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희번덕거리는 대공의 시선과 마주한 나는 얌전히 안겨 있기로 했다.
대공이 이렇게 하는 거 보면 괜찮겠지?
이복이긴 해도 어쨌든 둘은 형제지간이니까.
시종이 문을 열어 줬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복도가 한 번 더 나오며 끝에 또 다른 문이 보였다.
‘이중문이구나.’
이번에 나타난 복도는 그동안 걸어온 것보다 훨씬 짧았다. 몇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되었으니까.
두 번째 문을 지키는 사람은 없어서 대공이 직접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대공이 문을 열자 서류를 보던 은발의 남자가 안경을 벗고 일어났다.
그러자 남자의 눈 색이 확연히 돋보였다. 대공보다 더 어둡고 탁한 눈동자는 마치 적포도주색 같았다.
‘저 아저씨가 황제구나.’
정황상 황제일 것 같긴 했지만, 붉은 계열의 눈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복이라더니, 둘이 정말 다르게 생겼다.’
나는 황제를 빤히 바라봤다.
대공 쪽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해지는 매서운 인상이라면 황제 쪽은 살짝 온화하면서도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꽤 인물이 훤하고 눈 색이 붉은 계열이라는 것?
“앉으시죠, 형님. 그리고……. 그쪽이 형님께서 새로 들이려 한다는 수양딸인가 보군요.”
“네 요구대로 얼굴을 보여 줬으니 그만 가겠다.”
“채신머리없이 굴지 마시지요. 오랜만에 오셨는데.”
헉.
나는 숨을 들이켰다. 생각보다 격한 황제의 언사에 절로 대공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화내겠지?’
내 예상과 달리 대공은 황제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 눈빛이 너무 무서워 나는 숨이 턱 막혔는데 황제는 그저 넉살 좋게 웃었다.
대단한 깡이었다. 나라면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못 할 텐데.
“형님께는 평생 없을 줄 알았던 딸이 생겼는데 오래 구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딸이 네놈의 유희거리는 아닐 텐데.”
“숙부 된 처지에서 예뻐해 주려는 것뿐입니다. 우린 세상에 둘밖에 없는 형제 아닙니까?”
“…….”
“게다가 이 아이, 묘하게 레일라 누님을 닮은 것 같아 더 정감이 가는군요.”
레일라 누님……?
언젠가 한번 들어 본 듯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때였다.
머리 위로 대공의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닮았다.”
“안 닮기는요? 특히 눈 색이 닮았는데요. 오묘한 보랏빛 도는 푸른 눈이라……. 혹시 이 때문에 딸로 삼은 건 아니신지?”
황제가 말을 끝마친 찰나였다.
쨍그랑!
난데없이 황제의 뒤에 있던 커다란 창문에 금이 가더니 깨졌다.
벽면 한쪽 전체를 차지하던 창문인 만큼, 깨지는 소리도, 튀어 오르는 파편도 엄청났다.
나는 대공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일부나마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튀어 박힐 줄 알았던 것과 달리 나는 조금의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대신 다른 게 느껴졌다.
“……아빠?”
내 손등 위로 어떠한 액체가 뚜욱 뚝, 떨어져 소매를 적시는 느낌이.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대공을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붉은 핏줄기가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과격하시네요, 형님.”
유리 파편을 맞지 않은 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얇은 막을 맞고 튕겨 나간 것처럼 그의 주위에 유리 파편들이 자잘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형편없이 깨진 창을 통해 바람이 불어오고 조각들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는 기괴하기만 했다.
“고작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이러실 줄이야.”
“…….”
“그 성정을 좀 죽이라 여러 번 조언해 드렸던 듯한데 여전하시군요. 허락받지 않은 자가 황궁 안에서 마법을 사용하면 반발로 내상을 입는다는 걸 알고 계시면서도 마법을 쓰시다니요.”
종합해 보자면 대공이 화나서 마법을 썼는데 그 반동으로 이렇게 피를 흘린다는 건가?
도대체 ‘레일라’라는 사람이 누구기에, 이렇게까지…….
“이제 이렇게 귀여운 딸도 생겼는데 조심하셔야죠. 아, 어차피 레일라 누님처럼 만들 생각이라 상관없는 겁니까?”
어느덧 우리 쪽으로 다가온 황제가 나를 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뭐야, 기분 나빠.
“온 김에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다 가십시오. 그리고 형님께서 쉬시는 동안 조카님은 제가 준비한 선물을 보고 가면 되겠군요.”
“그만, 짖, 큭!”
대공이 입술을 달싹이자 들끓는 소리에 이어 핏줄기가 더 흘러나왔다.
“저런, 그 더러운 피를 제 조카님에게 다 묻힐 셈입니까? 우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군요.”
날 옮긴다고? 어디로?
“아,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안전한 곳인 데다 조카님을 위해 선물을 가득 준비해 둔 곳이니까요.”
“닥치……!”
황제가 손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나와 대공이 분리되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대공이 무어라 하고, 내가 눈을 딱 한 번 깜빡인 그 찰나였다.
“…여기가 어디야?”
나는 황제의 집무실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곳에 와있었다.
* * *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이 말만큼 지금 내 상황을 잘 나타내는 것은 없지 않을까?
나는 아주 호화스러운 방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주위에는 팔찌부터 시작해서 목걸이, 귀걸이, 원석, 금으로 만들어진 사자상 등 정말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방이 눈 아플 정도로 번쩍거렸다.
‘다 예쁘긴 한데…….’
나는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갑자기 모르는 곳으로 이동됐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낯선 곳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살짝 두려움이 몰려왔다.
벨로크 대공과 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황제는 무슨 생각으로 날 여기에 보낸 거지? 설마 이것들이 다 선물인가?’
황제가 날 이곳에 떨구기 전에 한 말들을 되짚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고, 의도가 이뿐이었다고 한다 한들 손대고 싶진 않았다.
조금 전에 본 황제는 너무 꺼림칙했으니까.
‘일단 나가자. 나가서 대공을 찾는 거야.’
벨로크 대공은 주관적으로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나는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문은 어디 있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내가 쥐고 있는 토끼 인형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잠깐, 인형이 움직여……? 인형이 움직, 일 리 없잖아!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들고 있던 토끼 인형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찌익!
들려오는 가냘픈 울음소리에 나는 멈칫했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인데?
설마 방금 움직인 게…….
“룩스?”
내 부름에 토끼 인형이 입은 옷이 들썩들썩하더니 곧 익숙한 모습의 생쥐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으, 죽는 줄 알았네, 찍…….
룩스는 꽤 힘들었는지 양발을 쭉 뻗어 벌리고 누웠다.
정말 룩스잖아?
“네가 왜 여기 있어?”
―애니를 따라왔지! 아니, 이제 베리인가, 찍?
“그걸 네가 어떠케……. 아니, 그보다 너, 슈가와 함께 저택에 있는 거 아니었어?”(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그보다 너, 슈가와 함께 저택에 있는 거 아니었어?)
―나도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누님이 널 혼자 보내기 불안하다고 쫓아가라며 미는 거 있지? 그래서 급한 대로 이 인형에 매달렸어, 찍.
“그럼 아까 슈가와 인사할 때 뭔가 빠뜨린 기분이 들었던 이유가…….”
룩스 때문?
내 시선을 받은 룩스가 “찍?”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궁금증을 해결했으나 속이 시원하기보다는 충격이 더 컸다.
룩스의 설명에 따르면 룩스는 대공저에서부터 계속 인형에 매달려 왔는데 내가 눈치 못 챘다는 거니까.
‘내가 그렇게 둔감하다고?’
말도 안 된다. 내가 그럴 리 없…….
‘그리고 다음에는 그런 걸 들고 오지 말도록.’
‘허가받지 않은 것은 원래 황궁에 데려오면 안 되니까.’
불현듯 아까 대공이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혹시 그 말을 한 이유가, 인형 때문이 아니라 룩스가 있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혹시 화났어? 내가 멋대로 따라와서, 찍?
“아니.”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인형과 룩스를 함께 들어 올렸다.
“잘 따라왔어.”
진심이었다.
홀로 대공을 찾아야 하는 줄 알았을 때 막막하고 무서웠으니까.
그런데 옆에 룩스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훨씬 안심되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이러지 마. 놀랐단 말이야.”
―알겠어, 찍!
씩씩하게 대답하는 룩스를 보며 나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룩스, 너 냄새 잘 맡아?”
* * *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찍.
나는 룩스의 지시에 따라 착실히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쭉 가면 돼, 찍!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지?”
―지금 이 룩스 님의 코를 의심하는 거야, 찍찍?
“아니, 그럴 리가. 그냥 확인차 물어본 거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전에 원장이 내게 수면제를 탄 스튜를 먹였던 사건 이후로 신뢰가 떨어진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기댈 게 이거뿐이라 어쩔 수 없이 부탁하면서도 의심했더니 바로 저렇게 질문한다.
‘이 생쥐는 날이 갈수록 눈치만 빨라지는 것 같단 말이야.’
지금 나는 황제가 날 떨어뜨린 방에서 나와 룩스와 함께 대공이 있는 곳을 찾는 중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대공이 있는 곳이나 황제의 집무실 위치를 물어봤을 것이다.
문제는, 주변에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걸까.
‘대체 어디다 날 던져 뒀길래 사람이 없지?’
분명 막 황궁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렸을 때라든가, 대공에게 안겨 가던 중일 때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 있다니!
‘혹시 황제가 일부러 사람들을 치웠나?’
그동안은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어 막연히 ‘높은 사람’이란 것 외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 본 황제는 생각보다 이상하고, 나쁜 놈이었다.
그렇지 않고야 처음 만난 나를 사람도 없는 곳에 떨궈 버릴 리 없지 않은가.
내가 평범한 어린아이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진짜 아이였다면 울고불고 난리 났을 것이다.
낯선 환경에 도움을 줄 사람까지 없으니.
‘와, 진짜 나쁜 놈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