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36화 (36/125)

#36

“베로니카.”

“우웅…….”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군.”

“깊이 잠드셨나 봅니다.”

더스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시드는 베로니카가 자신에게 기대게 만든 뒤 천천히 안아 들었다.

아이는 가볍기 짝이 없었다. 한쪽 팔로만 들어도 무리 없을 만큼.

‘여전히 가볍군.’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도.

갑자기 자리가 바뀌어서인지 베로니카가 조금 몸을 뒤척였다.

다른 팔로 아이의 등과 목을 감싸듯 받치자 안정을 되찾은 듯 기대어 온다.

그동안 더스틴은 베로니카가 들고나온 램프를 집어 아이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앞장섰다.

아시드가 조심스레 베로니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전하도 이제 쉬시지요.”

“먼저 돌아가라. 나는 여기 머무르다 가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더스틴은 원래 베로니카가 들고 온 램프를 내려놓고 나갔다.

* * *

‘눈 부셔.’

얼굴 위로 쏟아지는 빛에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뜬 나는 멍하니 생각하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뭐야?”

어제 현관문을 보며 쪼그려 앉아 대공을 기다리지 않았나?

언제 내 방으로 돌아왔지?

설마, 몽유병인가……?

―왜 그래?

“방으로 돌아온 기억이 없어서.”

―수컷 인간이 널 데리고 와서 침대에 눕혀 주고 갔어.

“수컷 인간? 누구?”

―네가 아빠라고 부르는 인간.

슈가 덕분에 병이 아닌 게 밝혀졌지만 의아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정말 대공이 날 데려다줬어?”

―응. 집사라고 하나? 늙은 수컷 인간도 같이 왔다 갔어.

―흐아아암, 무슨 일이야, 찍.

―베리가 어제 나갔다가 돌아온 걸 기억 못 해서 설명해 줬어.

―응? 어디 갔다 왔어, 찍?

“잠깐, 앞에.”

―왜?

“그냥 바람 쐬러.”

대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고 말하기는 싫었던 터라 대충 둘러댔다.

―아닌 것 같은데, 찍…….

앗, 거짓말인 티가 났나.

다행히 하녀 언니들이 찾아와 룩스를 더 상대 안 해도 되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아가씨. 그럼 준비해 보실까요?”

“준비?”

“일단은 연회가 있고, 주인공이시니까요. 맞다. 오다가 집사님께 들었는데 주인님이 돌아오셨대요.”

“제가 어제 일어나면 와 계실 거라고 했죠?”

“정말?”

이미 슈가에게 들은 소식이지만, 나는 처음 듣는 것처럼 굴었다.

날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응어리진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돌아왔으니 봐줄까.

하녀 언니들은 날 씻기고 옷을 꺼내어 입히고 머리를 성심껏 빗겨 주었다.

“오늘은 색다르게 머리를 묶어 봤어요. 어떠세요?”

“……?”

거울을 본 나는 퍽 당황했다.

어떻게 묶은 건지 몰라도 내 머리 양옆에 작고 앙증맞은 분홍빛 덩어리가 있어서였다.

그 모습이 꼭…….

―복숭아 같아!

―복숭아다, 찍!

‘너희가 보기에도 그래?’

―응! 작은 복숭아 같아!

“마음에 안 드세요?”

“아냐. 좋아.”

분명 머리 모양 자체는 귀여웠다. 그걸 내가 하고 있다는 게 낯부끄러울 뿐.

슈가와 룩스는 내 방에 남기로 했다. 사람이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고 해서였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혼자 방을 나서는데 웬걸, 대공이 보였다.

“나왔군. 다 된 건가?”

“그렇습니다.”

하녀 언니의 대답에 대공이 내게 손을 뻗었다.

‘안아 주려는 건가?’

이미 여러 번 대공에게 안겨 본 터라 나는 최대한 몸에 힘을 뺐다.

이래야 대공이 날 쉽게 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행동은 내 예상과 달랐다.

대공은 날 안아 올리지 않고 내 목 뒤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뭐 하려는 걸까?’

궁금해 가만히 있는데 가슴께로 뭔가가 늘어지는 느낌이 든다.

“생일 선물이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로즈골드빛의 가는 줄에 걸린 링이 보인다.

이건 반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목걸이?

“원래 반지로 만들었던 건데, 어린아이들은 손장난을 많이 쳐 불편해할 거라고 하더군. 그래서 줄을 걸어 목걸이로 만들었다.”

그렇구나.

“편한 쪽으로 써라. 반지 치수는 알아서 조절되니 걱정하지 말고.”

“신기하다…….”

반지가 가진 기능에 매료된 나는 반지를 들어 살폈다.

가운데에 작은 깃털 모양의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깃털 모양의 보석은 투명한 붉은빛으로 매끈하고 반짝였다.

그 모습이 신비롭고 예뻐 나도 모르게 보석을 매만지게 되었다.

“예뻐요.”

“다행이군. 그리고 지금처럼 세 번 문지르면 내게 신호가 오도록 만들었다.”

헉! 신호가 간다고?

나는 재빨리 보석을 만지던 손을 내렸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대공은 계속 말했다.

“그러니 위험한 일이 생기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문지르도록. 네게 바로 갈 테니.”

대공 나름대로 신경 쓴 듯했지만, 내게는 무서운 물건일 뿐이었다.

이걸 세 번 문지르면 대공이 온다니……. 실수로라도 안 문지르도록 조심해야지.

“다른 이들에게는 안 보이니 걱정하지 말고.”

“저한테는 잘 보이는데요?”

“착용자라 그렇다. 웬만큼 뛰어난 마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투명화 마법을 뚫지 못할 거고. 만지면 대강 형태는 잡힐 테지만, 그뿐이다.”

“투명화 마법…….”

신기하다. 아무리 마법이라 해도 이런 게 가능하다니.

잠깐. 대공의 말에 따르면 이거 마법 물품이잖아?

‘엄청 비쌀 텐데?’

심지어 내가 들은 마법만 해도 세 가지였다.

하나만 들어가도 고가를 자랑하던데……. 마법은 대공이 걸었을 테니 가격을 따질 필요 없나?

덤덤해지려고 마음먹어도 손이 덜덜 떨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한 용품이란 건 변함 없어서 그런가.

“어제 계단에서 자고 있던데.”

“헛.”

잊고 있던 기억이 강제로 끄집어내졌다.

대답하기 싫은데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되나.

“왜 거기서 자고 있었지?”

……하긴 그럴 리 없지.

집요한 물음에 나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빠, 기다렸어요. 안 와서…….”

“그랬나.”

저리 담담한 반응이라니!

딱히 다른 걸 원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건 너무 담백하잖아!

조금 심통이 나려던 그때였다.

“미안하군. 기다리게 해서.”

어, 어라?

뜻밖의 사과에 내가 놀란 눈으로 보는 동안 대공이 덧붙였다.

“그리고.”

“……?”

“다음부터 기다릴 거면 방에서 기다려라. 몸도 허약하면서.”

허약해? 내가?

한 번도 그렇게 여겨 본 적 없었기에 그만큼 대공의 말은 충격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오해를……. 아, 설마 감기에 걸렸던 거 때문에?

“저 튼튼해요.”

“튼튼해지겠지.”

“지금도 튼튼해요. 지, 진짜인데.”

그렇게까지 말했으나 대공은 그다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억울하다!

감기 한번 걸렸다고 허약하다는 말이나 듣고!

내 분한 마음과 달리 대공은 평소처럼 딱딱한 무표정으로 말했다.

“이만 가지.”

* * *

꾸며진 복도를 따라 연회장과 가까워질수록 없는 줄 알았던 설렘이 몰려왔다.

처음 내 생일 연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여느 때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 설렘은 연회장에서 은색 머리 남자아이를 발견하자마자 싹 사라졌지만.

‘황태자!’

우리 사이의 거리는 제법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주위에만 유독 사람들이 몰려 있는 데다 머리색이 워낙 화사해 눈에 띄었다.

거짓말처럼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황태자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괜히 오싹해지며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였다. 그때도 저렇게 웃었는데.

“엉뚱한 놈이 주인 노릇을 하는군.”

대공이 못마땅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황태자 싫어하는구나.’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받으니 더욱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는 동안 황태자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부님.”

황태자가 예를 차려 인사했다. 어린 나이인데도 절도 있다.

대공은 무표정으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실로 그다운 답인사였다.

황태자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저번에 마주친 일을 말하면 안 되는데.’

나쁜 의도로 숨긴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대공에게 거짓말한 터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황태자는 날 처음 보는 척 굴었다.

“얘가 제 사촌인가요?”

“내 딸이다. 네 사촌이 아니라.”

그게, 그거 아닌가?

“백부님의 딸이니 제 사촌이기도 하지요.”

“이 아이는 황가와 상관없다.”

“백부님의 딸로 인정받았는데 어떻게 상관이 없습니까?”

와아.

내 기준에서 참 의미 없는 말씨름을 지켜보던 나는 감탄했다.

벨로크 대공에게 저렇게 꼬박꼬박 대꾸하다니!

“공녀로 인정한 것뿐이지, 이 아이를 황가에…….”

“참, 제 사촌에게 생일 선물을 줘야죠. 그러려고 온 거니까.”

심지어 황태자는 대공의 말을 잘라먹기까지 했다!

‘우와아아.’

정말 대단한 깡이었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황제의 아들 맞네.’

대공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매서운 인상에 겁먹을 법도 한데 황태자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제 뒤쪽을 보며 입을 열 뿐이었다.

“나와.”

수 초 뒤, 황태자의 뒤에 있던 많은 사람 중에서 어떤 여자가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시녀인가?’

무심코 여자를 본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정하게 묶은 금갈색 머리카락.

‘설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비록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잘 안 보였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마리 언니, 맞지?

나는 여자에게 보이도록 손을 움직여 수화 언어를 했다.

모르는 사람은 그저 ‘이상한 손짓이네.’ 하고 말겠지만, 내 앞에 있는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여자는 움찔, 몸을 떨더니 아주 살짝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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