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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54화 (54/125)

#54

‘수상한걸.’

만약 집사가 바로 대답했다면 동명이인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저러니 의심된다. 의도적으로 숨기는 느낌?

“아쉽다. 보고 싶었는데.”

내 혼잣말에 집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초상화는 없지만 어떤 분이셨는지는 대략이나마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정말?”

내가 솔깃해하자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앉으시겠습니까? 간식과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궁금했던 만큼 나는 냉큼 소파에 앉았다.

집사는 금방 다과를 내왔다.

‘항상 집무실에 차와 간식을 갖춰 두는 모양이네.’

쿠키를 집어 오도독 베어 먹자 달콤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음, 제법 맛있네.

그동안 집사가 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혹시 레일라 님에 대해 가장 먼저 듣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있어!”

나는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엄마는 어떻게 생겼어?”

“굉장한 미인이셨습니다.”

그런 추상적인 거 말고 자세히 알고 싶은데.

살짝 뾰로통해진다.

“옅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갖고 계셨습니다.”

헛, 너무 티 냈나!

나는 살짝 헛기침한 뒤 표정을 관리했다.

‘그런데 초상화 속 여자가 갈색 머리였던가?’

눈 색은 룩스 덕분에 또렷하게 기억났지만, 머리색은 헷갈렸다.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눈이 푸른색이었다면 나랑 비슷할까?”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뵌 게 제법 된 터라 기억이 안 나는군요.”

“그렇구나.”

역시 그 방에 한 번 더 다녀와야 하나?

“그래도 하나는 기억납니다. 마치 봄 같으신 분이었다는 걸요. 전하께도 봄이셨지요.”

“봄? 따스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도 레일라 님 앞에서는 한낱 청년에 불과하셨지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집사가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

“좀 더 크시면 이해하실 날이 올 겁니다.”

“음, 아빠가 엄마……? 어쨌든 많이 좋아했다는 거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쿠키를 먹었다. 이 정도도 못 알아들을 리가!

정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지금은 감탄하며 날 보는 집사의 시선은 좀 부담스럽지만.

‘아빠한테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나한테 물렁물렁한 걸 보면 비슷했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아빠가 사랑에 빠진 모습은 좀처럼 연상되지 않았다.

상상하는 걸 포기한 나는 잠자코 집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 결과, 나는 몇 가지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빠의 전 부인인 ‘레일라’라는 사람은 라일락 나무에서 피는 꽃을 좋아했다는 점.

공교롭게도 아빠의 엄마인 선황후도 라일락을 좋아해서, 이 저택에는 라일락이 많이 심겨 있다는 것.

“그럼 라일락은 아빠가 다 심은 거야?”

“아닙니다. 선황후 폐하께서 심으셨습니다. 처녀 적에 묘목을 구해 와 심으셨으니……. 거의 40년 됐겠군요.”

나무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잖아? 아니, 잠깐.

“그럼 이 저택은 아빠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네?”

“어디 대공 전하뿐이겠습니까? 드리텐 공작가와 오랜 역사를 함께한 저택입니다.”

“공작가? 드리텐은 상단 아니었어?”

“드리텐을 아시는군요.”

모를 리가. 상인 거리에 있는 가게들의 7할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진 곳인데.

“지금은 사라졌으나 드리텐은 공작가였습니다. 드리텐 상단은 공작가에서 세운 거고요.”

“그럼 아빠의 엄마는 드리텐이었던 거야?”

일순 집사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택의 역사를 굳이 알려 주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 관련이 있으니 말해 줬겠지.

내가 헤헷, 웃자 집사가 “역시 아가씨는 영특하시군요.”라며 감탄했다.

그, 그렇게 칭찬받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선황후 폐하께선 드리텐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셨습니다. 선황 폐하와 결혼하신 뒤, 드리텐은 황실의 소유가 되었으나 절반은 대공 전하께 상속되었지요.”

“절반이면 어느 정도야?”

“말 그대로입니다. 그 외에 이 저택과 몇몇 부지와 광산을 받으셨습니다.”

단순히 대공이라 황실에서 지원해 준 돈이 많은 줄 알았는데 이유가 있었구나.

“있잖아, 아빠랑 아빠의 엄마는 많이 닮았어?”

“직접 보시겠습니까?”

“직접?”

“제가 보관해 온 초상화가 한 점 있습니다.”

“보여 줘!”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집사가 책장 쪽으로 가 넓은 서랍을 열더니 천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왔다.

“이게 선황후 폐하의 초상화입니다.”

집사가 천을 풀자 한 여자의 초상화가 드러났다.

“자세히 봐도 돼?”

“물론이지요.”

집사가 내게 액자를 건네주었다. 볼 땐 몰랐는데 받고 나니 제법 크네.

액자를 받쳐 든 나는 초상화를 유심히 살폈다.

조금 앳된 인상에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는…….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자의 눈 색이 금색이란 것을 빼면 정말 아빠와 똑같았다.

만약 아빠에게 진짜 딸이 있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까 방에서 아기와 관련된 물건들을 봐서 그런가?’

문득 집사에게 아빠에게 자식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 충동을 꾹꾹 눌러 담았다.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잘 봤어.”

대신 집사에게 선황후의 초상화를 돌려줬다.

* * *

집사와 대화를 나눈 뒤, 돌아오자 샤비가 살갑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주인님의 생신은 알아 오셨어요?”

끄덕.

“역시 집사님은 알고 계셨군요. 그래서 언제라던가요?”

“지난주…….”

“네?”

“지난주였대.”

“정말요?”

샤비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처음 들었을 때 놀랐으니.

“저, 저는 몰랐어요…….”

“괜찮아. 집사가 그러는데 아빠는 원래 생일을 안 챙긴대.”

내 위로에도 샤비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아까와 같은 상황이 이어질 것 같아 화제를 돌리려던 찰나였다.

“그럼 아가씨께서 챙기시는 건 어떤가요?”

“응? 내가?”

“네. 아가씨께서 챙겨 주시면 좋아하실 거예요.”

“아닐걸.”

아빠가 날 챙기기는 해도 내 모든 행동을 좋아하진 않을 터였다.

게다가 아빠가 생일을 안 챙기는 이유가 전 부인의 기일 때문이랬으니…….

“그럴 리가요? 제가 주인님이었다면 좋아서 펑펑 울었을 거예요!”

아빠가 좋아서 운다니, 정말 상상 안 가는 모습이다.

애초에 전제부터 틀려 불가능한 일이지만.

“안 챙기던 걸 누군가 챙겨 주면 얼마나 고마운데요. 주인님도 그러실 거예요.”

만약 이 주제가 다른 것이었다면 “그런가?”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집사로부터 내막을 들은 후였다.

끙,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집사랑 약속해서 말할 수도 없고…….

여기서 딱 잘라 거부하면 샤비도 더 강요하진 않을 거란 걸 알지만 망설여졌다.

맨 처음 아빠가 내 생일을 챙겨 주겠다고 했을 때. 그리고 정말로 챙겨 주었을 때 느낀 벅차오름이 기억나서였다.

‘아빠의 전 부인이 죽은 건 내가 태어나기 전이니까, 이제는 챙겨도 괜찮지 않으려나.’

내 마음이 조금 기운 걸 눈치챈 건지 샤비가 덧붙였다.

“우선은 작게 준비해 봐요. 마침 토끼풀꽃이 피었더라고요. 그걸로 화관을 만들어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아빠한테 화관을?”

화관을 받고 그걸 쓸 아빠의 표정이 어떨지 예상되어 걱정부터 든다.

“하지만 아빠가 그런 걸 좋아할까?”

“선물은 정성이니까요. 아가씨께서 정성스레 만든 게 중요한 거죠.”

“나 화관 만들 줄 모르는데, 괜찮아?”

“제가 알려 드리면 되죠. 만드는 법도 생각보다 간단해요. 제 동생들도 어릴 때 제게 배워서 잘 만들거든요. 아가씨도 하실 수 있어요.”

“그럼 해 볼게.”

샤비의 장담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토끼풀꽃을 뜯어 와야겠네요.”

“여기 가져와서 만들 거야? 나가서 만드는 게 아니라?”

“생일 선물이니까요. 밖에서 만들면 주인님께서 보실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주인님 몰래 만들어 뒀다가 선물해 드리면 놀라시지 않을까요?”

음, 일리 있는 말이다.

도저히 선물할 수 없을 정도로 못 만들었거나 아빠가 정말 생일을 챙기지 않길 원하면 그냥 없던 일로 해도 되니까.

나는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몰래 생일 챙겨 주기’ 작전의 시작이었다.

* * *

며칠간 나는 샤비에게서 토끼풀꽃으로 화관을 엮는 법을 배웠다.

샤비가 말한 대로 화관을 만드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세 개의 꽃송이를 가운데 두고 그 뒤로 하나씩 엮어 나가면 끝이었으니까.

줄기가 예상보다 여려 조금 세게 힘을 줘 꺾으면 못 쓰게 되어 초반에는 꽤 애를 먹었지만, 샤비의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완성할 수 있었다.

“다 했다!”

“잘 만드셨어요!”

“예뻐요!”

쏟아지는 칭찬에 나는 헤헷 웃었다. 처음 만든 거라 엉성하긴 하지만 내가 봐도 제법 그럴싸했다.

“토끼풀꽃이 시들기 전에 아빠가 안 오면 어떡하지?”

“오실 거예요. 설령 안 오신다고 해도 그땐 다른 걸 만들면 되죠.”

“다른 거?”

“색종이로 만든 왕관이나 아가씨가 그린 그림 같은 거요?”

“나, 그림 못 그리는데…….”

“그래도 의미는 있으니까요.”

으음, 꽃이 시들기 전에 아빠가 돌아오길 빌어야겠네.

손재주는 나름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림은 정말 자신 없단 말이지.

“또 만들래.”

“지금요? 여기 있는 것들로는 모자랄 텐데……. 밖에서 꽃을 더 꺾어 올게요.”

“정말? 그럼 많이 부탁해도 돼? 이만큼! 많이!”

나는 일부러 팔 동작을 크게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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