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그래도 실마리는 찾을 수 있었다.
수도 내에 있는 우편 편집국을 뒤지다 원장이 말롱 자작가로 편지를 보냈음을 알게 되었다.
보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편지는 없어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시드는 제 직감을 믿고 말롱 자작가의 고용 명부를 뒤진 끝에 ‘마리’의 이름을 발견했다.
드디어 마리라는 여자를 찾을 수 있나 기대했으나 돌아온 대답들은 기대와 달랐다.
“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있긴 했습니다. 갈색은 아니고, 그보다 좀 더 밝은 금갈색 머리지만요.”
“그러고 보니 그 여자를 못 본 지도 꽤 되었네요. 주인마님이 황궁 지하 감방에 갇힌 뒤로 그 여자도 안 보이던데……. 같이 갇혔나?”
“주인마님과 같이 황궁에 간 뒤로 본 적 없습니다.”
황궁에서는 지금처럼 마법을 쓸 수 없었다.
허가받지 못한 자가 마법을 사용하면 역으로 반발받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리고 아시드는 허가받지 못한 자였다.
간단한 마법을 써도 내장이 뒤틀리며 피를 쏟아 내게 되니 마법을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대신 그는 다른 수단을 찾기로 했다.
이를테면 정말 끔찍이 싫은 제 이복형제이자 황제인 델러노에게 부탁하는 것 같은.
“이거 참 진귀한 광경이네요. 형님께서 제게 부탁이란 걸 다 하고.”
“…….”
“게다가 그 대상이 여자라니, 드디어 레일라 누님을 잊고 부인을 맞이하시는 겁니까?”
“헛소리. 내 딸을 위해 찾는 것뿐이다.”
“그 아이가 뭐라고 이렇게 신경 쓰십니까?”
“은인이니까.”
“흐음.”
델러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치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것 같은데?’ 하는 듯한 얼굴.
슬슬 기분이 가라앉으려 할 때 델러노가 입을 열었다.
“하나뿐인 형님이 하는 부탁이니 들어드려야지요. 대신 형님도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겠습니다.”
“…….”
“최근 조세 제도 개정으로 시끄럽게 짖는 것이 셋 있습니다. 그들을 처리해 주시면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부탁이라 칭했으나 사실 명령이었다. 동시에 변덕이 한 스푼 들어간 말장난이기도 했다.
필요 없다고 거절한다 해도 황제는 그를 불러 대신 손을 더럽히게 했을 것이므로.
‘여태껏 그래 왔듯이.’
델러노가 그 빌어먹을 고대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한,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마땅한 계책이 생기기 전까지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명령을 처리하고 왔으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수감 기록을 찾아봤습니다만, 그런 여자는 없다고 하더군요. 잘못 아신 것 아닙니까?”
“황궁에도 없는 건가?”
“그런 객이 있다는 보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럴 리 없을 텐데. 내게 거짓말하는 게 아닌가?
평소 성격이었다면 그리 반문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가와 꼬리가 연결되지 않도록 자연스레 죽이는 데 사용한 마력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웠다.
“이런. 형님의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네요. 내일이 제 조카의 생일 연회라고 들었는데 이 꼴이어서야.”
“…….”
“그래도 심각한 것 같지는 않으니 화염의 검을 쓸 필요는 없고 진정제나 좀 드시면 되겠습니다.”
델러노는 예의 웃음을 지으며 아시드에게 약통을 쥐여 줬다.
아시드는 이를 악물고 그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필요 없다.”
“드셔야 할 겁니다. 그때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시려면.”
이어 들려온 말에 차마 그럴 수 없었지만.
“새로 생긴 소중한 딸 아닙니까? 아니, 은인이라 하셨나. 어찌 되었든 간에.”
황제는 아시드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약통을 붙들게 했다.
“또 죽이지 않도록 알아서 조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일라 누님 때는 황자 자리에서 쫓겨나는 거였지만, 이번에는 뭐일지 궁금하군요.”
“…….”
“저 대신 조카에게 축하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시길.”
그 말을 들은 걸 마지막으로 아시드는 대공저로 돌아오게 되었다.
황제가 강제로 보낸 것이다. 아시드는 진정제가 들어 있는 약병을 움켜쥐었다.
“이딴 것…….”
먹을 것 같나.
그가 막 약병을 던지려던 때였다.
‘또 죽이지 않도록 알아서 조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 소름 끼치는 이명이 끊임없이 그에게 속삭인다.
―아시드, 내 아들. 네가 이 어미의 희망이야. 부디…….
―살려 주십시오, 전하. 살려…….
―제발 살려 주세요, 전하!
아시드는 약병을 열어 알약을 세지 않고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제법 내성이 생긴 진정제는 약효가 나타나는 게 느렸다.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살고 싶어요! 살려 주세요!
―네 따위가 황태자가 되겠다고?
―명심하렴. 넌 꼭…….
목소리들이 뒤섞여 한꺼번에 들려온다. 그래도 이건 버틸 만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본래는 흰색이었으나 군데군데 피로 붉게 물든 치맛자락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아시드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아서는 안 된다.
그의 앞에 있는 건 분명 ‘그녀’일 테니까.
―아시드.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이명 속에서 조용히 울리는 음성에 아시드는 귀까지 막아 가며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시드의 앞에 앉아 그의 얼굴을 감쌌다.
―아시드, 내 사랑.
조곤조곤하나 산 자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왜, 날 죽였어요? 우리 아이까지, 왜?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
―사랑한댔잖아. 사랑…….
“그만.”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끊임없이, 빠르게 속삭이는 이명에 잠겨 간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기만자. 나빠. 싫어. 당신을, 저주해…….
속삭이는 소리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 같다.
그 진득함에 질식되어 가던 때, 멀리서 희끄무레한 빛이 보인다.
빛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빛만이 구원이란 걸.
아시드는 천천히 빛을 향해 걸어갔다.
어두컴컴한 공간을 걸어 빛에 다가갈수록 그를 옭아매던 것들과 이명이 점점 흩어진다.
마침내 빛에 근접했을 때, 아시드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 빛의 정체는…….
“베로니카?”
아이 특유의 작고 동그란 뒷모습이 보인다.
빛나는 작은 램프와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계단 난간 사이로 삐져나와 늘어져 있다.
꽤 가까이 왔는데도 베로니카는 미동조차 없었다.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 아이의 옆에 서자 고른 숨소리가 새근새근 흘러나온다.
‘이 아이가.’
그 빛이었다고.
아시드는 여전히 초점이 반쯤 흐려진 눈으로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혹자는 램프와 혼동한 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확실히 아니었다.
램프 불빛 따위로 억누를 수 있었다면 이토록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하지만 아무 힘도 없는 이 아이가 그를 안정시켰다는 건 이상했다.
진정제의 약효가 나타났을 때 우연히 아이를 본 거라면 모를까.
“전하?”
한참 베로니카를 보는데 위에서 환한 불빛이 비쳤다.
“언제 돌아오셨……. 괜찮으십니까?”
전대부터 이 저택을 지켜 온 집사, 더스틴이 램프를 들고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 한마디에 더스틴은 손을 거두었다. 제 주인의 성격을 익히 잘 알아서였다.
평소보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 때문에 걱정됐지만.
“요한나에게 진정제를 지어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괜찮다. 아까 먹었으니까.”
“드셨다고요?”
“델러노가 줬다.”
“그렇군요. 황제 폐하께서…….”
더스틴은 오다가 본 알약들을 떠올렸다.
복도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흰 알약들을 보고 짐작은 했다.
하지만 실상을 확인하고 나니 안쓰러워진다.
‘결국, 무리하셨구나.’
보통의 마법사는 아무리 마력을 많이 써도 내상을 입을지언정 정신 오염은 겪지 않았다.
하지만 황가의 피를 이어받아 소환수인 불새를 지닌 아시드는 달랐다.
마력이 불새와 이어져 있는 만큼 과한 마력을 사용하면 내상은 기본이고, 정신까지 오염되었다.
그게 차곡차곡 쌓이면 끔찍한 환영이 찾아와 괴롭히고 폭주로 이어졌다.
그걸 막아 주는 게 대대로 황제에게 전해져 오는 고대 무기, ‘화염의 검’이었으나…….
‘황제의 성격상 전하를 편하게 해 줬을 리 없지.’
정말 폭주할 것 같았다면 무기를 이용해 통제하며 마력을 안정시켜 줬을 테지만, 황제는 진정제나 주고 돌려보냈다.
폭주할 정도는 아니니 알아서 그 고통을 감내하라고.
제 이복형이 마력 진정제에 내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시드도 황제의 속내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정제를 먹은 건 그만큼 절실했다는 뜻이리라.
더스틴은 안타까움을 숨기려고 일부러 다른 곳에 시선을 주었다.
“아가씨는 잠드신 겁니까?”
“내가 오기 전부터 이러고 있던 것 같더군. 대체 왜 여기서 자는 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현관에서 가까운 걸 보니 전하를 기다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날 기다렸다?”
“매일 전하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내일이 연회라 하녀들 몰래 나와 기다리다 잠든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더스틴이 확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작은 목소리라고는 하나 이어지는 대화 소리에 깰 법도 한데 아이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날 기다렸다고.’
아시드는 묘한 기분을 뒤로하고 아이의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