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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44화 (44/125)

#44

나는 언니의 손짓에 최대한 집중했다. 마침내 언니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베리가 행복해지는 거.

“…….”

―표정이 왜 그래?

“조, 좋아서.”

헤헷.

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다른 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역시 마리 언니!’라며 감동했을 텐데.

지금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닌 만큼 실망스러웠다.

“그럼 나랑 관련된 거 빼면?”

―없는 것 같아.

“정말 없어? 언니가 원하는 걸 뭐든지 들어준다는데?”

―이미 대부분 이뤄져서, 내 소원은 없는 것 같아.

여러 차례 물어도 언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떻게 원하는 게 없지?’

이 경우는 생각지 못한 만큼 나는 당황했다.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그냥, 궁금해서.”

실은 아빠가 언니가 하고 싶은 걸 시켜 줘도 된다고 해서 물어본 거였지만…….

‘이래서야 어떻게 말해.’

차마 언니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때였다.

침대 머리맡에 올려 둔 보석함이 눈에 들어왔다.

착용자 대신 소리를 내어 주는 목걸이를 넣어 둔 보석함이었다.

‘언니도, 저런 거 없이 말하고 싶겠지?’

남들과 다르다는 건 꽤 힘든 일이다. 특히 배려가 없는 환경이라면 더욱.

‘원장이 독을 먹이기 전처럼 언니가 말할 수 있게 된다면, 하고 싶은 게 생길지 몰라.’

그동안 아빠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대한 언니를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마리 언니가 손을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베리, 자?

도리도리.

―방금 다른 원하는 게 생각났는데 들어 줄래?

“아까는 내가 행복해지는 거랬으면서.”

―비슷한데 다른 게 또 있다면 네가 서운해하려나.

“안 그럴걸?”

내 대답에 마리 언니는 또 뭐가 웃긴지 짧게 웃었다.

―그럼 말해도 돼?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 언니의 손이 서서히 움직였다.

―세상의 모든 아이가 아이답게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어. 사랑받고 클 수 있게.

“…….”

―그거면 좋을 것 같아.

나는 조금 숨이 막히는 기분이 되었다.

‘바보 같은 언니.’

원하는 걸 말하라고 했으면 자신의 행복을 빌지.

또 남을 위한 것이라니…….

‘언니답긴 하지만.’

마법 등불의 노란 불빛 아래에서 언니의 올리브색 눈이 반짝인다.

“언니 몸은 하나인데 이 세상의 모든 아이를 살피는 건 어렵지 않을까?”

―그래도 내가 힘닿는 데까진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

마리 언니가 다정스레 내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줬다.

나는 아빠에게 어떤 걸 부탁해야 할지 정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벽, 무심코 눈을 뜬 나는 침대에 잔뜩 웅크리고 자는 마리 언니를 발견했다.

‘불편하겠다.’

이거 나 때문이겠지? 괜히 같이 자자고 해서는.

나는 슈가와 룩스를 데리고 언니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내 방으로 돌아왔다.

문손잡이를 잡고 방문을 열던 나는 멈칫했다.

뭐지? 문틈 사이로 웬 하얀 털 뭉치 같은 게 보이는데…….

열어도 되나?

―왈!

작은 짖음에 깜짝 놀란 나는 고민하던 것도 잊고 문을 마저 열어 버렸다.

앗, 나도 모르게!

―왈! 왈왈!

열린 문 사이로 하얀 솜뭉치가 뛰쳐나왔다.

―끄르릉, 왈! 끼잉, 낑.

헉, 이 솜뭉치는 뭐야?

귀여워!

내가 보송보송한 흰 털과 까만 두 눈, 앙증맞게 튀어나온 코를 가진 솜뭉치를 내려다보던 때였다.

솜뭉치가 내 잠옷 치마 끝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앗, 안 돼! 옷 찢어진단 말이야.”

얇고 하늘하늘한 잠옷이 걱정된 나는 반대쪽 치마를 잡고 살살 당겼다.

“착하지? 이거 놓자.”

―끼잉, 낑!

으아!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잖아?

‘이 솜뭉치를 어쩌지?’

나는 여전히 내 치맛자락을 문 채 낑낑거리는 솜뭉치를 바라봤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어떻게 하다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아가씨?”

첼시의 목소리다!

반가운 기색으로 돌아보자 예상대로 첼시가 서 있었다.

“아직 주무시고 계실 줄 알았는데 일찍 일어나셨……. 어머, 벌써 만나셨네요.”

그녀의 손에는 작은 그릇이 들려 있었다.

궁금해 슬쩍 보니 묽은 죽 같은 게 들어 있다.

“그건 뭐야?”

“강아지에게 먹일 밥이에요.”

“강아지?”

“네. 지금 아가씨를 잡아당기는 하얀 애요. 벌써 친해지셨나 봐요.”

얘가 강아지라고?

이 쪼그맣고 하얀 솜뭉치가?

강아지는 원장이 키우던 블러디처럼 다 크고 사나운 애들 아니었나?

“얘는 너무 쪼그만데…….”

“어릴 때는 보통 작아요. 크면 여기서 조금 더 커지거나 엄청나게 커지고요.”

“큰 건 본 적 있어! 막 이만하고!”

“맞아요.”

내가 손을 뻗어 블러디의 크기를 짐작하듯 말하자 첼시가 웃는다.

“그런데 얘는 어디서 왔어? 어제까진 없었잖아.”

“시드밀 자작가에서 들어온 선물이래요. 얘는 살아 있어서 다른 하녀가 맡아서 돌보다 전달해 주느라 늦었다고 들었어요.”

아하. 그랬구나.

“그럼 내 강아지인 거야?”

“그렇죠. 혹시 강아지 싫어하세요?”

“얘는 좋은 것 같아.”

블러디는 사납고 무서웠지만, 얘는 안 그러니까.

내 말에 첼시는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그럼 아가씨께서 밥 주시겠어요?”

“내가?”

“네. 이 그릇을 방 안으로 가져가서 바닥에 내려 두시기만 하면 돼요.”

“좋아.”

내가 첼시한테서 그릇을 받으려 하자 룩스와 슈가가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아무 데나 둬도 괜찮아?”

“네. 대신 익숙해지도록 한곳에 계속 둬야 하니 아가씨께서 다닐 때 불편하지 않은 곳에 둬 주세요.”

음, 음. 어디에다 둘까.

그릇을 잡고 내 방을 쓱 훑은 나는 화장대 옆에 두기로 했다.

“자, 먹…… 빠르네.”

그릇을 바닥에 내려 두자마자 솜뭉치가 달려와 머리를 처박고 먹었다.

어찌나 열렬하게 먹는지 그릇이 달그락거리며 흔들렸다.

―저러다 체하는 거 아니야?

―누님, 새끼 때는 돌을 씹어도 멀쩡해, 찍!

―난 안 먹었는데. 넌 먹었어?

―조금. 이거 부끄럽네, 찍.

좋아할 건 아닌 것 같은데.

두 설치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솜뭉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짧지만 바짝 선 꼬리가 마구마구 흔들리며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잠시 뒤, 머리를 든 솜뭉치가 왈! 짖었다.

“다 먹었나 봐요.”

“벌써?”

아니, 얼마나 지났다고?

경이로운 속도에 놀라 그릇을 확인하니 정말 깨끗하게 비워져 있다.

“너 식탐이 많구나.”

그래도 귀엽지만.

작고 동그란 게 보면 볼수록 귀엽다.

살짝 만져도 괜찮지 않을까?

눈앞에서 매혹적으로 흔들리는 꼬리를 만지려던 때였다.

그르릉!

“아!”

“헉! 아가씨, 괜찮으세요?”

“으응, 괜찮아.”

솜뭉치가 내 손을 깨물었다.

아야야, 조금 따끔하네.

손을 감싸 쥐자 첼시가 아연한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내 손을 살피더니 별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한다.

“다행이에요. 이 강아지는 치우는 게 좋겠네요.”

“아, 아니! 치우지 마!”

나는 첼시를 가로막고 솜뭉치를 감쌌다.

그러자 솜뭉치가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내 손을 쳐 냈다.

―무엄하다아앗, 멍!

어? 어어……!

―어라, 쟤도 말하네.

―그러게? 계속 왈왈거리기만 했는데, 찍.

내가 당황해하는 동안 슈가와 룩스가 내 속마음을 대변하듯 말했다.

―쟤라니!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음성은 조금 카랑카랑하고 높았는데, 처음 듣는 음색이었다.

―지금 날 그렇게 부른 고야? 무엄하다, 멍!

―뭐야. 말투 이상해…….

솜뭉치의 귀여운 생김새와 전혀 딴판인 어투에 슈가가 질색했으나 솜뭉치는 완강했다.

솜뭉치가 한쪽 앞발을 척 내밀며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완자님이라고 불러, 멍!

“완자?”

―완자님이다, 멍!

“그거 강아지 이름인가요?”

첼시가 궁금하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아차, 첼시한테는 지금 대화가 안 들리겠구나.

무심코 읊조린 거였는데, 첼시는 그게 이 솜뭉치의 이름인 줄 안 모양이다.

“완자……. 귀, 귀여운 어감이네요, 아가씨.”

―완자님이라니까, 멍!

―푸핫! 이름이 완자래! 완전 이상해!

―그건 내 이름이 아니얏! 나는 막디무드 16세다, 멍!

―쟤 좀 아픈가 봐, 찍.

―완자님이래도, 멍!

내가 듣기에도 솜뭉치의 말은 이상했다.

워낙 귀엽게 생겨서인지 그마저도 귀여워 보였지만.

그래도 저 귀여운 솜뭉치의 이름이 막디무드 16세라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뭐든 내 예전 이름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솜뭉치를 막디무드 16세라고 부르는 건 좀 그랬다.

차라리 솜뭉치가 부르라는 대로 완자라고 부르는 게 낫지.

“완자와 놀아 주실래요?”

“그래도 돼?”

“네. 이 인형을 주면 된다고 들었어요.”

―함부로 만디디 마, 멍!

첼시가 탁자 위에 올려 둔 인형을 들자 솜뭉치가 그녀의 치맛자락 끝을 물고 늘어졌다.

하녀복은 비교적 질긴 재질이라 그런지 기겁하는 나와 달리 첼시는 침착했다.

“아직 어려서 뭐든 물려고 한다더니 정말이네요.”

으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첼시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인형을 건네주었다.

―내 거다, 멍!

이번에 솜뭉치는 날 향해 달려들었다.

―줘, 멍!

‘줄게. 착하지?’

나는 솜뭉치를 달래며 인형을 내밀었다.

인형을 본 솜뭉치는 재빨리 인형을 물고 구석으로 달려갔다.

“완자는 저 인형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첼시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저 솜뭉치의 이름이 정해진 것 같다.

‘완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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