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말할 때 입도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언니.”
“입을?”
“목소리는 들리는데 언니 입은 안 움직이니까 부자연스러워서.”
“명심할게.”
마리 언니가 열심히 입을 움직이며 말했다.
여전히 입 모양과 목소리는 엇박자였다.
그래도 저건 연습하면 되니까.
―걱정했는데, 아.
“자꾸 수화 언어로 하게 되네. 이게 익숙해서…….”
“괜찮아. 언니 편한 대로 해. 그래서 뭐 말하려고 했어?”
―잘 지낸 듯해서 다행이라고.
“말하려고 했어.”
아직 어색한지 언니는 계속 손과 목소리가 따로 놀았다.
“그래 보여?”
―이전보다 보기 좋은걸.
“넌 예전에도 귀여웠지만.”
그 말은, 살쪘단 말이렷다!
하지만 기분 나쁘진 않았다.
내 생각에도 지금이 좋아 보이니까.
‘예전에는 꼬챙이 같았지.’
지금도 마른 편이지만, 그래도 어린아이 특유의 동글동글한 느낌이 살아 있었다.
아마 언니도 이걸 느끼고 얘기한 것일 터였다.
“이제는 널 애니라고 부를 수 없겠네.”
“언니는 그렇게 불러도 돼.”
―고마워.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이제 새 이름이 생겼잖아. 베로니카라고 했었니?”
“응, 맞아.”
“무슨 뜻인지 알려 줄 수 있어?”
“승리를 가져다주는 자래.”
아빠가 내 이름을 지어 준 뒤, 매일 밤 되새겼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었다.
―좋은 이름이네.
“애칭은 이상해.”
“그래? 애칭도 예쁠 것 같았는데……. 이상하다니 궁금해지는걸. 한번 맞혀 볼까?”
“좋아.”
마리 언니는 잠깐 고민하더니 다시 손을 움직였다.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베로니카니까, 베키?”
내 애칭이 저랬다면 불만스럽지 않았을 텐데.
“아니야.”
“그러면 로니?”
도리도리.
연달아 틀리자 마리 언니는 조금 당황스러운 듯했다.
“정말 다 틀렸어?”
저렇게 물었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 언니는 눈을 깜빡이다 다시 손과 입을 움직였다.
“그러면……. 베리?”
“맞아.”
이걸 맞히다니!
내 입으로 직접 ‘내 애칭은 베리야!’라고 알려 주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언니가 내 애칭을 알게 된 건 부끄럽다.
―안 이상한데?
“안 이상해?”
“응. 베리라니, 오히려 귀여운걸.”
“그래서 문제야. 너무 하찮고, 또 아기 이름 같잖아.”
“글쎄. 내 눈에는 아직 아기인걸? 우리 베리.”
으!
차마 반박할 수 없다.
마리 언니는 내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날 키웠으니까.
그러니 여전히 내가 아기처럼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또 있어! 과일 이름 같잖아!”
―으왁!
―깜짝, 찍!
앗, 너무 발끈한 나머지…….
내가 벌떡 일어난 반동에 슈가가 떨어졌다.
날다람쥐 특유의 민첩함과 다리 사이에 있는 얇은 익막 덕분에 무사히 침대에 착지했지만.
‘괜찮아?’
―뭐, 이 정도쯤이야.
슈가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나는 마리 언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슈가나 룩스만큼은 아니어도 놀란 얼굴이다.
“미안해. 놀라게 해서.”
―별로 안 놀랐어.
고개를 저으며 수어를 마친 언니가 연이어 물었다.
“그보다 네 애칭이 과일 이름이 아닐 수도 있잖아?”
“아니야. 아빠가 그랬어. 내 눈 색이 블루베리 색이라고. 분명 그거 때문에 지은 것도 있을 거야.”
“과일 이름이 싫어?”
“먹는 거잖아. 그리고 보통 베리가 들어가는 과일들은 작잖아.”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안 좋아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난 네 애칭이 마음에 드는걸.”
―나도 마음에 들어!
―맞아! 과일 이름이 어때서! 먹음직스러워 보이잖아, 찍!
마리 언니에 이어 슈가와 룩스가 말했다.
마지막 말은 안 들렸다면 좋았을 듯싶지만.
“베키나 로니라는 애칭을 두고 네 외양에서 따온 거잖아?”
“그렇지?”
“내 생각에 대공 전하께서 널 생각하고 지으신 애칭 같은데?”
그, 그런가?
언니의 생각을 듣고 나니 ‘베리’라는 애칭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물론 네가 싫다면 소용없는 거지만.”
“싫은 건 아니야.”
다른 애칭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딱 이 정도 아쉬움?
생각해 보면 이미 룩스와 슈가도 나를 ‘베리’라고 부르는데 마리 언니에게 못 부르게 하는 건 그것대로 불공평한 일이겠지.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을 때였다.
마리 언니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어깨를 작게 들썩였다.
새어 나오는 소리는 없었지만, 휘어진 언니의 눈꼬리나 몸짓은 영락없이 웃는 사람의 것이었다.
‘왜 웃지?’
딱히 웃길 만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내 의아한 시선을 느낀 건지 언니가 웃음을 그쳤다.
―미안.
“귀여워서.”
지금 내 외양은 어린아이이니 언니의 눈에 내가 귀엽게 느껴진다 해도 이상한 건 없었다.
실제로 내 얼굴은 제법 귀여운 축에 속하기도 했고.
그저, 이런 ‘아이’ 취급에 면역이 없을 뿐.
“하지만 네가 별로라면 그냥 이름으로 할게.”
“아니야. 애칭 불러도 돼. 언니니까 허락해 주는 거야.”
“그래.”
앗, 또 웃지!
나는 어깨를 떨며 웃는 마리 언니를 힐끔 봤다.
금세 눈에 힘을 풀었지만.
웃던 언니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갑작스레 어두워진 얼굴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마리 언니가 손을 움직였다.
―미안해.
언니의 손짓에 뒤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장님을 막지 못해서. 그러고 계신 줄은 몰랐어.”
나는 언니가 말하는 걸 바로 파악했다.
원장이 날 리슬리란테에 판 걸 말하는 거겠지.
“내가 좀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냉정하게 말하면 마리 언니가 눈치챘어도 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회귀하기 전에 그랬듯이.
‘그리고 이건 언니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잘못한 건 원장이니까.
거기에 덧붙이자면 리슬리란테 같은 곳이 존재할 수 있도록 그런 시장 구조를 만든 인간들이고.
정작 내게 사과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마리 언니지만.
“난 괜찮아, 언니.”
말롱 부인에게 맞아 죽게 되었을 때 언니는 이런 심정으로 내게 괜찮다고 했을까?
“언니 탓이 아니야.”
내가 이렇게 말해도, 언니에게는 닿지 않겠지. 죄책감을 느끼고 자책할 테고.
전생에서의 내가 오로지 내 탓을 했던 것처럼.
그래도 나는 최대한 언니가 죄책감을 끌어안지 않게끔 말을 골랐다.
“원장 엄마가 그래 준 덕분에 아빠와 만났는걸?”
마리 언니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언니의 손이 움직이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양팔을 크게 벌렸다.
“새 이름도 받고 따뜻하고 큰 방도 생겼어. 룩스랑 슈가도 함께 살 수 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는걸. 또…….”
나는 마리 언니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언니와 함께 있게 됐잖아. 난 지금이 좋아.”
마리 언니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다.
으음, 울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난감해하는 걸 안 건지, 아니면 어린아이에게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던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언니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 * *
그 뒤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궁금했던 걸 물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다 언니가 말롱 부인에게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황태자와 만나 보호받게 되었는지.
그사이 슈가와 룩스는 침대 헤드 구석에서 몸을 말고 색색 잠들었다.
언니도 목걸이를 풀고 나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보고 함께 누운 뒤 나는 언니가 해 준 이야기만큼 내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내 능력과 회귀했다는 사실처럼 불확실하거나 믿기 어려운 얘기는 빼고.
“……그렇게 언니를 데려올 수 있었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옆에 같이 누워 말없이 내 어깨를 다독여 주던 언니가 손을 움직였다.
―좋은 아빠가 생겼구나.
“……응.”
나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확실히, 그는 좋은 아빠였다. ‘아빠’가 아닌 벨로크 대공으로서의 면모들은 모르겠지만.
또 반역하기 전에 도망쳐야 하는 건 여전하고…….
나는 괜히 목덜미를 더듬었다.
곧 손에 아빠가 걸어 준 반지 목걸이가 잡혔다.
내겐 보이지만,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거라는 마법 반지.
세 번 문지르면 바로 내게 올 거라던 아빠의 말이 떠오른다.
정말, 알게 모르게 날 많이 신경 써 줬네.
또 가슴이 뭉클해져 나는 목걸이에서 손을 뗐다.
대신 베개 모서리 부분을 잡고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감정이 좀 진정되더니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졸려.’
생각하자마자 하아암, 하품이 흘러나온다.
내가 하품하자 언니가 어서 자라는 듯 내 어깨를 다독여 준다.
그러고 보니 마리 언니가 뭘 하고 싶은지 알아야 아빠한테 부탁할 수 있을 텐데.
“언니.”
―응?
“나, 언니한테 묻고 싶은 게 또 생각났어.”
―뭔데?
“만약에 요정이 언니를 찾아와서, 원하는 걸 이뤄 줄 테니 뭐든 말해 보라고 한다면……. 언니는 뭐라고 할 거야?”
―내가 원하는 걸 뭐든지?
“응.”
―원하는 거라면, 실은 한 가지 있긴 한데.
있구나!
방금까지 졸음에 감기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번쩍 뜨인다.
―내가 원하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