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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59화 (59/125)

#59

까, 깜짝이야! 대체 언제 온 거지?

페리드 경은 왜 제지를 안 했…… 아니, 이건 페리드 경을 탓할 게 아니지. 황태자를 어떻게 막겠어.

반사적으로 페리드 경을 보려 했던 나는 시선을 바로 했다.

“놀랐나 보네.”

그럼 갑자기 말 걸었는데 안 놀라겠니.

속으로 구시렁거리는데 카드릭이 내 손에 있는 책을 흘긋 보며 물었다.

“꽃 좋아해? 선물해 줄까?”

“괜찮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꽃을 좋아하는 편에 속하긴 하나 선물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잠깐 기분이야 좋아지겠지만 딱 그뿐이니까.

‘선물받을 거면 차라리 보석이 낫지.’

모아 뒀다가 도주 자금으로 써도 되고.

이런 이유 말고도 비상금은 많을수록 좋았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그럴 때는 돈이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되니까.

“그럼 뭘 좋아해?”

“돈……이 아니라!”

헙!

나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속내를 드러낸 것도 그렇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도서관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황급히 주변을 살피자 카드릭이 맑게 웃었다.

“눈치 볼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뿐이니까.”

“사서들도 있는데?”

“사서는 이용자가 아니잖아. 그보다, 돈을 좋아하는구나.”

어쩌면 못 들었거나 그냥 넘어가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그러기엔 내가 너무 크게 말하긴 했지…….

이미 말해 버린 거, 변명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

“그거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걸.”

“대공가 사정이 어렵진 않을 텐데.”

“돈은 많을수록 좋은걸. 어쨌든, 이건 그냥 본 거야.”

나는 책을 본래 자리에 꽂아 넣었다. 꽃말을 확인했으니 더 볼 필요 없었다.

“너도 책 찾으러 온 거야?”

“아니. 너 보러.”

“내가 있는 줄 어떻게 알고?”

“편지 보냈잖아. 언제쯤 방문할 거라고.”

앗, 맞다! 그랬지! 내가 알려 줘 놓고 기억 못 한다니!

바보 같아 보였겠지?

으, 부끄럽다.

“통행증 때문이 아니라 날 보려고 날짜랑 시각을 적으라고 했던 거야?”

“맞아.”

왜지? 내게 흥미가 떨어진 게 아니었나?

“몇 달 동안 날 보러 오지도 않았으면서…….”

“나 기다렸어?”

“아니?”

나는 기겁하며 대꾸했다.

살얼음이 사르르 녹듯, 카드릭이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웃었다.

그 표정을 보자 느낌이 왔다. 내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다는 걸! 진짜 안 기다렸는데!

하지만 카드릭의 입장에선 안 믿기지 싶었다.

내가 듣기에도 조금 전 내 어투는 그에게 섭섭함을 느끼고 원망하는 것 같았으니까.

“널 보러 갈 핑계가 없었어.”

“무슨 핑계?”

“대공이 있잖아. 그럴듯한 핑계라도 있어야 찾아가지. 그래서 초대장을 보낸 건데 답신이 없어서.”

“날 초대했어? 언제? 아니, 무슨 초대?”

“내 생일 연회.”

“그런 거 못 받았는데 정말 보냈어?”

“내가 뭐 하러 거짓말하겠어? 겨우 이런 일로.”

듣고 보니 그렇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걸 받은 기억은 없는데.

“못 받았다니 또 보내면 되지. 잠깐이라도 좋으니 꼭 와.”

선뜻 가겠다고 답할 수 없었다. 아빠의 반응이 걸렸으니까.

가뜩이나 미움받는데 여기에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하면?

뭐라고 할지 너무 뻔하지.

“미안. 못 갈 것 같아.”

“대공 때문에?”

어떻게 알았지?

내가 놀라 카드릭을 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인다.

“신경 쓰지 말고 와. 대공 정도는 내가 막아 줄 수 있어.”

“어떻게 신경 안 써?”

내 밥줄인데.

나도 모르게 억양이 격양된다.

“지금 여기에 온 것처럼 오면 되지. 너, 대공한테 허락받고 온 거 아니잖아.”

“그걸 어떻게……?”

그간 카드릭이 내 심리를 꿰뚫어 본 적은 많았으나 이번만큼은 진짜, 진짜로 놀랐다!

정말 어떻게 안 거지?

소문으로만 듣던 황실 정보원이란 게 있는 건가?

아니,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일상을 낱낱이 파헤칠 리는 없을 텐데.

“편지를 내게 썼잖아.”

“어?”

“대공의 허락을 받았다면 나한테 쓸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한테 썼겠지.”

“허락받고 너한테 쓴 걸 수도 있잖아?”

“이미 아니라고 실토했잖아. 가정하는 의미가 없지.”

어쩜 이리 맞는 말만 하는 걸까. 얄미워 죽겠다.

“여하튼, 올 거지? 내 생일 연회.”

아니? 안 갈 건데? 내가 왜?

막 그렇게 내뱉으려던 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내 입을 다물게 했다.

‘지금은, 친분을 다져 두는 게 좋지 않나?’

이전에도 몇 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마다 카드릭은 어차피 죽을 사람, 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 전에 도망치면 되잖아?’

그때까지는 이렇게 호감을 사고 친분을 쌓다가, 도망칠 때 도와 달라고 하는 거지!

너무 이용만 하는 것 같아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긴 한다.

어쩌면 카드릭에게 그의 미래를 말해 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생각이 안 들었다.

분명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추궁할 테니까. 믿어 줄지도 의문이고.

‘믿어 준다 해도 문제야.’

나는 그 뒤에 밀려올 여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뛰어난 마법사인 아빠와 카드릭, 그리고 황제 사이에 휘말리면 괜히 나만 중간에 껴서 터질 테니.

“……갈 수 있다면, 갈게.”

“좋아.”

카드릭이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나는 꽤 지쳤다.

카드릭을 상대할 땐 생각이 많아져서인지 대화를 끝낸 지금 기력이 없었다.

어서 책을 빌려 돌아가고 싶을 뿐.

“혹시 마법과 관련된 책이 어딨는지 알아?”

“마법에 흥미가 생겼어?”

“비슷해.”

나는 두리뭉실하게 둘러댔다. 자세히 알려 줄 필욘 없으니까.

바로 안내해 줄 줄 알았던 것과 달리 카드릭이 흐음, 소리를 내며 날 바라봤다.

왜 저러지?

“네가 찾는 건 없을 거야. 아니, 있기야 하겠지만 너는 못 볼걸.”

“어?”

“마법의 기초쯤은 황궁 도서관에 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데, 여기에 왔다는 건 따로 찾는 게 있다는 거겠지.”

분명 추측일 텐데 정확해서 소름 돋는다.

“난 왜 못 보는데?”

“금서일 테니까.”

“금서……?”

머리가 멍하다.

“그럼, 못 봐?”

“너뿐만 아니라 그 누가 와도 못 봐. 오직 직계 황족만 볼 수 있으니까.”

금서라니? 금서라니!

복병의 등장으로 인해 삽시간에 목표가 사라졌다.

어디 그뿐이랴. 허망했다.

난 뭐 때문에 한 달 가까이 도서관에 처박혀 지낸 거지?

황궁 도서관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힘들게 편지까지 썼는데.

헛된 노력이었음을 알게 되니 억울하고, 분한데, 이 감정을 어디다 풀 데가 없으니 몸에 힘이 쭉 빠진다.

“알려 줘서 고마워.”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는 걸 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기력이 없었다.

일단 돌아가서 쉬자. 그다음에 다른 걸 생각하든…….

내가 페리드 경 쪽을 보며 돌아가자고 하려던 때였다.

“보고 싶어?”

“어?”

“금서 말이야. 궁금하다면 보게 해 줄 수 있는데.”

“어떻게?”

“나랑 가면 되잖아.”

어? 그런 방법이?

“그래도 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않는다면.”

당연한 말을!

“약속할게!”

순간, 카드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시선을 따라가니 새끼손가락과 엄지만 펴서 내민 내 손이 보인다.

헛! 언제 내밀었지!

원래 없었는데 주위에서 오냐오냐해 줘 생긴 버릇이었다.

재빨리 손을 거두려는데 카드릭이 내 새끼손가락 끝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그래, 약속.”

그러더니 자연스레 내 엄지와 제 엄지를 맞닿게 하더니, 이만 가자며 내 손을 이끈다.

‘어울려 줄 줄 몰랐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카드릭이 이러다니.

“넌 거기서 기다려.”

카드릭이 걸어가다 말고 내 뒤쪽을 보며 말했다.

맞다, 페리드 경이 있었지.

나도 돌아보니 날 따라오려다 멈춘 듯 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페리드 경이 보인다.

“죄송하지만, 제 소임은 아가씨를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있으니 괜찮아.”

페리드 경은 더 대꾸하는 대신 날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나도 카드릭의 편이었다. 게다가 금서가 있는 곳에 가는 거니까.

“다녀올게. 걱정하지 마.”

“……입구까지만 따라가겠습니다.”

내가 그래도 되냐는 뜻으로 카드릭을 보니, 그가 선뜻 고개를 끄덕인다.

“입구까지라면.”

* * *

“여기야.”

카드릭이 문을 열었다. 금서들만 모아 뒀다길래 보안이 철저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지키는 사람도 없다.

“여기 맞아?”

페리드 경을 앞에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오며 내가 물었다.

“못 믿겠어?”

“경비가 없길래. 금서가 있는 곳이니까 지키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어.”

“필요 없어. 결계가 쳐져 있으니까.”

“결계?”

“응. 직계 황족이나 허가증이 있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게. 습도를 유지하고, 먼지가 안 끼게 하는 마법도 걸려 있어.”

“난 허가증 받은 거 없는데?”

“그래서 손잡고 있잖아.”

카드릭이 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잖아도 아까 잡힌 뒤로 쭉 잡혀 있어 언제 놓아줄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이거 때문이었구나.

“그럼 페리드 경은 어차피 못 들어왔겠네? 네가 손을 잡아 주지 않는 한?”

“이해가 빠르네.”

카드릭이 입꼬리를 올렸다.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린애한테 칭찬받는 기분이란!

평소 마리 언니나 글레나 부인처럼 나보다 훨씬 어른인 사람들에게 칭찬받던 것과는 다르게 복잡미묘했다.

‘어쨌든, 이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거지.’

손에 땀이 났다면 얼른 놓고 싶었겠지만,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잡고 있을 만했다.

책을 찾고 꺼낼 땐 좀 불편하겠지만.

“여기 있는 게 다 마법에 관련된 거야?”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들도 있고. 나도 여기 있는 책을 다 본 게 아니라서 잘 몰라.”

“막 돌아다니면 안 되겠지?”

“책만 망가뜨리지 마.”

“안 그래.”

날 대체 뭐로 보고?

작게 코웃음을 친 나는 카드릭의 손을 잡고 도서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금서라 그런가?’

어째 제목들이 범상치 않네.

《황자는 왜 남기사한테 케이크를 주었을까?》

《고대 악마를 손쉽게 불러내는 100가지 방법》

《땅 파서 1천 골드 버는 법》

……이런 책들 사이에 내가 찾는 책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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