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속으로 황제를 욕하며 걷는데 룩스가 물었다.
―애니, 아니, 이젠 베리라고 해야 하지, 찍?
‘상관없어.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그런데 왜 불렀어?’
―우리, 그 남자 인간을 찾으러 가는 거라고 했지, 찍?
‘응.’
―왜 그래야 해, 찍?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야 하냐니?’
―지금 널 감시하는 인간은 없는걸? 우리가 벗어나려고 했던 그곳도 아니니까 네가 원하던 대로 된 거 아니야, 찍?
‘그건 아니야. 아직 슈가가 저택에 있는걸?’
―누님은 알아서 탈출할 수 있을걸? 하늘을 날 수 있으니까, 찍.
‘슈가라면 그럴 수 있겠네. 하지만 지금 도망쳐도 소용없을 거야.’
―어째서, 찍?
‘대공이라면 우리를 찾아낼 테니까.’
―하긴. 그 인간이라면 그럴 거 같긴 하다, 찍.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은 말고 나중에 도망쳐야 해. 대공이 우리를 안 찾을 때.’
열심히 룩스에게 이유를 설명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다갈색 머리의 여자가 날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그대로 굳었다.
여자는, 말롱 자작 부인이었으니까.
그녀답지 않게 초라한 옷차림이었지만, 몇 번을 봐도 말롱 부인이 맞았다.
‘말롱 부인이 여기에 왜?’
내가 굳어 있는 사이 말롱 부인은 내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굉장히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날 보면서 저렇게 웃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가씨, 여기 계셨네요!”
게다가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고 공대까지 하다니?
지금 내 앞에 있는 말롱 부인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원래 내가 알던 자작 부인의 쌍둥이 자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내가 바로 반응을 못 한 사이 말롱 부인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황궁에서 시녀로 일하고 있는 조이 메를린 에반스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를 찾아 데려오라고 하셔서 이렇게 찾고 있었답니다. 금방 찾아 다행이에요.”
……거짓말.
이제야 말롱 부인이 짓고 있는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굳이 가명을 사용해 가며 친절한 척, 내게 접근하는 이유.
확실한 건 아니지만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침착하자.’
나는 말롱 부인을 올려다봤다.
아무리 그녀가 여자인 데다 귀하게 자랐다 한들 어쨌든 나보다 한참 어른이었다.
힘을 써서 충분히 끌고 갈 수 있을 텐데도 대공이 찾아오라고 했다는 핑계를 대고, 가짜 이름을 사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조용히 처리하길 원해서인가?’
나는 물끄러미 말롱 부인을 바라봤다. 답지 않게 사람 좋은 척 웃는 모양새가 같잖았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다 알아도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지금, 소리를 질렀을 때 누가 오기나 할까?
이대로 도망쳐도 마찬가지다.
금방 붙잡히겠지.
‘믿는 척 따라갔다가 방심했을 때 따돌리고 도망칠까?’
그래, 지금으로선 이게 좋겠다.
결단을 내린 나는 최대한 서글픈 척했다.
“아빠 보구 시퍼…….”(아빠 보고 싶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제가 대공 전하께 모셔다드릴 테니까요.”
“정말?”
“그럼요. 절 따라오세요.”
말롱 부인이 내게 손짓했고, 나는 그녀를 믿는 척 따라갔다.
‘그런데 룩스를 못 봤나?’
나는 토끼 인형에 매달린 룩스를 바라봤다.
말롱 부인을 보자마자 무의식중에 룩스가 안 보이도록 숨기긴 했지만…….
방금까지 토끼 인형 머리 위에 당당하게 올라타 있었던 만큼 신경 쓰였다.
못 봤으니 저러는 거겠지? 봤다면 저렇게 태연하진 않을 테니까.
나는 이전에 비명을 지르며 기겁하던 그녀의 행태를 떠올렸다.
‘룩스, 사람이 있으니 조금만 조용히 있어 줘.’
―나만 믿어, 찍!
한마디 한 룩스는 토끼 인형의 옷 속으로 숨어들었다.
“아가씨는 대공 전하와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으, 응?
갑자기 들려온 말에 나는 말롱 부인을 바라봤다.
“사실 아까 전하께서 아가씨를 안고 계신 걸 봤거든요. 정말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 같았어요.”
대공과 관련된 소문을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하다니, 역시 꿍꿍이가 있는 게 확실하네.
“응! 우리 아빠 착하고 좋아! 나한테 잘해 줘!”
“대공 전하가 착, 하하……. 그렇군요.”
짐짓 모르는 척하는 내 행동에 말롱 부인이 얼굴을 찡그렸다가 도로 폈다.
―베리, 베리, 찍.
‘응?’
―저 여자 인간 이상해. 그 무서운 남자가 있는 곳이랑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 찍.
‘정말이야?’
―확실해! 베리와 누님도 걸 수 있어, 찍!
아니, 이 생쥐가?
‘왜 네가 한 말의 책임을 나랑 슈가가 져야 하는 건데?’
―그야 난 소중하니까, 찍?
어이는 없지만, 덕분에 말롱 부인의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주위도 아까보다 수풀과 나무가 많아진 게……. 일부러 외벽 쪽으로 유인하는 건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려고?
‘좋아, 지금부터 따돌리자.’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야, 아…….”
“아가씨? 왜 그러세요?”
나보다 앞서가던 말롱 부인이 순식간에 뒤돌아 내게 왔다.
하지만 말로만 날 걱정스러워할 뿐, 정작 내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아 주지는 않고 날 내려다만 봤다.
“배 아파. 화장실 가고 시퍼…….”(배 아파. 화장실 가고 싶어…….)
“그러셨군요. 조금만 참으세요. 거의 다 왔으니까요.”
“너무 아파. 못 걷겠어……. 화장실…….”
나는 필사적으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눈물도 나와 주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대신 나는 근처에 있는 화단을 가리켰다.
“조오기에 잠깐 들르면 안 돼? 금방 해결할 수 이써.”(저기에 잠깐 들르면 안 돼? 금방 해결할 수 있어.)
“…….”
“진짜 금방 할 수 있는데…….”
내 읊조림에 말롱 부인이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경멸감을 숨기려는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갔다 오세요. 대신 약속대로 금방 와야 해요. 알겠나요?”
좋아, 고비는 넘겼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화단으로 향했다.
화단은 내 생각보다 수풀이 꽤 우거져 있었다.
‘다행이야. 이러면 내가 뭘 하는지 잘 안 보일 테니 시간을 벌 수 있겠지.’
등을 돌리고 쭈그려 앉은 나는 조심스레 내 턱 밑에 있는 모자의 리본을 풀었다.
그리고 벗은 모자를 내가 앉았던 높이와 비슷하게 화단에 걸친 뒤, 최대한 몸을 숙였다.
‘룩스, 내 몸에 올라타.’
―인형은 어쩌고, 찍?
‘여기에 버리고 갈 거야.’
당장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 저 인형은 짐일 뿐이었다. 크기도 크고, 무거웠으니까.
―탔어, 찍.
‘잘 붙어 있어.’
룩스가 내 몸에 옮겨 탄 걸 확인한 나는 화단 밑을 엉금엉금 기어갔다.
“아이참, 빨리 끝내야 하는데 얘는 왜 여기서…….”
중얼거리는 말롱 부인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제법 거리가 벌어진 듯했을 때 나는 벌떡 일어나 달렸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말롱 부인은 아직도 눈치 못 챈 듯했다.
눈치챘다면 내가 모자를 얹어 둔 화단만 계속 보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날 쫓아왔을 테니까.
모자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녀 언니들, 고마워요.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숨이 차고 또 찰 때까지.
“헉, 허억…….”
아까 화단이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야 달리는 걸 멈추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괜찮아, 찍?
“으, 응. 괜, 헉, 찮아.”
나는 확확 타오르는 듯한 목을 붙잡았다.
사실 하나도 안 괜찮았다. 가뜩이나 어려져 다리도 짧은데 긴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으니 괜찮을 리가.
되도록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쉬고 싶었지만, 길도 모르는 데다 다른 사람을 찾을 때까지 달릴 정도의 체력은 없었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
나는 작은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숨을 돌리고 있자니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이게 다 황제 때문이야!’
갑자기 날 이상한 곳으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리고 안전한 곳이라더니 지금 이게 뭐야?
―베, 베리, 찍…….
‘응?’
―냄새가 나. 아까 그 인간 여자 냄새, 찍.
“뭐? 어디?”
―네 위…….
룩스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꽉 붙들었다.
“찾았다.”
“으읍……!”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가느다란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비록 얼굴은 안 보였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말롱 부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망할 계집애! 날 고생하게 만들어?”
순식간에 몸이 끌려 나왔다.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쳐 보지만, 조금도 소용이 없었다.
―이! 베리를 놔, 찍!
“꺄악!”
룩스가 달려들어 말롱 부인의 손을 깨무는 게 보였다.
비명과 함께 날 잡아끌던 손아귀 힘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도망쳐, 찍!
“악!”
“이년이! 어딜 가려고!”
하지만 미처 뛰기도 전에 말롱 부인이 내 치마 끝을 붙잡아 당겼다.
나는 철퍼덕 앞으로 넘어졌다.
말롱 부인이 제 손을 털어 내고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노려봤다.
“그래. 그때 생쥐랑 어울린다고 했었지? 역시 네가 맞네. 맞아.”
“무, 무슨…….”
“걱정하지 말렴, 얘야. 금방 끝내 줄 테니. 한 방울만 삼키면 된단다.”
그녀가 옷깃 사이에서 목걸이를 찾아 끌러 냈다.
작지만 액체 몇 방울 정도는 충분히 담을 수 있을 크기의 병이 달린 목걸이였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나는 도망치려 했지만, 금세 붙잡혔다.
말롱 부인이 내 턱을 움켜쥔 채 병의 뚜껑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