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20화 (20/125)

#20

“이러면 기억하나?”

붉었던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변했다.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

어?

순간 벼락처럼 어떠한 기억이 떠올랐다.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가 버린, 어느 왕국의 귀족이라던 외국인 남자가.

‘잘 봤다.’

그, 그럼 그 아저씨가 벨로크 대공……?

“드디어 생각났나 보군.”

입을 떡 벌린 나와 달리 대공은 덤덤하게 말하며 원래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진정할 수 없었다.

왜 대공이 내게 가족이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는지 이해되었으니까!

‘그날 본 게 처음이 아니었어!’

하나가 이해되니 그 뒤가 줄줄이 이해됐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모두 내가 자초한 거란 것도!

충격에 사로잡혀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데 대공이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걱정하지 말도록.”

무엇을?

“네가 있던 보육 시설의 원장은 죽었으니.”

앞서 받은 모든 충격보다도 더 충격적이고 경악하게 될 정도로 생각지 못한 소식이었다.

‘보육원 원장이, 죽었다고?’

그녀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증오하고 싫어했다. 악랄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소식은 너무나도 급작스러웠다.

“어, 어쩌다 주겄는데요?”(어, 어쩌다 죽었는데요?)

“감히 내 딸을 리슬리란테에 팔았는데 살려 둘 수 없지.”

대공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그가 쥐고 있던 나이프 손잡이가 종이 구겨지듯 휘어졌다.

‘저게 저렇게 휘어진다고?’

꿀꺽, 내 목울대도 움직였다.

저 분노가 날 향하는 게 아니란 걸 아는데도 무서웠다.

그런데 원장이 죽었다면…….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마리 언니는?

“저기, 대곤님.”(저기, 대공님.)

그때 대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저런 표정이지? 내가 뭘 실수했나? 아닐 텐데?

“날 부르는 건가?”

끄덕끄덕.

“……호칭을 고치는 게 좋겠군. 네 아빠가 되어 주겠다고 했는데 왜 대공이라 부르는 거지?”

그러니까, 지금 아빠라고 부르라는 거야?

대공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빠라고 부르도록.”

“네?”

“아빠.”

대공이 한 번 더 호칭을 정정해 줬다.

하지만 내 입은 그가 원하는 단어를 내놓지 못했다.

벨로크 대공을 ‘아빠’라고 부르라니!

현재 이 저택에서 나는 그의 입양 딸이었으니 대공의 요구는 무리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하여야 했는데…….

‘생각도 못 했어.’

게다가 나는 태어나고, 과거로 돌아와 대공을 만나기 전까지 쭉 고아였다. 당연히 아빠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선뜻 입이 떼어질 리가.

하지만 이런 내 망설임은 한껏 굳은 대공의 얼굴을 본 순간 사라졌다.

“아, 아빠?”

와, 말했다.

내 삶에 누군가를 이렇게 부르게 될 줄이야.

그것도 미친 살인귀라는 벨로크 대공을!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살고 싶은걸.

다행히 대공의 얼굴은 거기서 더 굳어지지 않았다. 그저 원래의 무심한 얼굴로 물을 뿐.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지?”

휴, 다행이다.

안도한 내가 조심스레 답했다.

“제가 이떤 보육원은 어떠케 되는지 궁금해서요.”(제가 있던 보육원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요.)

“새 원장이 오거나 철거되겠지.”

철거라니.

“거기에 애들이 남아 있는데도요?”

“애들은 다른 보육 시설로 옮기면 될 테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대수롭지 않아 하는 대공의 모습이 야속하게 느껴진다면 내가 내 주제를 모르는 걸까?

‘새 원장도 못된 사람이면 어떡하지? 아니면 원장을 할 사람이 없어서 철거되면 마리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다른 아이들은 그렇다 쳐도 마리 언니는 성인이었다.

지금까지는 예전 원장이 거두어 주고 있어 보육원에 있을 수 있었다지만 새 원장이 마리 언니를 내버려 두거나 다른 기관에서 받아 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심지어 언니는 원장 때문에 혀가 굳어 말도 못 하는 상태였다.

분명 일을 구하는 데도 지장이 있을 텐데…….

‘도와 달라고, 한번 말해 볼까?’

망설이며 탁자를 뚫어지게 보던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려던 때였다.

“주인님, 후식을 내와도 되겠습니까?”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하인의 물음에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 * *

‘들어줄 리 없지.’

나는 창밖을 보며 아까 일을 곱씹었다. 아침을 먹을 때는 잠이 덜 깨 잠깐 정신이 나갔던 게 틀림없다.

‘무슨 정신이었을까, 난.’

대공을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는 진짜 내 아빠가 아닌데 말이다.

‘과한 요구를 하면, 분명 날 귀찮다고 생각할 거야.’

지금 대공이 내게 베푸는 것들을 당연시하게 여기면 안 된다. 이건 잠깐의 변덕이니까.

그래도 마리 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좋은 새 원장이 와서 마리 언니가 계속 보육원에 있을 수 있길 바라는 것뿐이었으니까.

“하아…….”

―그렇게 여기가 싫어, 찍?

―우리가 나가서 땅 팔까?

응?

한숨 쉬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내 바로 옆으로 다가온 룩스와 슈가가 보였다.

평소 간식 바구니 안에 늘어져 있길 좋아하던 둘이었건만, 지금은 어딘가 비장해 보였다.

―우린 여기서 지내는 게 좋지만……. 힘들면 도망치자, 찍!

―맞아! 그 무서운 수컷 인간만 빼면 다 좋지만, 네가 싫으면 안 되지. 바구니에 간식도 가득하니까 땅 파서 나가자!

무슨 말을 하나 듣던 나는 곧 날 걱정하는 말이란 걸 알아차렸다.

나보다 자그마한 것들인데 이렇게 날 걱정해 주는 걸 보니 가슴이 찡해졌다.

‘그럴 필요 없어. 난 괜찮아.’

―정말?

‘응. 그러니 너희는 간식 먹어.’

나는 룩스와 슈가를 바구니에 다시 올려 줬다.

그러나 둘은 바구니에 담긴 견과류를 먹는 대신 내게 말했다.

―힘들면 언제든 말해! 간식 바구니 들고 도망가자, 찍!

―맞아!

“그래, 그래.”

* * *

벨로크 대공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그는 끼니를 먹어야 할 때마다 날 불러 함께 식사했다.

날 위한 건지, 아이용으로 제작된 의자까지 마련해서는!

대공은 나와 같이 밥을 먹어 주는 게 가족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 대공이 어렵고 무서운 내겐 그 시간이 힘겨웠다.

‘차라리 탈이라도 나면 아픈 걸 핑계 삼아 쉬었을 텐데.’

내 바람과 달리 이놈의 위장은 정말 튼튼했다.

체할 것 같단 느낌을 받으면서도 정작 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튼튼한 게 싫어질 줄이야…….’

그렇게 혼란과 불안 속에서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마리 언니에 대한 생각이 몇 번 났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만큼 최대한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었지만.

게다가, 내게 들이닥친 또 다른 시련 때문에 살짝 정신이 없기도 했다.

바로 대공이 밤마다 내게 동화책 한 권씩을 읽어 주러 온다는 것!

사건의 발단은 대공이 식사 중에 내 발음을 지적하면서부터였다.

“그 말투는, 일부러 그러는 건가?”

“……?”

처음에는 대공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대공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고, 나는 단 한 번도 내 발음이 이상하다고 여긴 적이 없었으니까.

“혀가 짧은 건지, 일부러 틀리는 건지 모르겠는 발음 말이다. ‘맛있다’를 ‘마이따’라고 발음하던데.”

하지만 제 입가를 툭툭 건드리며 말하는 대공을 보고 깨달았다.

내 발음에 이상이 있다는 걸.

부끄러움이 확 몰려왔다.

그동안 잘못된 발음인 줄도 모르고 말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대공이 짚어 주지 않았다면 남들 보기에 일부러 이러는 줄 알았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이,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에요! 진짜예요!”

“그렇다면 의사에게 한번 보이는 게 좋겠군. 발음 기관에 문제가 있을지 모르니.”

그길로 대공은 정말 벨로크가의 주치의를 불러 검사하게 했다!

“아가씨의 발음 기관은 정상이십니다. 걱정하실 건 없으십니다.”

“그런데 발음이 왜 저렇지? 저 나이가 되어서도 저러는 경우가 있나?”

“보통은 없긴 하지요. 아가씨처럼 아홉 살 때까지 그러는 경우는…….”

“아홉? 여섯이 아니라?”

“첫 검진 때 아가씨께서 직접 아홉 살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미간을 잔뜩 좁힌 대공이 날 위아래로 훑었다.

아무리 내가 잘 못 먹고 평균보다 작다지만 여섯 살이라니!

“아, 아홉 살 마자요.”(아, 아홉 살 맞아요.)

“……고기를 많이 먹여야겠군.”

내 소심한 반박에 대공은 그리 말하고는 다시 주치의에게 물었다.

“그래서 원인과 고칠 방법은?”

“제 추측이지만, 그저 학습이 늦으신 것 같습니다. 자주 대화를 하고, 책을 읽어 주며 많은 소리와 또렷한 발음을 들려주면 금방 습득하실 겁니다.”

“대화와 책이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대공이 하녀나 다른 사용인을 시켜 책을 읽어 주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대공, 본인이 밤마다 날 찾아와 책을 읽어 줄 줄은!

심지어 대화를 위해서인지 대공은 내게 그날 읽어 준 책에 대한 감상을 묻기까지 했다…….

혹시라도 말실수하진 않을까, 덜덜 떨며 며칠을 보내니 내 발음은 확연히 나아졌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어쨌든 하루에도 여러 번 대공을 만나서였을까?

여전히 그와 만난다고 생각하면 긴장되고 무섭긴 해도 처음만큼은 아니었다.

정말 우습게도 대공과 지내는 게 제법 익숙해진 것이다.

방금 대공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후식을 배불리 먹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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