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도망, 찍?
“넌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 그러니 도망쳐.”
―그러면 너는, 찍?
“나는…….”
죽겠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나는, 괜찮아.”
괜찮지 않다. 그래도 괜찮은 척을 해야만 했기에.
―싫다, 찍!
“뭐?”
―친구는 함께하는 거잖아. 난 네 옆에 있을 거야, 찍!
고집스레 버티는 룩스를 보니 감정이 울컥 솟구친다.
너라도 살라는 건데 왜 도망치질 않는 거야.
“가라니까.”
―싫다, 찍!
“제발 가! 가란 말이야!”
내 큰 소리에 룩스가 찌익찌익 울며 잔뜩 풀 죽은 모습으로 귀를 접었다.
‘……심했나?’
하지만 사과하거나 취소할 마음은 없었다. 룩스라도 도망치길 바랐으니까.
내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룩스가 천천히 내 무릎 위에서 내려갔다.
그러고는 쇠창살 밖으로 빠져나갔다. 가다가 멈춰 돌아보고, 다시 가다가 멈춰 돌아보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괴로워진 나는 아예 고개를 휙 돌려 룩스를 보지 않았다.
한참 뒤에 정면을 봤을 때, 나의 자그마한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갔어…….’
내가 가라고 한 데다, 가길 바랐으니 만약 룩스가 안 갔다면 그것대로 답답했을 것이다.
분명 그런데…….
‘왜 서운하지?’
쓸쓸히 무릎을 모으고 한참 가만히 있던 때다.
다시 진동이 울리더니 얼마 안 있어 벌컥 문이 열리고 장정이 들어왔다.
그는 가장 끝에 있는 철창부터 열어 한 명씩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내 내 옆에 있던 소년까지 데리고 간 지 얼마 안 되어 처음 보는 남자가 다가와 내가 갇힌 철창을 열었다.
“나와, 네 차례다.”
* * *
남자는 마치 물건을 다루듯 내 팔을 잡고 빠르게 걸었다.
그렇게 걸은 끝에 도달한 곳은 또 다른 철창이 있는 곳이었다.
주변을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남자가 다시 날 철창에 가뒀다.
이번에 갇힌 철창은 한쪽 쇠창살이 양쪽 도르래와 연결되어 있었다.
철창 밖에 있는 남자가 힘을 주어 도르래와 연결된 쇠사슬을 당길 때마다 특유의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며 쇠창살이 조금씩 올라갔다.
쇠창살이 올라가는 만큼 바깥에서 들어온 빛이 점점 날 비추고, 누군가의 외침이 들린다.
“제가 아까 특별한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 말, 기억하십니까?”
드륵드륵, 끼익끼익.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어린 노예입니다!”
얼굴을 덮친 강렬한 빛에 내가 눈살을 찡그린 사이 철컥, 쇠창살이 고정됐다.
그와 동시에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훅 덮쳤다.
역겨우리만큼 진한 비린내에 나는 앞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코와 입을 막고 헛구역질했다.
“가엾으리만큼 여린 소녀군요! 바로 마물을 풀면 재미없겠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마물한테 목줄을 채웠습니다!”
반대편에서 끼이익 쇠창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억지로 정면을 보자 멀지 않은 곳에 생전 처음 보는, 형태와 덩치를 가진 것이 보였다.
그것은 정말 컸다. 보통 귀족 저택만 한 덩치였으니까.
관중석에 겨우 닿지 않았을 뿐, 그것은 어찌나 거대한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감이 짓눌렀다.
‘괴물…….’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얼핏 보면 늑대를 닮은 듯했지만, 꼿꼿하게 선 새까만 털들과 붉게 빛나는 안광은 평범한 늑대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었으므로.
크르릉!
새까맣고 빨간 괴물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몸부림칠 때마다 쇠사슬에서 요란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났다.
“하하, 마물을 잡아 두면 무슨 소용이냐고요? 여러분! 저는 저 목줄이 튼튼하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목소리의 외침에 주변에서 흥분한 듯한 호응이 이어졌다. 그제야 나는 위를 쳐다봤다.
눈 부신 불빛들과 가면을 쓴 수많은 관중이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앉아 있는 관중들과 달리 혼자 서 있는 남자가 날 향해 손가락질했다.
“과연 저 노예는 얼마나 오래 버틸지! 지금 그 궁금증을 해소해 보시죠!”
괴물은 계속해서 포효하며 내게 달려들고 싶어 했지만, 팽팽해진 쇠사슬에 괴물은 계속 제자리걸음만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외침처럼 거대한 쇠사슬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곧 깨질 것처럼.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관중들 사이에서 익숙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말롱 부인…….’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던 만큼 나는 감히 확신했다.
반가면 아래 말롱 부인은 활짝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이 아주 즐거운 사람처럼.
저 여자는 내가 살려고 도망 다닐수록 즐거워하겠지? 그걸 바랐으니까.
오히려 의연한 태도를 보이면 실망할 것이다.
겁에 질린 내가 살고 싶어 아등바등하다 결국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걸 테니.
‘무서워.’
하지만 말롱 부인에게 재미를 선사하고 싶진 않다는 집념으로 나는 마물을 쳐다봤다.
마물을 구속한 목줄이 끝내 끊겼다.
챙! 조각들이 허공에 흩어지고 자유로워진 마물이 날 향해 돌진해 왔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
―안 돼, 찍!
작은 무언가가 위에서 툭 떨어졌다.
내게선 조금 멀지만 마물한테는 가까이 떨어져서인지 내게 달려오던 마물이 반사적으로 입을 벌려 그것을 삼켰다.
“룩, 스……?”
나는 멍하니 혀에 익은 이름을 불렀다.
‘분명, 룩스였어.’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자세히 못 봤으나 그 덩치, 그 목소리는 룩스가 분명한데.
룩스였다고? 정말로? 도망치라고 했잖아.
그래서 아까 갔잖아. 그런데 어째서? 도망친 게 아니었어?
그때 룩스를 삼킨 마물이 다시 날 바라봤다.
충격에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아니면 죽음을 앞두고 정신이 이상해진 걸까?
―베리, 찍…….
조금 전에는 그저 무섭기만 했던 마물의 붉은 안광과 마주하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친구 지킬 거야…….
평소처럼 뇌리에 울리는 룩스의 말.
그러나 룩스의 것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이상한 구석이 있는 울림.
―내가, 꼭, 지켜 줄 거야. 꼭…….
그 울림을 중심으로 무언가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정확히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지만 강렬한 유대감과 연결.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무얼 해야 할지 알 것 같은 느낌.
심장이 고동친다.
나조차 있는 줄 몰랐던 이상한 기류가 내 몸에서 밖으로 빠져나와 마물에게 집중된다.
‘할 수 있어.’
저 마물을 조종할 수 있어.
근거 없는 확신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난 할 수 있다고.
기류가 연결되고 맹렬히 달려오던 마물이 멈칫한다.
동시에 내 뇌리에 ‘나’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 보이고 온몸에 생경한 감각이 느껴졌다.
높은 시야, 그리고 날 내려다보는 광경. 분명 두 발로 서 있는데, 네 발로 땅을 짚고 있는 느낌.
고작 연결되었을 뿐인데 마물이 포효하며 요동쳤다.
앞발을 구르고, 머리를 휘저으며 아무렇게나 이빨을 들이대고 꼬리로 온갖 곳을 때려 대고.
강렬한 거부와 난동에 주위가 크게 흔들린다.
“꺄아악!”
“여러분들, 침착하게! 침착하게 대피를……!”
“뭐 해? 저거 당장 죽여!”
기둥에 금이 가고, 어딘가 우르르 무너지자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이 들려온다.
내 근처에도 돌 부스러기 같은 게 떨어지는 듯했으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마물이 난동을 피울수록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역류한다.
코끝이 뜨거워지고, 비릿한 냄새가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코 밑을 닦을 여력조차 없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이 가냘픈 연결이 끊길 것만 같았으니까.
‘그만.’
크르르릉!
‘그만 움직여.’
캬아아앙!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아니, 터져 버릴 것만 같다.
내가 마물을 조종하려 들수록 점점 몸이 망가지는 느낌이 들었으나 멈출 수 없었다.
이 마물을 통제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일 테니까.
한껏 마물에게 집중하는데 무언가 빠르게 날아오더니 마물의 몸통에 박혔다.
캭! 캬아아악!
간신히 잡은 연결이 미약해진다. 나는 놀라 무언가 날아온 쪽을 바라봤다.
관중석 쪽에서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이 기다란 지팡이를 들고 무어라 읊조리고 있었다.
이윽고 허공에 떠올라 있던 거대하고 날카로운 얼음덩어리가 마물에게 다시 날아갔다.
푹!
캬아아악!
마물이 요동치며 꼬리를 난잡하게 휘둘렀다.
그리고 마법사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얼음덩어리가 쏟아져도 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법사가 있는 쪽을 덮쳤다.
얼핏 방어막 같은 게 펼쳐진 듯했지만 마물이 발을 한번 휘두르자 얄팍한 방어막이 산산이 조각났다.
“으아아악!”
마물이 그대로 마법사를 집어삼켰고, 그 옆에 있던 사람들도 집어삼켰다. 끔찍한 광경, 끔찍한 감각.
동시에 연결도 옅어졌으나 나는 어떻게든 그것을 부여잡기 위해 애썼다.
“흡…….”
켁, 작은 기침과 함께 액체가 역류하며 흘러나왔다.
입 밖으로 주르륵 흘러나온 피가 턱을 타고 내려가 잠옷과 발등을 가득 적셨다. 새하얬던 잠옷 위로 꽃잎처럼 붉은 점이 번지듯 피어난다.
‘그만……! 그만, 움직여!’
비명 지르듯, 온 힘을 쥐어짠 순간, 마물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언제 반항했냐는 듯 얌전해진 그것이 가만히 날 쳐다봤다.
“헉, 흐읍…….”
입 안이며 코 안에 가득한 것을 뱉어 내며 나는 마물에게 명령했다.
“엎, 드려.”
거대한 마물이 아주 천천히, 내 발치에 엎드렸다. 길들어진 금수가 주인에게 복종하듯.
가까이에서 본 마물은 내 예상보다 훨씬 컸다. 머리가 내 키를 훌쩍 웃돌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더는 이 마물이 두렵지 않았다. 이건 내 권속이었으니까.
“날, 태우고,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