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앞을 막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격이 아니었나?’
왠지 머쓱해 슬며시 팔을 내리던 나는 멈칫했다.
‘내 방이 아니야?’
분명 처음 보는 곳인데 어쩐지 낯익은 곳이었다. 마치 옛 보육원 원장이 날 리슬리란테에 넘기는 바람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곳과 비슷한 느낌.
심지어 내가 있는 곳은 모든 곳이 꽉 막힌 철창이라 더욱 기시감이 들었다.
“룩스? 슈가?”
―불렀어, 찍?
불안한 마음에 둘을 불렀으나 돌아온 대답은 룩스뿐이었다.
“슈가는?”
―누님? 찍? 없네?
그러고 보니 슈가는 서랍 위에 있었던가? 룩스는 나한테 있어서 같이 있는 거고?
―여긴 어디야, 찍?
“나도 모르겠어.”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짚이는 구석은 있었다.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으나 내 방에 침입한 페리드 경.
정체불명의 빛. 그리고 이곳.
누군가 페리드 경을 시켜 날 이동시킨 듯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라고 생각하기엔 이미 나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황제에 의해서.
아마 이번도 그때와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은데……. 도대체 누가 페리드 경에게 이런 짓을 시킨 거지? 어떤 이유로?
‘설마 황제인가?’
아빠와 사이가 나쁘니 날 데리고 협박하려는 걸까?
아니면 내가 카드릭과 친하게 지내서? 자기 아들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경고하려고?
……는 아니란 거 안다. 황제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아빠와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게다가 카드릭과 어울리는 게 싫었다면 진즉 경고를 했겠지, 굳이 이런 식으로 날 데려올 이유는 없지 않나.
그나마 유력한 이유는 아빠, 그러니까 ‘벨로크 대공’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일 확률이 높다.
일단 나는 양녀이니 어떤 식으로든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을 수도 있고.
‘헛다리 짚은 꼴이지만.’
나는 쇠창살을 쥐고 흔들었다. 당연하지만, 쇠창살은 꿈쩍도 안 했다.
이렇게 자주 갇힐 줄 알았으면 자물쇠를 따는 법이라도 배워 둘걸. 아니면 쇠창살을 부수는 법이라든가.
그보다 페리드 경은 왜 그런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배신자였을까?
비록 그가 절도범이 아니란 건 알게 되었으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룩스, 넌 이 사이로 나갈 수 있지?’
―물론, 찍!
‘주위를 둘러보고 와 줄 수 있어? 뭐가 있는지, 밖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같은 거.’
―알겠어, 찍!
바닥에 내려 주니 룩스가 쇠창살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간다.
“이제 기다려야 하나…….”
나는 무릎을 모은 채 우울하게 읊조렸다.
이게 대체 무슨 봉변인지. 역시 대공 따위, 돕는 게 아니었다. 오지랖 부릴 게 아니라 그냥 도망쳐야 했어.
좀 잘해 주는 것 같아도, 환경이 괜찮아진 것 같아도 ‘알 게 뭐야?’ 하면서 도망쳐야 했는데.
무릎에 얼굴을 대고 있는데 문득 무언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슬쩍 곁눈질하니 새끼손가락에 있는 반지가 보인다.
대공이 내게 생일 선물로 줬던 반지.
‘그러니 위험한 일이 생기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문지르도록. 네게 바로 갈 테니.’
분명 그렇게 말하며 반지를 줬지.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싫지만,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자존심 상한다.
‘그래도 이것뿐이야.’
자존심이 날 살려 주진 않으니까. 그건 내가 지난 생을 통틀어 뼈저리게 느낀 것이었다.
자존심을 챙겨도 되는 건 그래도 되는 힘이 있을 때뿐이었다. 지금 내겐 그런 힘이 없다.
‘세 번 문지르라고 했던가?’
나는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반지를 문질렀다.
하지만 아빠가 내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혹시 내가 횟수를 잘못 기억한 건 아닐까, 잘못 문지른 건 아닐까 싶어 더 문질렀으나 반지는 잠잠했다.
“바로 온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울컥한 마음에 반지를 노려보던 나는 지친 몸을 끌어안고 힘없이 앉아 있었다.
‘다들 내가 없어진 걸 알아도 못 구해 주겠지?’
아빠가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희망이 사라진 지금은 암담하기만 했다.
주위가 캄캄한 철창 속에서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있던 때다.
타닥! 뭔가가 뛰어오는 소리.
‘혹시?’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아빠를 떠올리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소리를 낸 건 룩스였다. 날 향해 뛰어오는 작은 생쥐를 보니 부풀었던 가슴이 도로 가라앉았다.
―나 왔다, 찍!
바보같이 뭘 기대한 거야. 아빠가 올 거면 진즉 왔을 텐데.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룩스를 들어 올렸다.
‘고생했어. 들키진 않았지?’
―그럼! 나는 용감하고 멋진 생쥐라고! 이 정도는 쉽지, 찍!
‘바깥은 어때?’
―여기랑 비슷해! 그런데 인간들이 많아! 맞아, 아는 인간도 봤어, 찍!
‘아는 인간?’
―그, 우리 쫓아왔던 무서운 인간, 찍!
나는 최대한 룩스의 말을 헤아리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부분은 없었지만.
대체 누굴 말하는 거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생김새라든가.’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어! 좀 늙은 여자 인간이었어, 찍!
그 말을 들어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나는 한참 되새긴 끝에 간신히 후보를 추려 냈다.
‘룩스의 설명대로라면 말롱 부인이거나 전 보육원 원장뿐인데……. 둘 다 죽었잖아?’
나는 혼란을 느꼈다. 전 보육원 원장은 아빠가 죽였다고 했고, 말롱 부인은 황태자가 전해 주길 죽었다고 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 돌아올 리 없는데.
‘잠깐.’
처음부터 안 죽었던 거라면? 생각해 보면 나는 두 사람의 부고 소식 모두 남을 통해 전해 듣기만 했지, 실체를 확인한 적 없었다.
‘게다가 이곳의 분위기, 암흑 시장과 비슷해.’
내가 모든 암흑 시장을 겪어 본 건 아니나 적어도 말롱 자작 부인의 부친인 셰인트 백작의 관할 아래에 있던 암흑 시장은 대개 이랬다.
보육원 전 원장은 페리드 경을 움직일 만한 힘도, 날 순간 이동시킬 정도로 비싼 마법 물품을 살 돈도 없을 테니 남은 사람은…….
“……말롱 부인.”
“어머나?”
귓속을 파고든 간드러진 음성에 나는 흠칫 놀랐다.
고개를 번쩍 들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초라한 행색의 말롱 부인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정말, 살아 있었어?’
말롱 부인은 내 마지막 기억과 꽤 달랐다.
잘 먹지 못했는지 광대가 두드러질 정도로 삐쩍 마른 데다 머리도 산발이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아도 시종일관 화려한 드레스에 장신구를 치렁치렁 달고 다니던 모습을 떠올리면 상당히 격한 변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녀의 눈이었다. 광기 어린 눈빛.
“날 기억하고 있구나.”
말롱 부인이 히죽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렇게 금방 잡힐 줄은 몰랐네. 며칠은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놈의 쥐새끼도 여전히 데리고 있고.”
말롱 부인이 매섭게 내 품에 있는 룩스를 노려봤다.
“예전에 그깟 것에 놀랐던 걸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저딴 거에 놀라서, 내가, 그 망신을 당하고 이렇게 됐다니.”
내가 룩스를 숨기듯 꼭 끌어안으니 말롱 부인이 인상을 풀고 자조하듯 웃었다.
“어쨌든 둘이 함께 있어 잘됐어. 네년뿐만 아니라 그 쥐새끼까지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롱 부인이 웃었으나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살았어요? 죽었다고 들었는데.”
“아아, 그래. 뒈질 뻔했지. 네년이랑 황태자 때문에. 감옥에서 얼마나 더러운 꼴을 많이 봤는지 넌 모르겠지.”
“…….”
“하지만 나라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하는 것보다 앞으로 네가 어떻게 될지 물었을 거란다. 궁금하지 않니? 네가 어떻게 될지?”
말롱 부인이 기분 나쁜 눈초리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오늘만을 기다렸어. 네게 복수하는 날을 말이야. 넌 오늘 아주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죽어 갈 거야. 마물의 먹이가 되어서 말이지.”
마물의 먹이?
“원래는 검투사 노예들을 먹이로 줬지만, 오늘은 색다른 재미를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듣고 나니 떠오르는 게 있다.
노예상의 비인륜적인 짓에는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검투사 노예들과 마물을 싸우게 해 생존하면 살고, 아니면 죽는……. 그런 끔찍한 일들을 자행한다는 걸.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
“아빠가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 전에 처리하면 그만이지.”
“그 뒤에는요? 아빠는 제가 죽어도 부인을 쫓을걸요?”
“걱정하지 마. 네가 여기 올 때 널 대신할 가짜가 그쪽으로 갔으니까.”
“대신할 가짜……?”
“사람들은 네가 사라진 줄도 모를 거란 뜻이란다. 오히려 잘 있다고 여기겠지.”
말롱 부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마법?
마법으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한 건가?
하지만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흔한가?
상상 이상의 강수에 혼란을 느낀 내가 입을 열었다.
“마법이라면, 아빠가 알아보고 절 찾으러 올 거예요.”
“과연 그럴까? 벨로크 대공은 네게 관심이 없다던데.”
그걸 어떻게?
마지막 카드였던 만큼 나는 움찔, 했다.
맞다. 페리드 경이 알려 줬겠구나. 배신자니까.
“내가, 착각했지. 벨로크 대공이 널 아낀다고 착각해서. 그런데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데, 내가, 내가……!”
홀로 무섭게 읊조리던 말롱 부인이 갑자기 쇠창살 사이로 손을 넣었다.
다행히 제법 거리가 있었던 탓에 붙잡히진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말롱 부인을 흥분시킨 모양이었다.
나 대신 쇠창살을 붙잡은 그녀가 발작했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알아? 네깟 것만 아녔어도!”
한참 비명을 지르던 말롱 부인의 눈길이 내 품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놀란 사람처럼 눈이 커지더니, 곧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재밌는 생각이 났어.”
“……?”
“널 검투사들 사이에 보내기 전에 네 앞에서 소중한 것을 없애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소중한 것을, 없앤다고?
나는 반사적으로 말롱 부인의 시선을 좇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룩스였다.
‘설마 소중한 거란 게……?’
내가 말롱 부인을 다시 쳐다봤을 때, 그녀는 이미 뒤돌아 나가고 있었다.
예감이 안 좋았다. 아니, 실제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말롱 부인은 잔혹한 짓을 즐길 때 저런 얼굴을 하고는 했으므로.
‘나가야 해!’
다급히 철창을 흔들었으나 꼼짝도 안 한다.
룩스만이라도 숨겨야 하나?
‘룩스, 움직일 수 있겠어?’
―왜, 찍?
‘너만이라도…….’
도망쳐, 라고 말하려는데 문이 다시 열리고 말롱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녹색 눈을 가진 삼색 고양이가 들려 있었다. 고양이는 말롱 부인이 싫은지 이를 드러내며 내내 발버둥 쳤다.
“얘가! 왜 이렇게 난리야!”
캬아옹!
“좀! 가만 안 있어?”
한창 고양이와 실랑이하던 말롱 부인이 한껏 짜증 내며 고양이를 내던졌다.
“이게! 간식 준대도!”
키야아옹!
바닥에 착지한 고양이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연신 하악, 소리를 냈으나 말롱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갇힌 철창을 열고는 내 팔을 꽉 움켜쥐었다.
‘안 돼! 룩스, 숨어!’
나는 반사적으로 룩스를 품에 숨겼다. 룩스도 위험을 감지한 건지 내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놔, 생쥐!”
“싫어!”
“이게!”
말롱 부인이 내 뺨을 후려칠 듯 손을 번쩍 들 때였다.
키야아옹!
“꺄아악!”
고양이가 말롱 부인을 뒤에서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