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61화 (61/125)

#61

‘편지 때문에 온 걸까?’

평소라면 집사가 와도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저지른 일이 있는 만큼 지레 찔렸다.

“무슨 일이야?”

“황궁에 서신을 보내려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으응.”

“혹시 황태자 전하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시려는 건지요?”

어떻게 알았지? 설마 편지를 열어 봤나?

“아, 편지를 보진 않았습니다. 아가씨께서 동봉하신 것인데 열어 볼 리 없지요. 그저 제 추측일 뿐입니다.”

예전부터 느끼건대 집사는 속마음을 잘 읽는다. 아니면 내 표정이 읽기 쉽든지.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클 듯싶지만.

“맞아.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 갈까 해.”

내 확답에 집사의 낯빛이 점점 안 좋아졌다. 난감함이 잔뜩 깃든 얼굴에 나도 괜히 눈치가 보였다.

‘아빠의 허락 따위!’라고 여기며 과감하게 행하긴 했지만 내내 신경 쓰였으니까.

“……안 될까?”

집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에 점점 불안이 도진다.

역시 무모했던 걸까? 아니, 무모했던 거야.

이미 제멋대로 행동해서 아빠에게 미움을 사 버렸으면서 또 정신 못 차리고, 이번에도…….

“미안.”

“예?”

“내가 잘못했어. 연회에 안 갈 테니까, 그 편지는 없던 일로 해 줘.”

카드릭한테는 미안하지만, 어차피 갈 수 있으면 가겠다고 해 둔 참이다.

못 간다고 보내도 그러려니 하겠지.

바보같이 이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방방 뛰었다.

“아가씨.”

바닥만 내려다보는데 집사가 쭈그려 앉으며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우선 사과드립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

“전하께서 안 계신 터라 염려가 앞서 그랬다는 건 변명이겠지요. 아가씨의 의사가 중요한 건데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내가 눈만 깜빡이는 동안 집사가 말했다.

“서신은 예정대로 보내겠습니다. 그러니 다녀오시지요.”

* * *

더스틴은 황태자 궁으로 서신을 보내며 차오른 한숨을 내쉬었다.

베로니카 앞에서는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걱정이 앞섰다.

‘전하께서 아시면 분명 화내시겠지.’

베로니카 몰래 황태자의 초대장을 불태우고 모르는 일이라고 못 박은 분이다.

그리하여 황태자의 초대장이 재차 왔을 때, 더스틴은 초대장을 베로니카에게 전달하지 않으려 했다.

하필 초대장을 숨기려 할 때 베로니카의 전담 하녀인 첼시가 찾아와 “이거 아가씨께 온 건가요?”라고 묻는 바람에 당황해 그대로 내주었지만.

‘아가씨의 성격상 안 가실 줄 알았건만…….’

그런데 웬걸? 가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아시드를 생각해 만류하려 했으나 결과는 이렇다.

제 손으로 직접, 황궁에 편지를 보내는 상황이지 않은가.

사실 중간에 빼돌리려면 얼마든지 빼돌리고, 사고가 나 누락된 것 같다고 거짓말할 수 있지만…….

‘미안.’

‘내가 잘못했어. 연회에 안 갈 테니까, 그 편지는 없던 일로 해 줘.’

그 말을 듣고 나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난번에도 그러셨지.’

황궁 도서관에 가고 싶다며, 편지를 황제가 아니라 황태자에게 써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무심코 그래도 된다고 말하려던 때, 뒤늦게 아시드가 카드릭의 초청장을 찢었던 일이 떠올라 난감해하자 바로 알아차리고는 괜찮다고 하지 않았던가.

섣불리 말을 내뱉은 제 잘못인데 아이가 눈치를 보다니.

그뿐만 아니다. 돌이켜 보면 베로니카는 항상 그랬다.

주위 눈치를 살피고 바라는 게 없고, 체념부터 한다. 전혀 어린아이답지 않다.

혹자는 이런 베로니카의 성격을 좋아할 것이다.

아이답지 않게 얌전해 키우기 편하다고.

그러나 아이답지 않다는 게 늘 좋은 말은 아니다. 보통은 주변 환경이 그리 만드니까.

특히 베로니카가 대공가에 오기 전을 생각하면 천성일 확률은 더욱더 없었다.

더스틴은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겼다. 비록 베로니카와 황태자가 친해지지 않길 바라는 아시드가 이 사실을 알면 언짢아하겠지만, 결국 이해하리라. 베로니카의 일이니.

* * *

‘뭐가 좋을까.’

카드릭의 생일 연회에 가기로 한 이후로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아무렴 생일이라는데 선물은 줘야겠지?’

내 생일 때 아주 커다란 선물들을 줬던 만큼 차마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마리 언니에 이어 소리를 내게 해 주는 마도구도 줬지.’

받을 땐 고맙다고만 여기고 말았는데, 막상 갚으려 하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집사가 생각해 둔 게 있다면 금액은 최대한 맞춰 준비할 테니 말만 하라고 했지만……. 너무 비싼 건 말하기 힘들었다. 그 돈이 내 돈은 아니니까.

‘적당한 금액 내에서 선물을 골라야 하는데, 어떤 걸 줘야 하지?’

생일 선물을 고민하며 알게 된 거지만, 카드릭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갖고 싶어 하는지 전혀 몰랐다.

애초에 그런 걸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니 당연하겠지만.

샤비와 첼시에게 도움을 요청해 봤지만, ‘이거다!’ 싶은 건 없었다.

‘마리 언니한테 물으면 뭔가 나오지 않으려나? 언니는 애들을 많이 접했으니까.’

카드릭은 보통 아이는 아닌 데다 황태자이기까지 하니 마리 언니에게 상담해도 큰 도움은 안 될 것이다.

‘그래도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단 나을 거야!’

그렇게 나는 주말에 펠리시타스 보육원을 찾았다.

다행히 이번에 언니는 여유로웠다.

언니와 반갑게 인사한 뒤 나는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러니까 네 또래 남자아이에게 선물할 걸 같이 고민해 달란 말이지?”

“응!”

물론 선물을 받는 상대가 황태자인 건 쏙 빼고.

“어려운 문제네. 보통 난 그 애가 뭘 좋아하는지 관찰해 뒀다가 선물하거든.”

“그럼 보통은 뭘 좋아해?”

“음, 장난감 블록이나 가죽으로 만든 공? 드물지만 크레파스랑 조각칼을 좋아하기도 해.”

장난감 블록, 공, 크레파스, 조각칼……?

그것들을 들고 노는 카드릭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이상해졌다.

하나같이 카드릭과는 안 어울리는 것들이었으므로.

첼시와 샤비가 말한 대로 목검이나 커프스단추, 깃펜 세트가 나을지 모르겠는걸.

“별로야?”

“그냥, 걔는 그런 거 안 좋아할 거 같아서.”

“그건 모를 일이지 않을까? 너도 내가 짜 준 목도리 받고 좋아했잖니.”

목도리? 언니가 짜 준?

“생각 안 나? 네가 세 살 때 양털 구해 와서 짜 줬는데.”

마리 언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섭섭함이 가득 깃든 그녀의 얼굴에 나는 멈칫했다.

“응, 기억하지. 기억해.”

사실 거짓말이다. 대체 세 살 때 일을 어떻게 기억하냐고! 애석하게도 내 머리는 그만큼 좋진 않았다.

“하얗고, 몽글몽글했잖아.”

“늙은 양이라 털이 거칠고 억셌는데…….”

“언니의 정성이! 그걸 받은 내 마음이 몽글몽글!”

말하고 나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생각해도 실패한 주제 전환이었다.

미안해, 언니. 사실 기억 안 나. 먼저 실토하려던 찰나였다.

말간 웃음이 앞에서 들려온다. 소리의 출처는 마리 언니였다. 언니는 한참 웃다가 내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냥 한 말이니까.”

나는 말없이 언니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용히 입 다물고 있을걸. 괜히 아는 척해서는.

마리 언니는 여전히 후후, 웃으며 내 등을 다독였다. 한참 가만히 있던 나는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뭐 할 거 없어? 저번처럼 프테리디움 잎줄기 자르는 거 해도 되는데.”

“프테리디움을 잘라? 내가 그걸 시켰어?”

“응?”

기억 안 나나? 나는 의아하게 언니를 바라봤다.

“저번에 왔을 때 나한테 가위랑 바구니 줬잖아? 그 남자애랑 같이하라고.”

“남자애? 누구?”

“테…….”

입을 열려던 나는 멈칫했다. 뭐지?

“테, 테……?”

왜 이다음이 기억 안 나지?

단순히 이름만 기억 안 나는 거라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남자애의 외양은 물론이거니와 목소리가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같이한 것 같은데?

마치 머릿속에 안개가 뿌옇게 낀 느낌이다.

아무리 내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 해도 이 정도는 아닐뿐더러 이렇게 잊을 만큼 공백이 길었던 것도 아닌데.

심지어 생각할수록 점점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정말 그 남자애와 함께 잎줄기를 잘랐는지조차 의심하게 되었으니까.

“베리.”

언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정말 내가 그랬다면 미안해. 난 내가 한 줄 알았거든. 내가 왜 그런 걸 시켰지? 미안해.”

“아니야, 언니. 내가 착각한 것 같아. 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꿈에서 본 걸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믿었나 봐.”

말은 이렇게 해도 나는 그 일이 착각이라고 생각 안 했다.

내용은 기억 안 나도 대화도 나누고, 같이 잎줄기도 잘랐는데…….

어째서 무엇 하나 또렷이 기억나는 게 없지?

하지만 이런 불신과는 별개로 내 착각이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긴 했다.

언니도 기억 못 하고, 나도 설명 못 하는 일이었으니.

언니와 노닥이고 갓 구운 쿠키를 간식으로 먹고 보육원을 나오는 길에도 여전히 아까의 일이 미심쩍어 나는 페리드 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때 페리드 경도 함께 있었으니까.

“페리드 경, 혹시 저번에 내가 여기 와서 뭘 했는지 기억해?”

“……?”

“정원에 나가서 어떤 식물 잎줄기를 잘랐던 거 같은데, 언니가 그런 적 없다고 해서.”

페리드 경은 말이 없었다. 잠시 기억을 되짚는 듯하던 그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정원에 나가셨던 건 사실이나 식물의 잎을 자르진 않으셨습니다. 혼자 흙으로 성을 만드셨지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마리 언니에 이어 페리드 경까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착각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자꾸 그게 정말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는 걸까?

“아가씨, 아가씨.”

석연치 않은 느낌에 자꾸 그때 일을 되새기는데 첼시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불렀냐는 뜻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혹시 황태자 전하께 드릴 선물은 정하셨어요?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 응. 첼시 말대로 깃펜 세트를 선물할까 봐.”

“좋은 결정이세요! 그럼 나온 김에 세공사한테 의뢰하러 가는 게 좋겠네요.”

“지금 주문 넣어도 제작이 될까? 생일 연회는 다음 주니까 많이 촉박할 거 같은데…….”

“괜찮아요! 대공가에서 발주한 것이니 밤새워서라도 온 힘을 다해 만들 거예요.”

자신만만한 첼시의 장담에 나는 나 때문에 고생하게 될 세공사의 안부를 빌었다.

* * *

“페리드 경.”

베로니카의 호위를 끝내고 개인 훈련 시간을 보내던 라이칸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검을 휘두르다 말고 뒤돌아봤다.

처음 보는 하녀가 그에게 다가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닦으세요.”

“괜찮습니다.”

“필요하실 거예요. 줄곧 기다리시던 소식이니.”

라이칸이 단호하게 쳐 내려던 때다. 의미심장한 하녀의 말에 그가 멈칫했다.

기다리던 소식?

“무슨……?”

그사이 하녀가 빙긋 웃으며 그의 손에 손수건을 강제로 쥐여 주며 빠르게 속삭였다.

“생각이 바뀌시면 내일까지 절 찾아오세요. 저는 주방에서 일하고 있어요.”

하녀는 라이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돌아섰다.

그 모습을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던 라이칸은 손에 쥔 손수건을 확인했다.

민무늬에 새하얀 게 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손수건이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실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사실 그의 것과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으로 놓인 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실라 페리드]

라이칸은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손수건을 주머니 속으로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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