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66화 (66/125)

#66

“이름표를 한 걸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베로니카는 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따로 보고를 받은 게 없으니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멍하니 아시드와 더스틴의 대화를 듣던 슈가가 삑삑 울었다.

―아니야! 베리 없어졌어! 이상한 애가 대신 왔어!

“어쩌면 잠깐 나왔다가 길을 헤매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가씨의 방과 비교적 가까운 곳이니까요.”

“잘됐군. 갖다주며 얼굴을 보면 될 테니.”

아시드는 슈가를 손바닥 위에 올린 뒤 앞으로 걸었다.

손 위에서 슈가가 삑삑 울어 대며 진실을 전하고자 했지만,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베리, 보고 싶어.

슈가는 새삼 베로니카가 있어 그동안 편했다는 걸 느꼈다.

그에 반해 다른 인간은 어떤가? 멍청하기 짝이 없고, 완자는 은혜도 몰랐다!

―이 인간도 베리가 아니란 걸 못 알아보겠지?

슈가는 한탄하다가도, 가짜 베로니카를 보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꼭 울게 만들어 줄 거라고 다짐했다.

틈틈이 관리해 아주 날카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음먹고 할퀴면 제법 아프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발톱을 쫙 빼고 준비하는 동안 더스틴이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저 집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는지요?”

“……응! 들어와!”

안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스틴은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아시드를 한번 보고는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 베, 벨로크 대공?”

그새 단장한 건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귀엽게 땋은 베로니카가 멈칫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짧았다.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으며 아시드에게 달려와 와락 안겼다.

“보고 시퍼떠요, 아빠!”

―이 가짜야!

베로니카가 아시드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한껏 애교 부렸다.

동시에 슈가가 베로니카의 정수리 위로 뛰어내렸다.

―이 가짜! 가짜! 우리 베리 어딨어!

“아얏!”

―베리 내놔! 내놔!

슈가의 공격에 베로니카가 몸을 털어 댔다. 그에 놀란 샤비가 달려와 베로니카에게서 슈가를 떼어 놓았다.

“슈가 님, 진정하세요. 아까부터 대체 왜 이러는…….”

“그게 왜 여기 있어!”

베로니카가 앙칼지게 외치며 샤비를 노려봤다.

낯선 그 시선에 샤비가 놀라 몸을 움츠린 동안 베로니카가 더 크게 외쳤다.

“내가 갖다 버리라고 했잖아! 안 버렸어?”

“죄송해요, 아가씨. 그게…….”

“이리 내놔……!”

“시끄럽군.”

베로니카가 샤비의 손에서 슈가를 뺏으려던 때, 아시드가 나직이 말했다.

그에 베로니카가 움찔하며 멈추더니 아시드를 바라봤다.

“아, 아빠? 왜 그러세요? 저 무서워요.”

주춤거리며 아시드에게 다가간 베로니카가 그의 소매를 붙들려던 때다.

아시드가 싸늘하게 베로니카의 손을 쳐 냈다.

“내가 왜 네 아빠지? 내버려 뒀더니 끝이 없군.”

아시드의 반응에 더스틴과 샤비가 기함했다. 특히 더스틴은 그 정도가 심했다. 떠나기 전에 사과한다던 사람이 웬걸, 사과는커녕 저러다니!

아시드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과 나서서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하던 때다.

“그래서 진짜 내 딸은 어디 있지?”

“진짜라니요? 제가 아빠 딸이자나요.”

“누가 가르쳤는지 몰라도 내 딸은 혀 짧은 소리를 안 낸 지 꽤 됐다.”

“이, 이건, 그동안 아빠가 보구 시펐으니까…….”

“그 애는 자기가 발음을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그걸 애교라고 할 리가 없지. 애초에 애교도 부리지 않는 아이지만.”

“…….”

“무엇보다 그 아이는 제 동물을 소중히 다루지.”

아시드가 샤비 쪽으로 손을 내밀자 슈가가 포르르 달려와 손바닥 위에 앉았다.

“주인이 아니란 걸 알아본 건가? 영특하군.”

―맞아! 역시 넌 믿었어, 무섭지만 묘하게 착한 수컷 인간!

삑삑!

슈가가 납작하지만 보드라운 꼬리를 팡팡 내리치며 수긍했다.

“가, 갑자기 시러질 수도 있죠! 저게 제 손을 물었어요! 방금도 보셨잖아요! 제 머리도 할퀴었다고요! 너! 너도 봤지?”

베로니카가 샤비를 지목했지만, 샤비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샤비도 베로니카가 이상하다고 느껴 왔으므로.

“왜 대답 안 해? 봤잖아!”

“그만.”

아시드가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베로니카의 모습이 바뀌었다.

연분홍색 머리가 서서히 금색으로 변했으며, 외양도 확연하게 달라졌다.

아이가 짙은 푸른 눈을 깜빡이자 더스틴과 샤비가 기함했다.

“아가씨가, 아니야?”

“저 아이는 누구…….”

둘의 반응에 아이가 재빨리 거울을 확인했다. 곧이어 아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 들킬 거랬는데!’

아주 강력한 마법을 걸어 두었다. 모두 널 보고 대공녀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는 그 생활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전부 아이를 보낸 사람이 한 말이었다.

그러나 대공이 이렇게 일찍 돌아올 거라고도, 이렇게 들킬 거라고도 말해 준 적 없었다.

게다가 공녀는 성격도 영악하고 발음도 부정확하니 그것만 주의하라고 전해 들은 만큼 모든 게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기지를 발휘해 잘 넘겼다고 여겼는데 전부 제 착각이었다니.

“겁도 없군.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 딸인 척 흉내를 내다니.”

아시드의 낮은 음성에 아이가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눈만 속이면 될 줄 알았나?”

“저,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냥 가서 대공녀님인 척하면 된대서, 그러면 평생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거라고 해서 그런 거예요!”

“네가 내 딸인 척 연기하는 동안 내 딸이 어떻게 될진 생각 안 했나?”

모를 리가.

어릴 적부터 밑바닥 생활을 해 온 만큼 아이도 대충 대공녀가 어떻게 될지 알았다.

그래도 모른 척했던 건 그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모든 게 꿈 같은 이 생활이 좋았으니까. 나도 나대로 절실했으니까.

“전 그냥……!”

시켜서 그런 거예요!

재차 변명하려던 아이는 아시드와 눈을 마주하고는 멈칫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붉은 눈이 살기로 일렁였다. 흡사 악귀라 해도 믿을 정도로 매서운 시선이었다.

뒤늦게 아시드에 대한 소문이 떠오른다.

벨로크 대공, 미친 살인귀.

아이는 재빨리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엎드렸다.

“자, 잘못했어요! 제가 바보였어요!”

“그래서 언제부터 내 딸 행세를 했지?”

“오, 오늘 새벽부터예요! 얼마 안 됐어요!”

아시드는 이를 악물었다. 벌써 정오가 넘었는데 얼마 안 됐다고?

무사히 있을 확률보다 잘못되었을 확률이 더 높거늘, 저따위 말이라니.

새벽녘에 저를 부르는 울림을 처음 들었을 때, 베로니카가 부르는 건 줄 몰랐다.

반지를 선물한 게 벌써 몇 달 전이었고 그동안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금세 베로니카가 부르면 가겠다고 했던 약조를 떠올린 아시드는 곧바로 추적 마법과 이동 마법을 행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베로니카가 있는 곳으로 이동되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으로 이동되었다.

그렇게 헤매던 끝에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더스틴에게 전언을 보냈으나 돌아온 답은 “아가씨는 곤히 주무시고 계십니다.”였다.

‘무언가 잘못됐다.’

만약 베로니카가 잘 있었다면 부름이 없었을 것이다. 설령 실수로 불렀어도 마법을 썼을 때 곧바로 베로니카의 방으로 이동되었겠지.

‘이따위 장난을 치다니.’

시간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파훼할 수 있었으나 베로니카가 위험할지 모른다 생각하니 자꾸만 조급해졌다.

다시 베로니카가 그를 부르는 듯한 울림에 바로 마법을 썼으나 이동된 곳은 대공가였다.

온 김에 단서를 더 찾고 ‘곤히 자고 있다는 베로니카’가 어떤지 보려고 왔더니만 이 꼴이다.

“바꾼 방법은?”

“저도 잘 몰라요.”

아시드가 얼굴을 찌푸리자 아이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냥 철장 안에서 기다리면 바뀔 거라고 했어요! 그 뒤에 대공녀인 척하면 된다고만……. 아! 그러고 보니 누가 뭘 갖다 둔댔어요! 깃펜이랬나?”

“깃펜?”

“깃펜이라면, 설마…….”

샤비가 고개를 돌려 깃펜 세트를 넣어 둔 서랍을 바라봤다.

“짚이는 게 있나?”

“아가씨께서 황태자 전하의 선물로 준비하신 게 있습니다. 마침 어제 들어와 저 서랍 속에 넣어 두었고요.”

황태자라는 단어에 순간 아시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란 걸 깨닫고 평정심을 되찾았지만.

“하지만 이후로 건드린 적 없을 텐데…….”

―아니야! 그 뒤에 누가 와서 베리가 만졌는데 사라졌어!

슈가가 삑삑 울었으나 다람쥐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아시드는 “조용히.”라며 슈가의 정수를 지그시 눌렀다.

그 뒤 빠르게 서랍장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깃펜 세트가 든 상자를 몇 번 만지던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의 흔적.’

이걸로 아이를 순간 이동시켜 바꿔치기한 건가?

아무나 못 할 수준급 마법인 만큼 계략을 꾸민 자는 꽤 재력을 가진 이거나 뛰어난 마법사일 게 분명했다.

‘델러노인가?’

잠깐 제 이복동생을 떠올린 아시드는 금세 고개를 내저었다.

델러노는 대놓고 그를 괴롭히지, 이런 식으로 굴진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을 테고.

‘대체 누가?’

아시드는 이런 짓을 할 법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았다. 아무렴 그동안 행해 온 짓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보이지 말아야 했거늘.’

지독한 자만이었다. 제 울타리 안에 두면 아이를 지킬 수 있을 거라는 자만.

그러니 아이를 내보이고 마음껏 누리게 해 줘도 될 거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오만.

고작 십여 년 전에도 제 사람 하나 지키지 못했던 주제에.

그렇다고 계속 실의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아시드는 곧바로 추적 마법을 사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