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40화 (40/125)

#40

내가 계속 쳐다보자 대공이 손가락을 살짝 굽혀 내 뺨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러니 너 때문이 아니라 내 욕심이었을 뿐이지.”

어째서인지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간질거린다.

대공은 자신의 욕심이라고 했지만, 결국 나를 위한 것이란 건 변함이 없었으므로.

‘착각이 아니야.’

벨로크 대공은 날 위하고 있었다.

한번 인정하고 나니 그동안 대공이 날 위해 해 준 일들이 떠올랐다.

내게 이름을 지어 주고, 밤마다 책을 읽어 줬다.

거기에 그냥 지나쳤을 생일 연회를 열고 마리 언니를 찾으러 다니기까지.

이리도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나만 외면해 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긴 했지만……. 대공은 내 생각보다 날 위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하다.

왜 이렇게 나한테 신경 써 주지?

난 대공을 이용할 생각밖에 없는데. 그가 반역하기 전에 도망칠 생각뿐인데.

대공은 분명 좋은 사람이 아니다. 무섭고, 잔인하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먹먹했다.

내가 바라 왔던 가족에 대한 환상이 실현된 것만 같아서.

‘진짜 아빠가 생긴 것 같아.’

몽글거리는 기분에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소재 파악이 되었으니 데려오기만 하면 되겠군. 데려오면 네 하녀로 둘 건가?”

“아니요…….”

“그러면?”

되묻는 어조가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진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겁 없이 내 염원을 말했다.

“언니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주고 싶어요.”

“그래. 그렇게 해 주지.”

어?

놀란 나와 달리 대공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내 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데 못 해 줄 것도 없지.”

“정말, 정말로요? 어떤 거라도 상관없이요?”

“내가 이런 거로 거짓말할 것 같나?”

도리도리.

나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그에 대공이 픽, 웃었다.

아주 옅게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져 버렸지만.

그것도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의아할 정도로 아주 빠르게.

짧은 변화였지만 이상하게 그 웃음이 뇌리에 콕 박혔다.

대공을 만난 이래로 그가 웃는 걸 처음 봐서 그런가?

“며칠 내로 그 녀석에게서 데려와야겠군.”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저더러 직접 오라고 했어요.”

“그것도 조건이었나?”

“네.”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대공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불새인 줄 알았더니 불여우 새끼였군.”

불새? 불여우?

대화의 흐름과 맞지 않는 말에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대공의 표정이 기분 나빠 보일 정도로 험악해서 그가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붉은 여우를 싫어하나 보다.’

6. 황금 사슴

생일 연회가 열리기 전에는 전담 하녀들을 제외하고 대공가 사용인들의 대부분이 바빴다면, 연회가 끝난 뒤에는 내 전담 하녀들이 바빠졌다.

내게 들어온 선물 목록을 분류하는 작업 때문이었다.

선물로 들어온 것 중에는 룩스와 슈가를 위한 쿠션과 장난감이 많았던 만큼 곧바로 제공되었다.

그 결과, 둘은 각자가 선호하는 쿠션 위에서 한창 뒹굴며 만족스러워했다.

―이거 엄청 보드랍고 푹신해! 낙엽 위에서 뒹구는 거랑은 다른 느낌이지만 좋아!

―난 이게 좋아, 찍!

잔뜩 신난 둘처럼 나도 들뜨긴 마찬가지였다. 기뻐하는 이유는 달랐지만.

‘어서 마리 언니 보고 싶다.’

오늘은 황궁에 가서 마리 언니를 데리고 오기로 한 날이었다.

비록 대공, 아니, 아빠가 동행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기뻤다.

아빠가 같이 가게 된 건 그제, 연회가 끝나고 그가 데려다주며 한 말 때문이었다.

“황궁에는 같이 가면 되겠군.”

“같이요?”

“그 녀석이 설마 너만 오라고 하던가?”

“아니요.”

황태자는 나더러 직접 오라고 했지, 나만 오라고 하진 않았으니까.

“그럼 같이 가도 문제없겠군.”

그렇게 결론이 났다.

황태자를 들먹여 아빠와 동행하는 걸 막을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나는 아직도 황태자가 꺼림칙하고 무서웠다.

두 번째는 황궁이라는 장소 자체가 두려웠다.

전생에 처음 갔던 황궁은 내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였다.

잔해에 깔려 죽기 전에 겪은 일도 썩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끔찍했지.

회귀한 뒤로는 황제의 장난질에다 말롱 부인에게까지 위협을 당했고.

설마 또 그럴까 싶다만 그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 보니 아빠의 동행이 달가웠다.

생일 연회 이후 아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도 꽤 큰 영향을 미쳤을 테고.

이전에는 그가 억지로 시켜 마지못해 ‘아빠’라고 불렀다면, 지금은 내가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외출 준비를 마친 나는 슈가와 룩스, 그리고 하녀들에게 짧게 인사한 뒤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 저택 밖으로 나오자 먼젓번처럼 마차 앞에 서 있는 아빠가 보였다.

나는 주저 없이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아빠!”

헤헤, 웃어 보였으나 아빠는 날 한번 쓱 훑어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이전처럼 가만히 보고 있지 않고, 날 안아 마차에 올려 줬다.

내가 따로 말하거나 누군가 조언해 준 게 아닌데도.

예전을 생각하면 크나큰 변화이자 발전이었다.

황궁에 도착한 뒤, 나는 아빠를 졸졸 따라갔다.

아빠의 넓은 보폭을 따라잡으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때였다. 앞만 보고 걷던 아빠가 우뚝 멈춘 건.

그러더니 날 향해 허리를 숙여 팔을 뻗는 게 아닌가.

‘안아 주려나 보다.’

몸에 힘을 빼자마자 아빠는 날 안아 들었다. 예상대로였다.

“오늘은 혼자 걸을 수 있다고 안 하는군.”

앗, 너무 자연스레 몸을 맡겼나.

나는 모른 척 아빠의 어깨에 얼굴을 올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아빠는 더 말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편안해.’

황궁은 어린아이가 걷기엔 넓어도 너무 넓었다.

게다가 아빠의 보폭을 따라잡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빠라는 인간 운반기에 안겨 가니 편했다.

으음, 이거 너무 잘 적응한 거 아닌가?

하지만 매번 안아 주는 데 적응 못 하는 게 더 이상할지도.

아빠는 황태자 궁에 도착한 뒤에도 나를 내려 주지 않았다.

편하게 온 건 좋지만, 아빠에게 안긴 채 황태자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넌지시 운을 떼었다.

“아빠, 안 힘드세요?”

“그다지.”

무심한 붉은 눈이 날 흘긋 보고는 정면을 응시한다.

“네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그게 아니라 내려 달라는 뜻이었는데…….

별개로 아빠의 근력이 감탄스럽긴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내가 아무리 작고 말랐다고 한들 기본적으로 나가는 무게가 있을 터였다.

제법 오래 안고 있었는데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다니.

‘따로 운동하나?’

운동하는 마법사라니, 특이하…… 헛! 태평하게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닌데!

어떻게 해야 아빠가 내려 줄까?

아! 그렇게 말하면 되겠다!

나는 아빠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아빠, 저 다리가…….”

“……?”

“다리, 저릿저릿해요.”

아빠는 곧바로 근처에 있는 작은 돌담 위에 날 내려 앉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어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두 다리 다 저릿한가?”

“네, 둘 다…….”

“여기 있었네.”

막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익숙한 미성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니 황태자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시종을 대동한 채였다.

황태자는 돌담에 앉은 나와 잠시 굽혔던 무릎을 바로 펴는 아빠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백부님도 오셨네요.”

“서신을 보냈을 텐데.”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베로니카 혼자서 오길 바랐거든요.”

“앞으로도 혼자 보낼 일은 없을 거다. 그보다 네가 데리고 있다던 시녀는 어디 있지?”

“안에서 베로니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어서 데려오지.”

“그 전에, 베로니카와 단둘이 다녀와야겠는데요.”

“뭐?”

“마리가 부탁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의 방해 없이 대화하고 싶으니 베로니카만 데려와 달라고.”

언니가 그런 부탁을 했다고?

어쩐지 마리 언니답지 않은 부탁이었다.

“시종이 베로니카를 데리고 다녀오면 되겠군. 넌 여기에 나와 같이 있고.”

“죄송하지만, 안 될 말씀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보호해 줄 사람은 있어야지요.”

“네 궁에서 일하는 이들에 대한 신뢰가 겨우 그 정도인가?”

“예.”

조금도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아빠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하긴 나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저리 확고한 대답이라니.

“내 딸의 보호자는 나다.”

“이 궁의 주인은 저입니다. 그러니 손님을 안내하고 보호하는 건 제가 직접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손님이다.”

“예정에 없었던 불청객이시죠.”

사근사근한 어조와 달리 말에는 뼈가 잔뜩 있었다.

‘그냥 혼자 올걸.’

나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빼다가 돌담에서 내려왔다.

조금이라도 둘에게서 멀어지고 싶어서였다.

아빠와 황태자 사이에 끼어 있다 보니 가슴이 오죽 조마조마해야지.

‘둘의 사이가 극도로 안 좋다는 걸 간과하다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전적으로 내 탓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백부님을 접대하는 건 저보다는 시종장이 나을 겁니다. 차 내리는 솜씨가 정말 일품이거든요.”

“내 딸에게 이상한 짓이라도 했다간…….”

“설마 그러겠습니까? 베로니카는 제 소중한 사촌이기도 한걸요.”

황태자가 내 손을 잡아당기려던 때였다.

크고 굳건한 아빠의 손이 나와 황태자 사이를 막아섰다.

“쓸데없는 접촉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