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그러나 추적을 완전히 끝내기도 전이었다.
상자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불이 붙었다.
장갑이 타들어 가며 그의 살도 함께 타들었다. 고통을 참고 추적한 게 무색하게도 상자는 빠르게 잿더미로 변했다.
“제길!”
추적이 거의 끝나 갈 즈음, 실마리를 눈앞에 두고 상자가 전부 타 버렸다.
더는 마법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아시드가 분에 찬 얼굴로 서랍장 위를 쾅 내리쳤다.
그 소리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움찔하며 아시드를 쳐다봤다.
타 버린 장갑과 그 사이로 보이는 상처가 몹시 아파 보였으나 그의 기세가 워낙 흉흉해 아무도 치료해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던 때다.
아시드가 입을 열었다.
“이걸 만든 곳이 어디지?”
“그, 만든 곳이 문제는 아닐 거예요. 대공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시킬 거라고 했어요.”
“첩자가 있다는 소리군.”
아시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샤비가 떨리지만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아닙니다. 아가씨께 해가 될 짓은 하지 않습니다. 첼시도 마찬가지고요.”
“그건 모를 일이지.”
차가운 일침을 날린 아시드가 더스틴을 보며 말했다.
“이 아이와 베로니카의 전속 하녀들을 방에 가둬 두고 잘 감시해라.”
“알겠습니다.”
더스틴이 신속하게 움직이는 걸 본 아시드는 전언을 사용해 기사들에게도 명했다.
이 일대를 뒤지라고.
대공가의 기사단이 움직이면 황제인 델러노의 귀에도 들어가고, 다른 이들의 귀에도 들어갈 테지만 어쨌든 벌어진 일이었다.
숨기고 은밀히 찾다 영영 잃어버리는 것보다 떠들썩해지더라도 아이를 서둘러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상자를 추적한 게 완전히 헛된 일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아이가 수도 안에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게 되었으므로.
하지만 그뿐이다. 아이가 무사한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자꾸 부정적인 예감이 든다. 그러나 그는 애써 그 감을 떨쳐 냈다. 대신 추적이 끊긴 마지막 위치를 떠올리며 읊조렸다.
“베로니카…….”
부디 무사해라.
* * *
나는 남자애와 남자들이 나간 뒤에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첫째는 아까처럼 또 누군가를 마주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고, 둘째는 남자애가 해 준 말에 대한 신뢰성 때문이었다.
비록 남자애가 날 도와주긴 했으나 의도를 알 수 없는 도움인 만큼 온전히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빠져나가면 잊도록 해.’
내게 명령하는 듯하던 어투와 따질 듯 굴다 이상하게 굽히던 남자들이라니.
‘믿어도 되나?’
달리 선택지가 없지만, 그래도 찝찝했다. 특히 예전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해서 더욱 그랬다.
―우리 계속 여기 있어, 찍?
‘아니. 나가야지.’
만약 혼자였다면 고민이 더 길었을 테지만, 룩스의 재촉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정말 천천히 문을 조금 열어 바깥 동태를 살핀 다음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오른쪽이랬지?’
무심코 돌려던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뭘 기준으로 오른쪽인 거지?
남자애가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날 보며 오른쪽이라고 했으니 이쪽인가?
아니면 나가서 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이라서 저쪽?
둘 다 확인해 보면 좋겠지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 만큼 조급해진다.
‘가까우니까, 일단 움직이고 틀리면 다시 돌아오자.’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스무 걸음, 5시 방향 벽돌, 세 번.’
나는 남자애의 말을 잊지 않도록 속으로 몇 번이고 읊조렸다. 그리고 벽돌을 만졌으나 딱히 튀어나와 있다든가, 뭔가가 있을 것처럼 여겨지진 않았다.
‘반대편이었나?’
다시 돌아가려던 때,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돌들과 달리 유독 도드라진 벽돌이 있었다.
스무 걸음이라고 하기엔 제법 있어 보이는 거리였으나 사람마다 걸음 차이가 있으니 저게 맞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 남자애, 나보다 훨씬 키가 커 보였어.’
그러면 그 애 기준으로 스무 걸음이면 이쯤이 맞지 않을까?
벽돌을 누르자 꾹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잘 찾은 게 맞나 봐. 이제 이대로 세 번만 누르면…….
―움직인다, 찍!
손에 힘을 줘 꾹꾹 누르니 쿠르르릉, 제법 큰 진동과 함께 벽이 옆으로 밀려 났다.
이윽고 더 지하로 내려가는 듯한 계단이 보였다.
어둠에 가려져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었다.
―들어가자, 찍!
“자, 잠깐만. 여기가 아닌 것 같아.”
내가 알기로 암흑 시장은 보통 지하에 있었다.
그런데 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라니? 어쩌면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도록 설계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찾던 비밀 통로가 맞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반대편도 살펴보고 없다면 여기로 오는 게 나을지도 몰라.’
안 들키고 여기까지 또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로 몸을 틀려는데 뒤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저기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소리를 낸 사람이 정말 그리 말했는진 모르겠으나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숨어야 하는데, 어디에 숨어야 하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는데 열렸던 벽돌이 다시 닫히려는 듯 움직였다.
―닫힌다, 찍!
그 뒤로는 모두 반사적이었다. 벽돌이 도로 닫히기 전에 나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쿵, 아까보다 작은 소음을 내며 벽이 완전히 닫히고 주위가 칠흑빛 어둠에 잠식되었다.
‘왜 들어왔지?’
벽을 등진 나는 조금 후회했다. 이래서야 갈 곳이 없으니까.
만약 누군가 와서 이 벽돌을 연다면 순식간에 발각될 터였다.
‘일단 내려가자.’
내려가서 숨어 있다가, 아무도 안 오는 듯하면 다시 올라와서 나가는 장치를 찾아보자.
마음먹고 아래로 내려가려던 나는 멈칫했다.
‘아무것도 안 보여.’
정말 지독할 만큼 캄캄한 공간이었다.
벽. 벽이 어디 있었지? 이쯤이었나?
들어오기 전에 봤을 때 계단이 많았으니 무작정 걸음을 내디뎠다간 넘어져 구를 확률이 높은 만큼 손을 더듬더듬 움직여 벽을 찾던 때다.
―베리 춤춘다, 찍!
“벽 찾는 거야. 어두워서 앞이 안 보여서.”
―난 잘 보이는데, 찍!
잘 보인다고? 맞다, 룩스는 생쥐였지.
“그럼 길 안내해 줄 수 있어?”
―좋아! 나만 믿어, 찍!
왠지 불안한데.
그래도 아예 도움을 안 받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기에 나는 룩스를 믿어 보기로 했다.
“계단 내려갈 때 짚을 만한 벽 위치부터 알려 줘.”
―벽! 저기 있어, 찍!
‘저기가 어디야?’
―저기, 찍!
룩스 딴에는 열심히 가르쳐 주려는 듯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만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나대로 더듬더듬 벽을 찾아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런데 이제 뭐 해, 찍?
‘여기 조금만 숨어 있다가 다시 나갈 거야. 내가 숨을 만한 곳이 보여?’
―앞에 문 있어, 찍.
문?
조금 더 앞으로 가니 정말 문처럼 보이는 형체가 얼핏 보였다. 쇠로 만들어진 문손잡이는 어둠 속에서 비교적 잘 보였다.
일단 여기 들어가서 숨어야겠다.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붙잡고 열자 문 틈새로 빛줄기가 드리워진다.
‘빛?’
멈칫하는 동안 조금 열었던 문이 스스로 더 열렸다. 그리고 시야로 들어온 풍경에 나는 그대로 굳었다.
문 안에는 아까 말롱 부인이 날 가뒀던 철장들이 수십 개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낡고 다 해진 옷을 입은 소년들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삶의 의욕을 모두 잃은 듯한, 죽은 눈빛.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몇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내 쪽을 휙 바라보고는 쇠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먹을 거……! 먹을 거 줘……!”
“아무거라도! 배고파……!”
철그렁, 쇠사슬 당겨지는 소리와 쇠창살을 잡고 뒤흔드는 소리가 천둥처럼 귀에 꽂힌다.
잠깐 숨으려고 온 건데 설마 이런 곳일 줄이야.
그때였다. 다시 한번 진동이 울렸다. 쿠르릉, 움직이는 소리에 돌아보니 벽이 빠르게 움직이며 열렸다.
이윽고 계단 맨 위, 역광을 받은 여자가 날 보며 웃었다.
“이런.”
말롱 부인이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또각또각 높은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설마하니 제 발로 걸어 들어올 줄이야.”
그녀의 뒤에 아까 본 남자들이 단단히 버티며 내려온다.
아까 고양이 한 마리 갖고 난동을 피웠던 이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얼굴.
내가 멈칫하는 동안 어느덧 내 앞으로 다가온 말롱 부인이 내 팔뚝을 움켜쥐며 말했다.
“잡았다.”
* * *
말롱 부인은 곧바로 남자들에게 날 넘겼다.
“단단히 붙잡아! 이번에도 실수하면 가만 안 둘 테니!”
으름장을 놓아서인지, 남자들이 날 다루는 손길은 험하기 짝이 없었다.
“어서 들어가!”
“악!”
집어 던지듯 날 철장 속에 밀어 넣은 그들은 꼼꼼하게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애초에 내가 문을 열고 도망친 게 아니었는데도.
아까 날 보고 소란스레 굴던 소년들은 남자들의 윽박질에 몸을 둥글게 말고 꼼짝도 안 했다.
“죽을 거야. 죽을 거야…….”
누군가의 아주 작은 읊조림만 희미하게 들려온다.
나도 다른 철장에 있는 소년들처럼 몸을 말았다.
이후로 말롱 부인이 날 어떻게 할지야 뻔했다. 내게 미리 말해 줬으니.
차라리 혼자 있었다면 그래도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읊조림과 암울한 분위기가 나마저 동화시켰다.
―뭐 해, 찍? 나갈 방법을 찾아야지, 찍!
“어떻게?”
―생각하자, 찍!
룩스가 활달하게 말했지만, 이미 내 의지는 바닥이었다. 도저히 여길 빠져나갈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날 구하러 올 사람마저 없다. 암담하네.
―내가 나가서 다른 친구들이라도 찾아볼까, 찍?
“괜찮아.”
―나가 보면 예전의 누님처럼 우리를 도와줄 친구들이 많을 거야, 찍!
룩스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고 룩스를 끌어안았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에 룩스와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이 비슷한 곳에서 룩스를 끌어안고만 있었는데.’
겨우 살 만해진 줄 알았는데 결국 원점이다. 이 얼마나 웃긴 일인지.
‘아예 원점은 아닌가.’
그래도 마리 언니는, 이전 생과 다르게 행복할 테니까. 언니를 살렸으니까.
그거면 됐어.
……라고 여기기에는 아쉬운 게 너무나 많지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룩스.”
―찍?
“넌, 도망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