내가 도망치는 걸 못 보는 이유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차라리 하녀 언니들이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면 나도 모른 척했을 텐데.’

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녀들은 여전히 내게 친절했다.

지금도 흙 때문에 더러워진 날 씻기기 위해 따뜻한 물을 받으러 간 상태였으니까.

‘이렇게 된 거,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대공은 아직 날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어. 조금 큰 다음에, 돈을 모아서 나가는 거야.’

그때는 치밀하게 계획해 도망가야겠지만.

‘방법은, 천천히 찾아보자.’

막 그렇게 결심했을 때다.

―대공님 나빠! 정말 미워, 찍!

……방금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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