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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37화 (37/125)

#37

올리브와 같은 암녹색 눈과 시선이 얽힌다.

‘정말 마리 언니야.’

나는 비로소 안심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착각이 아니라 진짜 마리 언니였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언니를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보는 눈도 많고 바로 옆에 대공이 있어 그럴 수 없었다.

대공은 황태자를 싫어했다.

그런데 황태자가 데려온 여자를 끌어안는다면…….

‘안 봐도 뻔해.’

그사이 마리 언니가 내 쪽으로 보석함을 내밀었다.

작지만 보석과 금장식으로 세공된 보석함은 화려했다.

“고심해서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면 좋겠네.”

황태자는 마리 언니가 들고 있는 보석함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 줬다.

‘목걸이?’

문양은 물론 장식조차 없는 얇은 초커 형태의 목걸이였다.

화려한 보석함에 비하면 볼품없는 외양이라 주변이 조금 술렁였다.

하지만 내게는 보석함에 든 게 어떤 물건이든 상관없었다.

황태자가 준비한 ‘진짜’ 선물은 저게 아니라 마리 언니일 테니까.

사람을 선물이라고 줄 수는 없어 일부러 대외적인 선물을 따로 준비한 것이리라.

‘내 말을 기억하고 들어줬구나.’

줄곧 무섭게만 느껴졌던 황태자가 지금만큼은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만약 황태자가 지금 여기서 내게 어떠한 부탁을 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약속할 수 있을 만큼.

“그딴 게 선물이라고?”

속사정을 모르는 대공에게는 그저 거슬리는 물건이었나 싶지만.

“백부님의 눈에는 조악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제 사촌에게는 필요할 겁니다. 착용자 대신 소리를 내 주는 마법이 걸린 마법 물품이니까요.”

소리를 내 주는 마법?

그렇다는 건…….

‘마리 언니가 저걸 하면 자유롭게 소리를 낼 수 있겠네?’

심장이 콩닥거린다. 오늘따라 황태자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걸.

“고…….”

“이건 또 무슨 장난질이지?”

고맙다고 말하려던 나는 대공의 스산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살짝 곁눈질해 보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대공이 보인다.

누가 봐도 화난 얼굴.

평소 무표정이던 얼굴과는 너무나 달랐다.

어째서?

“연회에 참석한 이유가 내 딸을 조롱하기 위함이었나?”

“무슨 말씀입니까?”

“시치미 떼지 마라. 이딴 걸 선물한 이유가 그것 말고 뭐가 있지?”

황태자가 날 조롱했다고?

내가 아둔하게 뭘 놓쳤나?

하지만 황태자 역시 당황한 모습이었다.

정말 날 조롱했다면 저런 반응일 리 없을 텐데.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 모르겠으나 받지 않을 테니 도로 들고 가라.”

“진심입니까? 사촌은 섭섭해할 텐데요.”

“그따위 선물을 필요로 할 것 같나?”

“백부님의 뜻이 그러시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들고 돌아가는 수밖에.”

뭐?

“아! 안 돼!”

돌아서려는 황태자를 붙잡자마자 나는 상황을 깨닫고 멈칫했다.

헛! 나도 모르게!

재빨리 손을 거뒀지만 늦었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제 말이 맞는다는 걸.”

황태자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묘하게 만족감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반면에 대공은 더욱 표정을 굳히며 날 불렀다.

“베로니카.”

“네, 네?”

나는 한껏 긴장했다. 황태자를 붙잡은 건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공은 황태자를 싫어했으니 내 행동에 대공이 기분 나빠하리란 것쯤은 알았다.

그래서인지 대공이 내게 할 말이나 행동이 두려워졌다.

잔뜩 몸을 움츠리니 대공이 입을 열었다.

“저런 건 나도 줄 수 있다.”

으, 응?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만들어 줄 테니 아쉬워하지 말아라.”

잠시간 나는 대공이 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했다.

어, 그러니까…….

저런 마법 물품은 자신도 만들 수 있으니 황태자를 잡지 말라는 건가?

하지만 대공의 추측은 틀렸다.

나는 마법 물품 때문이 아니라 마리 언니 때문에 황태자를 잡은 거니까.

‘그러고 보니 대공은 마리 언니의 얼굴을 모르겠구나.’

내가 앓아누워 있는 동안 언니의 이름을 읊조려 이름은 들어 봤겠지만, 직접 본 적은 없으니까.

다른 것 때문이라면 최대한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택을 했을 테지만…….

‘언니가 눈앞에 있는걸. 이마저도 놓칠 순 없어.’

나는 머뭇거리다 대공의 옷을 붙잡았다.

“아, 아빠. 전 저게 좋은데…….”

“…….”

“앞으로 아무것도 안 받아도 돼요! 아무것도 안 주셔도 되니까, 안 될까요……?”

말할수록 목소리가 떨렸다. 대공이 내 요구를 무시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나는 간절하게 대공을 바라봤다. 제발 들어줘라. 이번까지만, 제발.

“……이번은 받아들이지.”

“정말요?”

“그래. 그러니 이런 거로 네 권리를 포기하지 말아라.”

내 권리를 포기하지 말라니. 그저 대가를 치르려던 것뿐인데.

“받아 와.”

대공의 명령에 하인이 마리 언니에게서 보석함을 받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제 언니도 내게 올 테니까.

하지만 마리 언니는 내게 오지 않고 황태자에게 돌아갔다.

응? 돌아갔다고?

나는 크게 당황했다.

‘어째서?’

마리 언니를 쳐다봤지만, 언니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어느덧 다가온 황태자가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잡힌 줄도 모를 만큼 자연스러운 접촉이었다.

“생일 축하해, 베로니카.”

―네가 찾던 여자와 만나고 싶다면 날 찾아와.

어? 황태자의 목소리가 이중으로 들리잖아?

엄밀히 말하면 하나는 귀로, 하나는 머릿속으로 울리는 것 같았다.

마치 룩스와 슈가의 목소리를 들을 때처럼.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쥐더니 날 당겨 제 뒤로 숨겼다.

대공이었다.

“꼼수를 쓰는군.”

“축하 인사가 꼼수입니까?”

“내가 네 마력의 흐름도 못 읽을 줄 아나?”

마력의 흐름? 마법인가?

“제가 부끄러움이 많아서요. 백부님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해 봤자 믿음이 갈 리가…….

대공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뒷사람들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럼.”

황태자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예를 차렸다.

그리고 마리 언니와 함께 사람들 사이로 멀어졌다.

‘마리 언니…….’

내가 언니의 뒷모습을 보는데 대공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손을.”

“……?”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내밀자 대공이 눈짓했다.

“이쪽 손 말고 아까 그 녀석…… 아니, 반대 손.”

그 녀석?

워낙 빠르게 지나간 말이라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신할 수 없는 터라 나는 되묻는 대신 왼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대공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손수건으로 내 손을 닦아 줬다.

“……아빠?”

뭐 하는 거지?

대공은 내 손을 꼼꼼하게 닦아 준 뒤에야 놓아주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하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갖다 버려라.”

“예, 주인님.”

꾸벅 인사한 하인이 멀어졌다.

‘새 손수건 같은데, 왜 버리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만약 그 녀석이 또 말을 걸어오거든 무시하도록.”

“그 녀석이요?”

“아까 봤을 텐데.”

……설마, 황태자를 말하는 거야?

그럼 내 손을 닦아 준 건 황태자가 잡아서?

대공이 황실을 싫어하는 건 안다.

나도 겪은 게 있는 만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고.

다만,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더 싫어하는 기색이라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이따가 황태자를 찾아가야 했으니까.

나는 조금 전 황태자가 내게 전한 뒷말을 떠올렸다.

‘이따가 만나. 기다릴 테니까.’

대공이 날 황태자에게서 떼어 내기 직전에 들려온 말이었다.

‘사실, 이해는 안 가.’

마리 언니를 만나고 싶다면 자신을 찾아오라니.

‘약점을 잡고 싶은 걸까?’

비록 나는 대공의 친딸은 아니지만, 벨로크 대공가에 입적되었다.

이걸 빌미 삼아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면 어떡하지?

마리 언니를 인질 삼아 이상한 일을 시키려는 거라면?

황태자의 진면모를 봐서일까.

그의 의도를 순수하게 해석하기 어려웠다.

‘일단, 가 보자.’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고 걱정해 봤자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가야 하지?’

내 옆에는 대공이 있었고, 앞에는 내게 선물을 주겠다는 귀족들로 가득했다.

도저히 황태자를 만나러 갈 틈이 안 보인다.

내가 기회만 노리는 동안 연회에 온 귀족들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인 얼굴로 대공의 눈치를 보며 선물을 주고 갔다.

선물은 대부분 동물과 관련된 용품이었다.

정확히는, 다람쥐와 생쥐를 위한.

향기 나는 톱밥과 낙엽 무늬가 들어간 쿠션, 놀이용 공, 장난감 낚싯대가 그 예였다.

이외에도 인형과 책 등이 쌓였다.

그 양이 어찌나 많던지, 중간에 대공이 나머지는 하인에게 전달하라며 끊을 정도였지만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황태자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으니까.

“생일이니 케이크를 먹어야겠지.”

“가져오겠습니다.”

옆에 있던 하인이 재빨리 움직여 사라졌다.

얼마 안 있어 요리사가 트롤리 카트를 밀며 나타났다.

카트 위에는 내 키와 비슷해 보일 정도로 아주 높고 커다란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와, 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케이크의 층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아홉? 9층짜리 케이크라고?’

대공의 딸이 된 이후로 디저트를 마음껏 먹었다지만, 이렇게 큰 케이크는 처음이었다.

요리사가 내가 보는 앞에서 케이크를 조각으로 잘라 예쁘게 접시에 담아 줬다.

“공녀님의 아홉 번째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드셔 보시지요.”

대공이 있는데 내가 먼저 먹어도 되는 건가?

내가 대공을 쳐다보기도 전에 대공이 “먹어 봐라.”라고 말했다.

그제야 안심한 나는 케이크를 먹었다.

“맛있어!”

헛! 케이크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 나도 모르게!

황급히 입을 다물고 대공을 슬쩍 보자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맛있다니 다행이군.”

그저 그 한마디만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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