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아가씨도 놀라셨죠?”
첼시 언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후후, 웃었다.
어째 언니가 예상한 이유와 내가 놀란 이유는 다른 종류인 듯했지만.
“저, 정말 황태자가, 온대?”
“그렇다니까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네. 확실해요. 집사님과 하녀장님이 직접 말씀하셨거든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오신다고 하니 철저히 준비하라고요.”
“그래서 다들 더 바빠졌죠.”
첼시 언니에 이어 샤비 언니까지 거들어 말했다.
‘황태자가 온다니!’
나는 비명을 빽 지르고 싶어졌다.
만약 하녀 언니들이 없었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왜, 왜 오는 거래?”
“그야 아가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겠죠? 생일 연회잖아요.”
“이제는 사촌이기도 하니 신경 쓰시는 걸지 모르고요.”
사촌? 아, 그러네.
벨로크 대공은 현 황제의 이복형이었다.
그리고 나는 대공의 수양딸이니 황태자와 사촌이 되는 셈이다. 비록 피는 조금도 안 섞였지만.
‘황태자가 온다니.’
이런 걸 신경 쓸 위인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지?
자의인지 타의인지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황태자’라는 그 아이, 존재 자체가 불편하고 무서웠다.
심란한 나와 달리 하녀 언니들은 상당히 신난 듯했다.
내 생일 연회가 성대하게 열릴 것 같다느니 황태자가 가져올 선물이 기대된다느니 한참 떠들었다.
“그럼 쉬세요, 아가씨.”
스튜를 다 먹자 하녀 언니들이 내게 이불을 덮어 주고 돌아갔다.
“황태자…….”
홀로 남게 되어 멍하니 읊조리던 나는 이불을 움켜쥐고 발버둥 쳤다.
으아, 만나기 싫은데!
대체 내 생일 연회에는 왜 오는 거야!
―베리, 베리. 황태자가 뭐야?
슈가가 협탁에서 내 옆으로 포르르 날아와 안착하며 물었다.
“음, 황제의 아들이야.”
―황제?
“가장 높은 사람을 말하는 거야. 인간들의 대장 같은 거.”
―아하! 그러니까 황태자는 인간 대장의 아들이라는 거구나?
“그런 셈이지.”
―대장의 아들이면 좋은 거 아니야? 믿음직스럽고, 찍.
“보통은 그런데 황태자는 좀 무서워서……. 룩스는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걸? 같이 봤으니까.”
―내가, 찍?
―뭐야! 너 아까는 모른다면서!
―오, 오해야! 난 정말 몰라, 찍!
룩스가 방방 뛰며 부정했다.
―쟤 진짜 모른다는데?
“정말 기억 안 나? 황궁에 갔을 때 봤는데. 불새랑 어떤 은색 머리 남자애.”
―불새라면, 이전에 널 비웃은 빨간 새를 말하는 거야, 찍?
“으응.”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룩스의 말로 인해 나도 그때 상황을 상기하게 됐다.
불새에게 비웃음당한 기분이란, 정말이지…….
“어쨌든, 난 황태자가 무서워.”
―무서운 수컷 인간보다 더?
“……비슷한 것 같아.”
짧은 고민 끝에 내가 대답했다.
아무렇지 않게 말롱 부인을 불태우라고 명령하고 왜 자신을 막느냐고 쏘아보던 눈빛은 지금 떠올려도 충격이었다.
게다가, 대공과 황제는 사이가 나빠 보였다.
일방적으로 대공이 엄청나게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황제가 내게 한 짓을 떠올리면 대공이 싫어하는 게 이해는 됐다.
그런 황제의 아들인 황태자와 잘 지내서 좋을 건 없겠지?
대공이 반역할 때, 죽을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이 어떻든 연회에 온다니 피하긴 그른 듯하지만.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맞아, 찍! 누님과 내가 지켜 줄게! 우린 못생긴 남자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도 빠져나왔는걸, 찍!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외치는 두 설치류 덕분에 나는 심란한 마음을 뒤로하고 웃을 수 있었다.
* * *
하녀 언니들의 우려 속에서 푹 쉰 덕분일까.
나는 언제 감기에 걸렸냐는 듯 팔팔해져 예정대로 가정 교사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글레나 자작가의 세이디 글레나입니다. 공녀님을 가르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가정 교사는 처음이라 나는 살짝 긴장한 상태로 인사했다.
글레나 부인은 젊고 세련된 여성으로 작은 동작에서도 우아함이 묻어 나왔다.
대공저는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잘도 저런 사람을 구해 왔네.
“글과 기본 교양, 예절, 역사, 피아노를 가르칠 겁니다. 당분간은 연회를 대비해 필수적인 것부터 가르쳐 드릴 겁니다.”
글레나 부인은 반나절에 걸쳐 수업하고 돌아갔다.
“으, 힘들어.”
나는 힘이 풀려 소파에 옆으로 축 늘어졌다.
하면 안 되는 것, 주의해야 하는 것과 신경 써야 하는 건 왜 그렇게 많은지!
특히 품행과 걸음걸이를 지적받았을 땐 꽤 충격이었다.
“나름대로 자신 있었는데.”
글레나 부인은 내게 단정하나 우아함이 부족하니 그런 식으로 걷고 행동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하녀로 일했던 습관이 배어 있다는 거겠지.’
아무렴 하녀로 지내 온 세월이 있으니 몸에 밴 게 당연하겠지만.
‘대공의 딸, 어렵다…….’
* * *
어느덧 시간이 지나 내 생일 연회 전날이 되었다.
그동안 대공저는 이전보다 더 화려해졌다.
가구와 커튼, 카펫 색이 전체적으로 밝게 바뀌었다.
그리고 싱싱한 생화들을 꽂아 둔 화병도 대공저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대공저가 바뀐 것만큼 나도 조금은 바뀌었는데, 글레나 부인의 교육 덕분이었다.
겨우 일주일 배웠다고 완벽한 귀족처럼 변한 건 아니다.
그래도 처음 지적받았던 품행과 걸음걸이만큼은 어느 정도 고쳐진 상태였다.
다만 요즘 내 고민이 있다면…….
“집사, 집사.”
“예, 아가씨.”
“아빠는 왔어?”
저번 주부터 외박한 대공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평소 같았다면 대공이 집을 비워 좋다고 여겼을 테지만,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아마 내 생일 연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은 나여도 연회 주최자는 대공이니까.
‘주최자가 없으면 이상하잖아.’
내 물음에 집사가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내가 물었을 때마다 답해 준 것과 같은.
집사는 오늘은 꼭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며 날 돌려보냈다.
그리고 날이 저물었다.
“안 오네.”
나는 어느새 어두워진 창밖을 확인하고 투덜거렸다.
‘어떻게 연회 전날까지 안 돌아올 수 있지?’
심지어 내가 원한 것도 아니었다. 자기가 열겠다고 한 거면서!
“주인님께서 늦게 오시려나 보네요. 내일 일어나면 와 계실 거예요.”
“맞아요. 멋진 선물을 준비하느라 늦으시는 걸 거예요.”
하녀들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그녀들은 필사적으로 날 달랬다.
내가 서운해할까 그런 듯했으나 정작 나는 서운함보다는 오기를 부리고 싶어졌다.
‘언제 들어오나 보자!’
잠든 척해 하녀들을 내보낸 나는 인기척이 완전히 잦아들자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우움, 어디 가?
‘잠깐 밖에.’
슈가가 침대 대용으로 만들어진 바구니 안에서 살짝 고개를 들었다.
룩스는 완전히 곯아떨어졌는지 몸을 동글게 말고 뽕, 뽕, 소리 내며 잠꼬대했다.
‘금방 올 거야. 너도 더 자.’
―응……. 빨리, 돌아와…….
내 대답에 슈가가 몸을 동글게 말았다.
잠든 걸 확인한 나는 그제야 램프를 켰다.
마력석을 원료로 쓰는 램프는 아래쪽에 튀어나온 막대기를 위아래로 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을 켜고 끌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땐 신기했지.’
내가 사용해 본 것들은 모두 초에 직접 불을 붙여 램프 속에 넣어 사용하는 식이었으니까.
이런 램프가 존재한다는 걸 들은 적이 있긴 했다. 비싸서 구경도 못 해 봤을 뿐.
나는 램프를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기름칠을 잘한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걸어 1층으로 내려오니 공기가 쌀쌀했다.
초여름이어도 밤에는 춥구나.
‘이불이라도 뒤집어쓰고 나올걸.’
나는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계단 위에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고, 몸을 기댈 수 있는 난간도 있어 앉아 있기에 딱 좋았다.
조금 추운 것만 빼면.
그렇게 앉아 시간도 모르고 현관만 노려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졸려…….’
하릴없이 앉아만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들어가서 자야 하는데.’
머리로는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지만, 수마에 사로잡힌 몸은 점점 늘어졌다.
머리가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난간 위에 기대어진다.
그 느낌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다.
* * *
대공저의 어느 복도.
아무도 없던 곳에 빛무리와 함께 사람 형체가 생겼다.
그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시드는 괴로운 얼굴로 벽을 짚어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울렁거리는 속과 끊임없이 머릿속을 왕왕 울리는 이명에 미칠 것만 같다.
과도한 마력 사용으로 인한 정신 오염이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마법을 써서 얻어 낸 게 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 넘게 보육원의 기록을 뒤지고, 아이들을 찾아다녀 진실을 말하는 심문 마법을 걸어 얻어 낸 단서는 몇 안 되었다.
“마리 누나……. 몰라요, 갑자기 사라졌어요.”
“원장 엄마가, 마리 언니는 좋은 곳에 갔으니까 그만 찾으라고…….”
“누나가 사라지기 전이요? 그러고 보니 원장 엄마가 누나한테 어떤 편지를 부치라고 하긴 했어요. 내용은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