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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30화 (30/125)

#30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끌어낸 것은 베로니카였다.

이것만 봐도 아시드가 베로니카를 어떻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보라.

“너무 쉽게 죽인 것 같아 후회되는군. 끔찍한 고통을 선사해 줬어야 했는데.”

저렇게 아가씨를 챙기지 않나.

제 주인의 유해진 모습에 덩달아 무의식적으로 풀어진 더스틴이 입을 열었다.

“이…….”

이미 지나간 일이잖습니까?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던 그는 황급히 말을 삼켰다.

아시드가 ‘과거’를 지나간 일 따위로 치부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건만, 감히 과거를 운운하려 하다니.

감히 용서받지 못할 실수였다.

말을 끝마치지 않아 다행이다.

더스틴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요령껏 말을 돌렸다.

“이, 이제라도 잘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

“그렇지! 이건 어떠십니까? 전하께서 아가씨의 생일을 정해 주시는 겁니다!”

“내가 생일을?”

“그렇습니다. 생일을 모른다면 새로 챙겨 주면 되지요.”

“…….”

“아, 안 좋은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바꿔 주는 겁니다. 날짜는 기념적인 날이 좋을 테니 아가씨와 전하가 처음 만난 날을 생일로 정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날은 이미 몇 주 전이라 연회를 못 할 텐데?”

“꼭 연회를 생일 당일에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요. 내년부터 당일에 하고, 이번은 예외로 연회를 준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

“시일이 너무 지나면 안 되니 최대한 이른 시일 내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더스틴은 한껏 긴장했다.

‘역시 내 실수를 눈치채셨나.’

요즘 아시드의 분위기가 풀어졌다고 하나 그의 광증은 맹수의 본성과 같았다.

지금은 발톱을 숨기고 있어도 언제 이를 드러낼지 몰랐다.

숨 막히는 시간이 흐른 끝에 드르륵,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와 함께 아시드가 일어났다.

저벅, 저벅.

한 발자국씩 제게 다가오는 아시드의 모습이 이토록 무서울 수 없다.

그의 손짓 한 번이면 자신은 단박에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이리라.

고작 이런 실수를 했다고 죽이겠느냐고 기대를 품는 것조차 오만이자 사치였다.

아시드가 ‘과거’에 집착하는 광기를 알고 있었으니까.

또한, 그 과거가 그를 얼마나 끔찍하게 괴롭히는지도.

가까이 다가온 아시드가 손을 들어 올렸을 때, 더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수 초가 지난 끝에 더스틴의 어깨에 닿은 것은 마법이 아닌 아시드의 손이었다.

“이번은, 넘어가지. 내게 좋은 방안을 가르쳐 줬으니.”

아시드가 더스틴의 어깨를 만졌던 손을 떼어 내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와중에도 더스틴은 반사적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저, 전하? 어디에 가십니까?”

“베로니카에게.”

문이 닫혔다.

뚜벅뚜벅 멀어져 가는 소리를 들으며 더스틴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유지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다시 생각했다.

‘전하께서는 아가씨를 정말 아끼시는구나.’

* * *

겨우겨우 식사를 마쳤지만,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먹은 것들을 모두 게워 냈다.

이전에는 이런 적이 없어 튼튼하다 자부했는데 오늘만큼은 정말 아니었던 모양이다.

속을 비운 뒤 힘이 빠져 비틀거리는데 하녀 언니가 받아 줬다.

쉬라는 권고에 따라 침대에 누워 있는데 다른 하녀 언니가 다가와 내게 컵을 내밀었다.

“따뜻한 꿀물이라도 드세요. 우유는 지금 드시면 더 안 좋으실 것 같아서 꿀물로 타 왔어요.”

“으응, 고마워.”

하녀 언니들은 내가 몸을 일으켜 찬찬히 꿀물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려 줬다.

컵을 돌려주자 그녀들은 내 등과 손을 토닥여 주고는 이만 쉬라며 방을 나갔다.

내가 침대 헤드에 기대고 있던 몸을 내리며 이불을 끌어당기자 슈가와 룩스가 내 주변으로 달려온다.

―괜찮아, 찍?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별거 없었어. 그냥…….”

갑자기 대공이 식탁을 부쉈지.

그래서 눈치 보며 밥을 먹다 체했고.

목 끝까지 그 말이 치솟았지만, 날 잔뜩 걱정해 주는 룩스와 슈가를 보니 말이 안 나왔다.

갑자기 억울해지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머릿속에서는 대공이 보인 반응이 떠나질 않았지만,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웃었다.

“그냥, 아까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급하게 먹었더니 체했나 봐.”

―맛있는 걸 먹었는데 어떻게 다 뱉어 낼 수 있어, 찍?

―씨앗 먹다가 목에 걸려서 도로 뱉어 내 본 적 없어?

―당연히 있지, 찍!

―그거랑 비슷한 거야.

슈가의 말에 룩스가 “찍!” 하고 감탄했다.

―이해했어! 누님은 천재야, 찍!

―뭘 이 정도로. 그런데……. 누가 오는 것 같지 않아?

‘하녀 언니들이 아직 안 돌아간 거 아니야?’

―그 여자 인간들도 주변에 있긴 한데, 다른 소리가 더 들려.

슈가의 말에 룩스도 옆에서 두 앞발을 든 채 코와 귀를 쫑긋거렸다.

―이 냄새는! 무시무시한 남자 거야, 찍!

뭐?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게 룩스는 이전부터 대공을 ‘무시무시한 남자’라고 말하고는 했기에.

‘책을 읽어 주려고 오는 건가?’

날 생각해서 해 주는 행동이란 걸 안다.

하지만 오늘은 몸 상태도 안 좋고, 대공을 보고 싶지 않았던 만큼 싫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맞다! 아까 나중에 먹겠다고 아껴 뒀던 아몬드가 떠올랐네. 난 그거 먹으러 이만, 찍!

―나도! 나도 급한 일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네!

룩스와 슈가는 누구도 안 속을 정도로 당치 않은 이유를 대고는 순식간에 자리를 비웠다.

저 배신자들!

같이 있어 주지 못할망정, 도망치다니!

평소에도 대공이 오면 둘은 숨어 있고는 했기에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몸 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배신감이 들었다.

인기척이 한껏 가까워졌다.

‘어떡하지? 오늘은 정말 싫은데.’

이불만 꼭 쥐고 있는데 문 너머로 하녀 언니들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저, 전하. 죄송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지금쯤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잔다고?”

“예.”

와! 하녀 언니들, 최고!

나는 저 말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잠시 일으켰던 몸을 도로 눕혔다.

눈을 감고 최대한 귀를 쫑긋거리니 아까보다 바깥 소리가 더 선명히 들려왔다.

“그런가? 알겠다.”

잇따라 대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좋아, 이제 돌아가겠지?’

막 그렇게 안심하는 찰나, 뒤이어 들려온 대화는 날 경악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전하? 왜 아가씨의 방 쪽으로 가시는…….”

“얼굴만 보고 돌아가지.”

아, 내 얼굴만 보고……. 응? 내 얼굴을 보고 가겠다고?

끼이익―.

놀란 내가 어깨를 움찔 떨었을 때, 문이 열리더니 대공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 대체 왜 들어오는 건데!

자고 있다잖아!

눈을 감고 있는 관계로 보이는 건 없었지만, 어쩐지 대공이 날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미 모를 시선이 살짝 부담스럽다.

내가 숨을 참고 애써 잠든 척하던 때였다.

부스럭, 옷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코 밑으로 무언가 닿았다.

아마도 대공의 손인 듯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숨 쉬도록. 안 자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흐억!

정곡을 찌르는 말에 곧바로 눈이 떠졌다.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램프에 비친 대공의 얼굴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 안 자고 있었군.”

“자고 있었는데 방금 막 깬…….”

“그래. 숨도 안 쉬고.”

틀렸다. 뭘 말하든 안 통할 거야.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변명하는 걸 관뒀다.

입을 다물어 버리는 걸 택하자 머리 위로 픽,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대공을 바라봤으나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방금 분명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던 건가?

“물어볼 게 있었는데, 안 자고 있어 다행이군.”

물어볼 것? 나한테?

나는 내 침대에 앉아 나와 시선 높이를 맞추는 대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히 좋아하는 날이 있나?”

“네?”

“좋아하는 날 말이다. 이를테면 네 생일로 정해도 될 것 같은.”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래?

눈을 깜빡이는데 아까 저녁을 먹다가 대공이 내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던 게 떠올랐다.

갑자기 화를 내서 깜빡 잊고 있었지만.

물론 나는 아직도 대공이 그때 왜 화를 냈는지 모른다.

“제 생일을 정하는 거예요?”

그래도 지금은 설렘이 더 컸다.

“맞다.”

“정말이에요? 정말 제 생일을 정한다고요?”

“그래.”

같은 질문이 귀찮을 법도 한데 대공은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해줬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비교적 다정한 태도였다.

‘내 생일이라니!’

기쁜 마음에 심장이 콩닥거리고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대공과 눈을 마주하고는 아차 싶어 표정을 관리했지만.

“그래서 좋아하는 날이 언제지?”

“으음.”

딱히 없는데 어쩌지?

그렇다고 너무 오래 고민하면 싫어할 텐데.

“없나?”

“잘, 모르겠어요.”

대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또 뭔가를 잘못 말했나?’

슬그머니 대공의 눈치를 보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더스틴은 우리가 처음 만날 날을 생일로 정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군.”

대공과 처음 만난 날?

나쁘진 않은 권유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대공이 내 아빠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첫 만남을 기념하는 게 낫기야 하겠지.

문제는…….

“이미 몇 주 전인데요?”

대공과 내가 만난 날은 꽤 되었다는 것.

“그래도 생일 연회는 열 수 있지.”

보통은 그날에 축하해 주지 않나?

“싫은 건가?”

도리도리.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좋아하는 날도 없던 참이다.

집사 할아버지가 권유한 날에 맞추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네 생일은 정해졌으니 남은 건 생일 선물이군. 뭘 갖고 싶지?”

“선물이요?”

“그래.”

선물. 음, 내 선물.

열심히 생각했으나 딱히 생각나는 건 없다.

‘당연한가?’

생일을 기념하거나 무언가를 욕심내 본 적이 있어야 말을 할 테니까.

“무엇이든 구해다 주지. 갖고 싶은 것과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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