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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27화 (27/125)

#27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제 신세가 이렇게 변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만큼 모든 게 우발적이었다. 아니, 실은 어느 정도 직감은 하고 있었다.

그 시작은 평소 나가던 다과회에서 나눈 귀부인들의 대화에서부터였다.

“그 얘기 들으셨어요? 글쎄, 벨로크 대공에게 딸이 생겼대요.”

“딸이요? 설마 친딸인가요?”

“그럴 리가요. 비록 비전하……. 음, 이젠 비전하가 아니죠. 어쨌든 그분께서 출산이 임박하셨다고는 하나 아이가 태어났단 얘기는 못 들었는걸요. 그 사건 때 함께 죽었겠죠.”

“어머나, 꼭 그분께서 낳은 아이란 보장은 없잖아요? 꽤 오래전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 벨로크 대공이라고요. 어느 여자가 미쳤다고…….”

“그건 그러네요. 그래서 그 애의 정체가 뭔지 아시나요?”

“뭐라더라, 평민 고아래요.”

“세상에, 평민 고아라니! 어쩌다 그랬대요?”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지만, 사실 알 필요가 있나요? 중요한 건 대공께 딸이 생겼다는 거죠.”

말을 꺼낸 귀부인이 웃으며 부채질했다.

“듣자 하니 브리엔츠 보육원 출신이라던데…….”

“어머, 브리엔츠 보육원이라면 말롱 부인의 아버님이신 셰인트 백작님이 후원하시는 기관 아닌가요?”

“그러게요. 어쩌면 대공이 셰인트 백작가에 고맙다고 인사할지도 모르겠네요.”

말롱 자작 부인은 차를 마시다 말고 그대로 차를 뿜을 뻔했다.

“브리엔츠 보육원 출신이라고?”

그녀에게 물은 귀부인의 말대로 브리엔츠는 셰인트 백작가의 후원을 받는 보육원이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 뿐, 암암리에 아이들을 거래하고 있었지만.

물론 말롱 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는 걸 넘어서서 남용했다.

‘그게 그들의 운명인 것이지.’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애초에 부유하고 좋은 부모를 만나 태어났으면 될 일이 아닌가?

어쨌거나 브리엔츠 보육원의 원장은 조금이나마 가문의 이득에 이바지하는 기관이었다.

‘몇 주 전에 원장이 괴한에게 피살당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원장을 고깝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히 평민 주제에 날 욕보이다니.’

이전에 보육원을 방문했을 때 생쥐와 벌레로 곤욕을 치렀던 걸 떠올리면 아직도 끔찍했다!

나중에 원장이 자신을 욕보인 아이는 리슬리란테에 팔아 버렸으며, 대신 하녀로 쓸 아이를 보낼 테니 화를 풀어 달라며 사과하긴 했다.

지금 보낸 하녀는 말을 못 하는 데다 자기가 이것저것 시키던 아이이니 그녀의 마음에 들 거라면서.

들어온 선물이니 받긴 했지만, 고작 평민 하나를 받은 거로 마음이 풀릴 리가 없었다.

그랬던 만큼 말롱 부인은 누구보다 원장의 소식이 달가웠다.

그런데 대공의 딸이 브리엔츠 출신이라니……?

‘설마 원장의 죽음이 벨로크 대공의 짓인가?’

의문이 확신으로 바뀐 건 오늘 황궁에서 대공이 안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면서였다.

‘그 애잖아?’

귀머거리 주제에 외양이 제법 귀엽게 생겨 데려가려고 했더니 사실은 거짓이었으며, 제게 생쥐를 언급했던 아이 말이다.

자신에게 수치를 안겨 준 아이를 보고 나니 살이 떨렸다.

그러다 대공을 보니 다른 의미로 살이 떨렸다.

‘정말 그 괴한이 벨로크 대공이라면, 위험해.’

평범한 괴한이 벌인 일인 줄 알았을 땐 그저 그 원장이 재수 없었겠거니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벨로크 대공의 짓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리슬리란테를 박살 낸 게 대공이라고도 했던 것 같아.’

그 뒤에 브리엔츠 보육원의 원장이 피살당했으니…….

설마, 그게 다 저 아이 때문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더없이 무서워졌다.

만약 원장이 제게 보낸 편지를 대공이 알게 된다면?

저 아이가 리슬리란테에 넘겨졌던 게 자신 때문이란 걸 알게 된다면?

대공이 여태껏 저를 살려 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원장을 죽임으로써 끝났다고 여겼거나 아직 자신이 그 일의 원인이었다는 걸 파헤치지 못했거나.

‘저 아이가 날 알아보면 끝이야!’

지금까지야 운이 좋았을 뿐, 저 아이가 대공녀가 된다면 언젠가 인사하러 가야 할 때가 있을 터였다.

지금이야 자신을 기억 못 하는 듯하지만, 나중에라도 기억해서 “저 사람 때문에 리슬리란테에 갔어요!”라고 말한다면?

그 뒤를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리해야 해. 빨리.’

말롱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항상 걸고 다니던 목걸이를 쥐었다.

암흑 시장에 손을 대는 셰인트 백작을 아비로 둔 딸답게 그녀는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늘 목걸이에 독약을 넣고 다녔다.

한 방울을 먹으면 심장을 제외한 온몸의 근육이 굳고, 세 방울을 먹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아주 극악한 독약이었다.

‘죽이면 대공이 의심할 테니, 한 방울만. 더도 말고 딱 한 방울만.’

온몸이 굳으면 자신을 알아보더라도 지목하진 못하리라.

결심한 말롱 부인은 여자아이가 대공과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다만, 주변 목격자를 방지하고자 그녀는 일부러 제 하녀와 옷과 장신구를 바꿨다.

하녀복을 입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귀부인의 옷차림은 너무 눈에 띄었다.

벙어리에다 눈치까지 없는 하녀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싶어 객실에 대기시켜 놓고 나온 말롱 부인은 황제 궁 주변을 서성였다.

대공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가는 방향이 황제 궁이란 걸 알아서였다.

제 원래 신분으로도 황제를 알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라 들어가진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도는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기회는 찾아왔다.

어찌 된 일인진 모르겠지만, 그녀는 대공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는 여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외진 곳에 데려가 수월하게 처리할 생각이었거늘…….

“왜 그랬어?”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미성이 물었다.

말롱 부인은 직계 황족의 상징인 붉은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황태자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올해 열한 살인 황태자, 카드릭은 어느 대가가 혼신을 기울여 깎아 만든 천사상처럼 아름다운 외양이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이가 자신을 그저 쳐다만 보면 무섭기는커녕 그 외모에 빠져드는 게 정상일 테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에 카드릭은 그녀를 죽이러 온 사자처럼 보였다. 그만큼 오싹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까 걔, 죽이려고 했잖아. 아, 이거부터 물을 게 아니라 그 머리끈의 주인이 어딨는지부터 물어야 하나?”

“주, 죽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해치려고 했다고 해 둘까. 별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욱하는 마음에 외쳤지만, 그 뒤에 들려온 황태자의 말에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반박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 질문들에 대한 답은?”

“…….”

“난 두 번 묻는 걸 아주 싫어하는데 오늘 이 짓을 여러 번 하네. 한 번은 아까 걔, 그리고 지금은 너.”

황태자의 목소리는 내용만 모른다면 상냥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곤조곤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위압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마지막이야. 머리끈의 주인은 어디 있지?”

“머, 머리끈의 주인은 제 하녀인데 손님용 객실에 있습니다.”

“그럼 아까 걔를 해치려고 한 이유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롱 부인은 굳건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황태자가 무섭다 한들 이건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대공의 수양딸이 저로 인해 리슬리란테에 넘겨졌단 사실을 알게 된 대공이 제게도 보복할까 두려워 해치려고 했다는 걸.

‘어차피 죽을 거라면 대공보다는 황태자가 나을 거야. 아이에 불과하니 덜 잔혹하겠지.’

말롱 부인은 은연중 카드릭의 어린 외양에 방심했다.

제 어깨를 지져 버린 장본인이 눈앞에 있는 어린아이라는 것도 잊은 채.

“그래? 사실 난 그게 제일 궁금했거든. 그런데 말 못 한다니 유감이네.”

미소를 띠고 있으나 그 눈빛만큼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제야 말롱 부인은 아차, 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니면 내가 아직 어려서 우습게 여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카드릭의 뒤로 아까 사라진 줄 알았던 불새가 나타났다.

“죽지 않을 만큼만 조금씩 태우면 실토하겠지.”

“자, 잠……!”

“피닉스, 저 여자의 발끝부터 조금씩 태워.”

고개를 끄덕인 불새가 말롱 부인에게 날아들었다.

살이 타는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잔혹한 광경인데도 카드릭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끔찍한 고통에 말롱 부인은 조금 전의 자신을 저주했다.

아이에 불과하니 대공보다 덜 잔혹할 거라고?

‘아니야. 오히려 더…….’

그녀는 자신의 오만이자 태만의 결과를 지독하게 맛봐야 했다.

* * *

카드릭은 서늘한 시선으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자작 부인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우렁차게 비명을 지르더니, 이제는 그럴 힘조차 없는지 그녀는 쉰 목소리로 고통의 신음만 흘리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마, 말하, 겠, 부디, 자비를…….”

우스운 것은 피닉스에게 명령한 지 고작 수 초밖에 안 지났다는 것이다.

이 정도 고통도 감당 못 할 거면서 제 궁에서 이따위 일을 벌이다니.

퍽 가소로웠으나 카드릭은 손을 들어 제 불새를 멈추게 했다.

“그만, 피닉스.”

―삐이이…….

제 주인의 잔혹한 성정을 닮은 불새가 불만을 담아 울었다.

아직 성년이 안 된 불새는 따로 전언을 보낼 수 없어 작은 불꽃을 뿜어내는 게 전부였지만.

“이제 말해.”

자작 부인은 잠시 신음하다 천천히 입을 열어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카드릭은 자신이 들은 내용을 정리했다.

“벨로크 대공이 널 죽이고 네 가문에 보복할까 봐 무서워서 그 애의 온몸을 굳게 만들려고 했다? 이 독약으로?”

“네, 네…….”

카드릭은 말롱 자작 부인에게서 뺏은 목걸이를 든 채 물었고, 자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싱거운 이유였네.”

픽, 웃은 카드릭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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