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몇 달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걸 보면 뻔하지.’
애초에 내게 관심을 가진 건 그의 변덕 때문이었으니.
‘그래도 부탁해 보지, 뭐. 그런데 어떻게 부탁하지?’
황궁 출입도 허락받아야 하는 만큼 황족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아무나 못 했다.
‘편지를 써 줄 사람은 아빠뿐인데…….’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이 일을 잠시나마 미루기로 했다. 차마 아빠를 보러 갈 용기가 안 났으니까.
‘아직 못 읽은 책들이 있으니까 그것부터 다 읽고, 나중에 부탁하자.’
결정을 마친 나는 평소처럼 도서관에 가려고 했다.
“아가씨, 잠깐 정원을 산책하시는 건 어떠세요?”
샤비가 저렇게 물어 오기 전까지는.
“……정원 산책?”
“네. 날씨가 좋아요. 산책이 별로라면 오랜만에 흙 놀이를 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멀뚱멀뚱 샤비를 보던 나는 어째서 그녀가 이런 권유를 하는지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책만 읽는다고 산책한 적이 없구나. 바깥에서 논 적도 없고.
“델피니움과 국화가 예쁘더라고요. 나가면 생쥐님과 날다람쥐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하늘다람쥐라니까.
―찍? 우린 매일 나가서 놀았는데, 찍.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새삼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해 다행이지 싶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창문을 열어 주면 슈가와 룩스는 저들끼리 밖에서 놀다 왔으니까.
다시 들어오기 전에 젖은 수건으로 몸을 꼼꼼히 닦아 주는 건 제법 손이 가지만.
‘그보다 델피니움이면 대공가의 상징 꽃 아닌가?’
그 이야기를 들은 지는 꽤 되었는데 정작 나는 델피니움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델피니움 많아?”
“네. 원래는 가을 초반에 많이 피는데 올해는 좀 늦게 폈더라고요.”
고민하던 나는 정원에 가 보기로 했다.
샤비와 첼시와 함께 정원에 도착하자 나는 슈가와 룩스를 내려놓았다.
‘놀고 와.’
내 말에 슈가와 룩스가 잽싸게 나무를 타고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냥 풀어 줘도 되나요?”
“응. 돌아올 거야. 그런데 델피니움은 어디 있어?”
“아, 저기요. 저기 있는 꽃들이 델피니움이에요.”
샤비가 가리킨 쪽을 보니 긴 꽃대에 짙은 보라색 꽃들이 촘촘히 달린 꽃이 보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꽃 속에 작은 꽃이 또 있었다.
“예쁘다.”
문양으로 볼 땐 별생각 없었는데 실제로 보니 예뻤다.
그런데 어째서 델피니움이 가문의 상징이 되었을까?
다른 꽃들도 많은데.
“대공가의 상징으로 델피니움과 그믐달을 정해 준 건 선대 황제 폐하랬지?”
“네. 예전에 얼핏 말씀드린 것 같은데 아직도 기억하시네요?”
“그야 우리 아가씨는 똑똑하시니까.”
첼시가 자부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괜히 부끄러워진 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가문의 상징으로 정해진 이유가 궁금해서!”
“이유라면…….”
샤비와 첼시가 말끝을 흐리며 서로를 바라봤다. 표정을 보니 잘 모르는 눈치다.
“델피니움의 꽃말은 청명과 자비심입니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은 페리드 경이었다.
“그믐달은 기우는 달로 불리고 있고요. 그래서 ‘기울어도 청명할 가문이 되라’는 의미로 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앗, 맞아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들으니 기억나네요.”
“정말? 그런데 델피니움 꽃말은 내가 알던 거랑 다른데.”
첼시의 중얼거림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꽃말이 달라?”
“확실한 건 아닌데, 안 좋은 뜻이 많은 거로 알아요.”
그러고 보니 그믐달도 좋은 의미는 아니지 않나?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다.
이전에 아빠가 전 부인의 기일 때문에 생일을 챙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던 때처럼.
‘……됐어. 신경 안 쓸 거야.’
괜한 궁금증은 독이라는 건 이미 충분히 겪었다.
마음을 다잡는데 샤비가 날 불렀다.
“아가씨, 여기 토끼풀꽃이 있어요. 다 시들고 없을 줄 알았는데 아직 많이 남아 있네요.”
“그러네.”
“화관 만들지 않으실래요? 오랜만에요.”
샤비의 말마따나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뜬금없기도 했다.
빤히 쳐다보자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한다. 첼시도 마찬가지였다.
‘아하.’
갑자기 산책 얘기를 꺼내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이거 때문이었구나.
화관을 만들면 아빠한테 주라고 할 게 뻔했다.
‘아빠한테 갈 생각은 없지만.’
내 눈치를 보는 두 사람에게 미안했던 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바라던 답이었는지 둘이 웃으며 내게 토끼풀꽃을 따는 법을 가르쳐 줬다.
나는 열심히 꽃을 따 화관을 엮었다. 그래도 한번 만들어 봐서인지 이번에는 금방 만든 데다 모양도 잘 잡혔다.
“다 했다!”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예뻐요, 아가씨.”
“샤비 줄게.”
“네?”
나는 모르는 척 샤비에게 만든 화관을 내밀었다.
그러자 샤비와 첼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어라? 이게 아닌데?’ 하는 얼굴.
역시 이걸 들고 아빠한테 가 보라고 권유할 생각이었구나.
“저, 아가씨…….”
“아! 첼시 것도 금방 만들어 줄게! 페리드 경 것도!”
“……네, 감사해요.”
일부러 명랑하게 말한 보람이 있다.
샤비에게 억지로 화관을 떠넘긴 나는 다시 토끼풀꽃을 찾아 모았다.
‘페리드 경의 거까지 만들려면 더 많이 필요하겠지?’
이미 토끼풀꽃을 한 움큼 꺾었는데도 모자랄 듯해 정신없이 정원을 돌아다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던 나는 건너편에서 아빠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언제 돌아온 거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아빠가 안 돌아왔다고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마주칠지 몰랐던 탓인가.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이 혼잡해진다.
달려가 아는 척해야 하나? 아니면 아빠가 먼저 아는 척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예기치 못한 조우에 갈피를 못 잡고 잠시 서 있던 때다.
아빠가 먼저 날 등졌다.
* * *
“전하, 황실에서 전령이……!”
더스틴은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응당 안에 있을 줄 알았던 아시드가 없었다.
‘오전에 돌아오신 걸 봤는데, 금세 또 나가셨나?’
요즘 그의 주인이 저택에 머무르는 때는 드물었다. 황제가 가진 화염의 검에 대항할 수 있는 또 다른 고대 무기를 찾으러 다녀서였다.
아시드가 베로니카를 데려오기 전에는 항상 있었던 일이라 이상한 건 아니다.
다만, 베로니카가 온 뒤로는 황제가 시킨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외출이 드물었는데.
‘아가씨가 그 방을 연 게 도화선이었던 거겠지.’
레일라의 초상화와 태어날 아기를 위해 손수 골라 준비한 가구들이 있는 그 방.
아시드에게는 소중한 추억이요, 동시에 끔찍한 과거의 잔재였다.
그것을 알기에 주기적으로 잠금을 꼼꼼히 확인했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베로니카가 그 방에 들어갔다. 하필 아시드에게 현장을 들켰고.
아마 그때를 계기로 아시드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소홀히 했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아시드는 며칠씩 아무 말도 없이 저택을 비웠다.
지금도 그런 모양이다만…….
‘때가 안 좋군. 하필 황실에서 지령이 왔을 때 자리를 비우시다니.’
황제는 인내와 자비가 없었다. 정확히는 아시드 ‘한정’으로 없었다.
그에게 있어 아시드는 이복형제라기보다는 노예, 혹은 소유물에 가까울 테니.
그러나 더스틴의 우려는 금방 끝났다. 바로 뒤에서 들려온 음성 때문이었다.
“뭐 하는 거지?”
“전하.”
더스틴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 놀랐으나 그를 찾고 있었던 만큼 안도가 이어 찾아왔다.
“지령이 왔습니다.”
아시드가 손을 내밀자 더스틴은 돌돌 말린 밀서를 건네었다.
이어 밀랍 인장을 뜯고 가죽끈을 풀자 짤막하게 적힌 한 줄이 보인다.
[로시드 더그. 사고사.]
“더그 백작의 이름이 로시드던가?”
“차남일 겁니다. 최근 황실 기사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아시드는 밀서를 찢었다. 반으로 찢어진 종이는 즉시 불타 사라졌다.
잿가루가 허공에 날리는 듯하다 금세 사라진다.
더스틴은 무고한 청년의 명복을 빌었다.
“오래 걸리십니까?”
“그렇겠지.”
아시드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대놓고 죽이는 것보다 사고로 위장하는 게 더 손이 가므로.
게다가 황실 기사 수석이라니, 고전할 게 뻔하다.
그러니 델러노가 제게 이 일을 맡긴 것이겠지만.
설령 흔적을 들킨 때에는 ‘벨로크 대공이 광증으로 죽였다’라고 둘러대기 위해.
“그런데 그건 뭐지?”
“아. 황태자가 아가씨께 보낸 것입니다.”
“황태자?”
아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이 왜? 내가 없는 동안에도 이랬나?”
“아니요, 처음입니다. 제 추측입니다만, 초대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달 뒤가 황태자의 생일이니까요.”
“한번 봐야겠군.”
편지는 더스틴의 추측대로 초대장이었다.
특별할 것 없이 상투적인 문구였지만, 아시드에게는 그것마저 걸렸다.
순식간에 초대장이 찢겨 불타 사라졌다.
“베로니카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겠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더스틴은 조금 늦게 대꾸했다.
‘아가씨를 미워하시는 게 아니었나.’
그대로 떠나가려는 듯한 아시드를 보며 더스틴이 급히 입을 열었다.
“전하, 가시기 전에 아가씨를 보는 건 어떠십니까?”
말을 끝낸 그가 숨을 골랐다. 고작 한마디 꺼냈을 뿐인데 제법 긴장되었다.
그러나 그리해야만 했다. 베로니카는 어리니까.
아무 설명도 없이 무작정 외면하는 건 가혹한 일이었으니.
“이미 봤다. 토끼풀꽃을 따고 있더군.”
아시드는 베로니카를 떠올렸다. 한쪽 팔 가득 토끼풀꽃을 따다 저와 마주하고는 멈칫하던 아이.
처음 베로니카가 ‘그 방’에 들어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미치도록 화가 났다.
장기간 마력을 사용해 정신이 불안정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제 과거가 자세하게 들춰지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그러잖아도 불안정한 정신이 더욱 요동쳤으므로.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 그리고 공포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아시드는 자신이 베로니카에게 보인 반응이 잘못이란 걸 알지만.
‘사과해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는 건 어려웠다.
외면하듯, 며칠 동안 베로니카로 인해 잠시 미뤄 뒀던 고대 무기를 찾다 돌아왔더니 때마침 아이가 보였다.
반사적으로 또 모른 척하려던 그는 결심을 굳혔다.
여태껏 계속 피했으면서 또 도망치려 하다니, 우스운 꼴이지 않은가.
마음을 다잡고 내려갔으나 막상 베로니카와 시선을 마주하니 숨이 턱 막혔다.
토끼풀꽃을 가득 안고 자신을 보는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떠올리면 안 되는 사람이 떠올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