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그런가요?”
“그래.”
냉담한 대답에 황태자가 손을 거두었다.
“어쨌든 이따 뵙겠습니다. 가자, 베로니카.”
“다, 다녀올게요.”
황태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나는 소심하게 덧붙였다.
아빠는 이 상황이 몹시 못마땅한 듯한 얼굴이었다.
“기다리지.”
그러나 곧 돌아온 목소리에 나는 걱정 없이 황태자를 따라나설 수 있었다.
* * *
“대공이 널 많이 좋아하나 봐.”
조금 걸어 아빠와 거리가 멀어지자 황태자가 꺼낸 말이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질색해 몸을 파드득 떨며 “누가? 아빠가? 나를? 아닌데!”라며 한사코 부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빠가 날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실은 더 걸릴 줄 알았어.”
“뭐가요?”
“마리를 데리러 오는 거.”
으음, 하긴. 나도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지.
“사이가 꽤 좋나 봐. 며칠 안 지나서 바로 찾아오고.”
사이가 좋다기보단……. 그냥 아빠가 추궁해서 말하게 된 건데.
‘오해를 바로잡아 줘야 하나?’
잠깐 고민하던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굳이 해명할 거리는 아니니까.
“그런데 정말 마리 언니가 저랑 단둘이 만나고 싶댔어요?”
순간, 황태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 질문이 불쾌했나?’
딱히 불쾌한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황태자의 사고를 따라가기 어려운 만큼 절로 긴장되었다.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거슬리다니?
이럴 수가! 정말 그 질문이 불쾌했던 거야?
“약속을 잊은 거야?”
“약속이요?”
“반말하기로 했잖아.”
“아, 그건! 안 익숙해서 그래요. 아니, 그래.”
“그러면 익숙해지도록 자주 만나야겠네.”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질색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진짜야? 마리 언니가 그런 부탁을 했어?”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언니는 그런 부탁을 잘 못 하거든.”
싫은 소리도 못 하고 말이지.
“잘 아네.”
그럴 줄 알았지.
나는 황태자의 말에 괜히 뿌듯함을 느꼈다.
이어진 말을 듣기 전까지는.
“질투 나게.”
“……?”
내가 마리 언니를 잘 아는 게 왜 질투 날 일이지?
“설마, 언니를 좋아해?”
그래서 나한테 질투하는 건가?
“무슨 착각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니야.”
“그러면?”
“나는 널 모르고 너도 날 모르는데, 마리와 너는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아서.”
“그야……. 마리 언니는 오래 알았는걸.”
보육원 앞에 버려졌던 갓난아기 때부터 언니가 말롱 부인 때문에 죽기 전까지 알고 지냈으니 서로를 안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내가 언니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우리는 두 번 만났잖아.”
“오늘까지 세 번이야.”
두 번이나 세 번이나. 그게 그거 같은데.
“세 번을 만났는데,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꼭 알아야 해?”
우리 거리를 좀 두자고요.
마리 언니만 아니었다면 황태자와 또 만날 일은 없었을 텐데.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
“그렇지?”
“하지만, 내가 널 알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대체 왜!
처음 봤을 때는 내게 관심도 없었으면서!
황태자의 미래와 아빠의 관계를 생각하니 이 상황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
“혹시 불새가 내 말을 들은 거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때 말한 대로 난 정말 몰라.”
“모르는 거 알아.”
“정말?”
“아니면 내게 거짓말했다는 건데, 넌 그럴 담력이 없어 보이거든.”
으,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잖아?
하지만 바로 앞에서 ‘너 겁 많지?’라는 말을 들으니 분하다!
내가 눈매도 동그랗고 전체적으로 유순하게 생겨서 그렇게 보인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도 이런 취급이라니! 이래 보여도 나름 한 성깔 한다고!
“내가 보기와 다르게 거짓말한 걸 수도 있잖아?”
“그래서 나한테 거짓말했다고?”
“아니요.”
황태자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나는 고양이처럼 꺼내 들었던 발톱을 도로 숨겼다.
그러자 황태자가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웃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내 신세도 처량하다. 왜 끝까지 호기롭지 못하니, 어흑.
“마리 핑계를 댄 건 네게 위해를 끼치려 했던 여자 때문이야. 그 여자에 대해 알려 줄 게 있거든.”
황태자가 날 힐끔 보며 덧붙였다.
“대공한텐 그때 일, 아직 말 안 했을 것 같아서.”
과연 황태자답다고 해야 할지.
‘얘도 참 눈치가 빠르다니까.’
말롱 부인의 얘기에 나는 바짝 긴장했다.
“맞아. 아빠는 아직 몰라.”
정확히는, 그때는 말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서 숨겼지.
그런데 굳이 이 얘기를 나와 단둘이 만나 하는 이유는…….
“말롱 부인이 살아 있는 거야?”
“살려 뒀어. 네 부탁대로.”
“내가 그런 부탁을 했다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말롱 부인을 살려 달라고 했던가?
“죽이면 안 된다며?”
그건 마리 언니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그런 거였는데.
나 못지않게 황태자도 당황한 듯했다. 그래 봤자 지금 내 심정만큼은 아닐 테지만.
‘말리는 이유만 알아내면 죽일 것처럼 굴어 놓고, 안 죽였다니!’
바보가 된 기분이다. 말롱 부인이 죽은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으니까.
너만 믿었는데!
“죽여야 했던 거야?”
“……죽은 줄 알았어.”
“하지만 그 여자가 살아 있는 게 달가운 건 아닌 거지?”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다행이라고? 나는 심각한데!
“실은 지하 감방에 가둔 채 조금 괴롭혔더니 죽었거든.”
“정말?”
“시종이 그러던걸.”
황태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한마디에 울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안도가 퍼졌다.
‘다행이야.’
말롱 부인이 살아 있었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을 테다.
그녀의 성격상 분명 내게 복수하려고 들 테니까.
그렇게 마음을 놓은 것도 잠깐.
“그럼 여전히 나한테 빚진 건가?”
“어?”
빚? 무슨 빚?
“너 대신 그 여자를 처리해 줬잖아. 마리도 찾아 줬고.”
“저번엔 호의라고 했잖아.”
“그건 마리의 일만.”
간결한 대꾸가 얄밉다.
분명 전에는 황태자가 무얼 부탁하든 들어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막상 내게서 빚을 받으려 하자 절로 긴장되었다.
“나, 나한테 빚지게 해 봤자 받을 수 있는 거 없을걸?”
“받을 수 있는 게 왜 없어? 벨로크잖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확실히, 남들 보기에 나는 대공가의 수양딸이겠지.
예전처럼 평민 고아 출신에 말롱 부인의 하녀로 일하던 ‘애니’가 아니라.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괜찮아. 지금 당장 뭘 하길 바라는 건 아니거든.”
나는 새삼스레 황태자가 누구의 아들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마리 언니만 데려오면 피해 다녀야겠어.’
속으로 다짐하던 때였다. 황태자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휘었다.
“농담이야.”
“농담?”
“벨로크 대공가에는 관심 없거든. 뜯어낼 것도 없고.”
나는 벨로크 대공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 아니, 거의 모른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벨로크 대공가가 부유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데 하필 저렇게 말하다니.
‘자긴 황족이다, 이건가?’
아직 배움이 부족해 아는 게 없는 나로서는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게 한계였다.
“아니다. 관심은 있다.”
야, 관심 없다며!
“네가 벨로크니까.”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는데 들려온 한마디에 절로 흠칫하게 됐다.
내가 벨로크라서 관심이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인데?
‘얘, 나 좋아하나?’
아까 질투 난다고 말한 것도 그렇고, 관심 있다고 말 바꾸는 것도 그렇고 겸연쩍은데.
“그래도 네가 빚진 건 너한테 받을 거야. 네가 가진 거로.”
“난 가진 게 없는데?”
내가 가진 거라 해 봤자 지금 내 몸뚱이, 이거 하나인데.
“네 시간.”
황태자의 음성이 내 상념을 깨뜨렸다.
“그건 네가 가진 거잖아. 맞지?”
“으, 응. 그렇지.”
나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황태자의 말대로 내 시간은 확실히 내가 가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이었다.
주고 싶다고 줄 수 있는 게 아닌데.
“앞으로도 내가 널 찾아가면 이렇게 만나 줘. 피하지 말고.”
헉, 피해 다닐 생각인 걸 어떻게 알았지? 역시 눈치가 빠르다.
“내, 내가 언제 피했다고?”
정곡을 찔려서인지 생각과 말이 따로 놀다 못해 제멋대로 튀어나온다.
으아, 이런 식으로 말할 게 아니라 다른 화제로 자연스럽게 말을 돌려야 했는데!
이런 내 속을 안다는 듯 황태자가 말했다.
“그럴 생각 없다면 됐어.”
아, 망했다.
* * *
카드릭은 베로니카를 흘긋 훔쳐봤다.
자신을 보는 줄 모르는 베로니카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다채롭게 변했다.
낙담했다가, 의지에 차오른 얼굴이 되었다가, 다시 후회하는 듯했다가 고양된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많은 생각이 오가는 건 분명했다.
그런 베로니카를 보고 있자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떠오르자마자 내려갔지만.
“말롱 자작 부인이 죽었습니다.”
처음 그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꽤 놀랐다.
분명 말롱 부인을 가두고 괴롭힌 것은 사실이다.
말롱 자작가를 겁박해 원조를 일절 못 하게 했고, 화상으로 곪은 상처를 내버려 뒀으니.
그래도 꼬박꼬박 의사가 진찰하게 해 죽지 않게 관리했는데.
“어쩌다?”
“불이, 났다고 합니다. 벽에 달린 등잔이 떨어지며 샌 기름에 그만……. 금방 불길을 잡았으나 질식하거나 불에 타서 죽은 죄수가 몇 있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그 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