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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70화 (70/125)

# 70

아시드가 베로니카를 안고 돌아온 뒤 대공저는 한동안 난리였다. 갑자기 사라졌던 어린 아가씨가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돌아왔으므로.

주치의는 물론, 신관까지 불려와 베로니카를 치료했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아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왜 안 깨는 거지?”

베로니카의 옆을 지키던 아시드가 신관과 주치의를 닦달했다.

그저 물은 것뿐인데도 그의 인상과 명망에 겁을 먹은 신관이 잔뜩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잘 모르겠, 아, 아! 예전에 서적에서 읽은 적 있습니다. 몸이 멀쩡한데 안 깨어나는 건 깨어나길 거부해서라고……!”

정답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활달하게 말하던 신관은 아시드가 발 디딘 바닥에 쩌저적 금이 가는 걸 보고는 “히익!” 숨을 들이켰다.

딱히 잘못했다고 여기진 않지만, 상대가 ‘그’ 벨로크 대공이라면 달라졌다.

평소 대공가에서 들어오는 기부금도 크고, 공녀의 목숨을 구하면 사례금은 물론 대공가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얘기에 번쩍 손을 들고 자원했건만…….

‘괘, 괜히 왔어!’

무성한 소문으로만 접하다 직접 만난 대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생긴 건 물론이거니와 그냥 마주한 것만으로도 느낌이 왔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신전에 기도하러 오는 일반 신도나 이런저런 부탁을 하러 오는 귀족 나부랭이에게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위압감과 묘한 꺼림칙함, 두려움이 느껴졌다.

‘선배들이 꺼릴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렸을 적부터 신성력이 많아 유망주로 기대받았더니 자만해 제 위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여기서 조금만 입을 더 놀리면 자신도 저 바닥처럼 쪼개질 게 분명하리라.

당황한 신관이 쩔쩔매는 동안 근처에 있던 주치의, 요한나가 앞으로 나섰다.

“신관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서적에 쓰인 사례가 모든 사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요.”

“…….”

“그저 겪으신 일이 고되어 잠시 쉬시는 것일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깨실 겁니다.”

“그런가?”

아시드가 힐끔 신관을 바라봤고, 신관은 이때다 싶어 고개를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다들 나가도 좋다.”

떨어진 허락에 신관은 허겁지겁 방 밖으로 나갔다. 신관과 달리 요한나는 아시드에게 예를 차리고는 나름 여유롭게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아시드는 여전히 누워 있는 베로니카를 보며 마른세수했다.

몸이 멀쩡해졌으니 금방 의식을 차릴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래서야 사과도, 해명도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나.

자신은 널 싫어한 적 없다고, 서둘러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정이 있었노라고, 이전에는 일방적으로 화내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정작 저 말을 들어야 할 아이는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걸까. 아니지, 꼬인 시점은 확연했다. 이 아이를 처음 만난 그때부터였다.

자신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은혜를 갚겠다느니 되지도 않는 오지랖을 부리며 아이를 감싼 것.

저와 다른 아이를 섣불리 동정한 것.

우선순위가 명확한데, 자신은 절대 이 아이를 우선으로 여길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아이에게 정을 준 것.

차라리 아이가 처음 원했던 대로 하녀 직을 주고 말았더라면. 아니면 다른 가문에 의탁해버리고 말았다면.

이미 일어난 일인 만큼 되돌릴 수도, 미련하게 마냥 후회만 할 수도 없다는 걸 알지만 끊임없이 생각이 맴돌았다.

“전하, 더스틴입니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는지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드는 베로니카를 한번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불도 안 켜두셨습니까?”

“본론이나 말하지.”

그 말을 하며 방문을 닫은 아시드가 문에 등을 기댔다.

“밤이 깊었습니다. 이 뒤는 하녀들에게 맡기고 쉬시지요.”

더스틴의 뒤로 샤비와 첼시가 고개를 조아린 채 서 있었다.

며칠 전에 근신 처분을 받았으나 혐의가 벗겨진 지금 그녀들은 원래 자리로 복직한 상태였다.

아시드는 하녀들을 보고는 캄캄한 창밖을 바라봤다.

“벌써 시각이 이리됐군.”

“예.”

“내가 지킬 테니 물러가라.”

“허나 며칠간 이러시지 않으셨습니까? 몸이 상하기라도 하시면…….”

“더 상할 곳이 있을 것 같나? 이미 망가진 몸뚱이인데.”

“전하.”

“괜찮다고 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

“……그렇다면.”

더스틴이 샤비와 첼시에게 돌아가라 눈짓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들은 곧 더스틴의 명을 따랐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아가씨를 흉내 냈던 아이가 죽었습니다.”

“사유는?”

“대공저에 오기 전부터 독을 복용했다더군요.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미끼가 오래 살게 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이 뒤처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알아서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더스틴도 돌아가기 위해 몇 걸음 옮겼을 때다.

아시드가 “잠깐.”하고 더스틴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나직이 명령을 번복했다.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라.”

* * *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이 든다. 실로 다정한 손길이었다.

‘누구지?’

조심스레 눈을 떠보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게다가 물안개가 낀 것처럼 주위도 흐릿했다.

‘어두워.’

열심히 눈을 깜빡였지만 보이는 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알아차린 거라고는 내가 어떤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는 것. 그리고 여자가 아주 길고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를 가졌다는 것뿐이었다.

마리 언니는 아닌 것 같은데…….

“누구, 세요?”

여자는 계속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핏 웃은 것 같기도 하고 무어라 입을 벙긋거린 듯한데.

“……해.”

“……?”

뭐라는 거지?

한 번만 더 말해달라고 하려던 순간이었다.

여자가 내게 고개를 숙이더니 내 뺨에 작게 입을 맞추고는 읊조렸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란다.”

그 말에 의문을 품기도 전에 눈이 확 떠졌다.

‘꿈?’

이상한 꿈이라고 여기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래봤자 불빛 하나 없이 어둡고 캄캄해 보이는 건 없었지만.

‘여긴 어디지? 설마 아직 암흑 시장 안에 있는 건가?’

마지막 기억이 가물가물한 만큼 나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말고 멈칫했다.

‘푹신해.’

침대 특유의 푹신함이 손바닥 밑으로 느껴진다. 그사이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야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내 방이잖아?’

어떻게 여기로 온 거지? 설마 그동안 내가 꿈을 꾼 건가?

페리드 경이 배신한 것도, 갑자기 암흑 시장에 가게 된 것도, 말롱 부인을 만난 것도. 그리고 룩스가 마물한테…….

‘룩스!’

나는 황급히 룩스와 슈가의 잠자리용 바구니를 뒤졌다.

“비었어…….”

그러나 바구니는 비어 있었다. 심지어 슈가도 없었다.

“놀러 간 걸 거야.”

응, 종종 밤에도 놀러 나갔으니까 분명 그럴 걸 거야.

나는 낑낑거리며 잠긴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안으로 흘러들어오며 커튼이 펄럭였다.

“룩스? 슈가?”

자꾸 얼굴을 때리는 커튼을 잡아 옆으로 치우며 밖을 보지만 보이는 건 없다.

사실, 처음부터 알았다. 내가 겪은 것들은 꿈이 아니며, 둘은 밖에 없을 거란 걸.

창문이 잠겨 있었는데 나갈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내가 사라진 뒤 슈가도 잘못되었던 걸까?’

말롱 부인은 날 대신할 가짜를 여기로 보냈다고 했어. 설마 그 가짜가 슈가를 어떻게 한 건……!

달칵-

문 열리는 소리에 나는 커튼을 꾹 쥔 채 돌아봤다.

창을 통해 들어온 은은한 달빛이 남자를 비췄다.

그래봤자 겨우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베로니카?”

내 이름을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는 평소 듣던 것보다 격양되어 있었다.

“거기,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내가 갈 테니.”

나는 아빠의 말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허탈했다.

아무리 반지를 문질러도 오지 않은 아빠였다.

그로 인해 기대와 실망을 비롯한 감정을 모두 버렸다고 여겼는데, 여전히 이렇게 그의 말에 꼼짝도 못 하다니.

내 심정이 어떠하든 아빠는 금방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조심스레 내 손을 쥐었다.

움찔-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한때는 익숙했던 접촉이었는데, 아빠를 보니 자꾸 말롱 부인의 말이 맴돌았다. 대공은 내게 관심 없다는 그 말이.

실상은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아마 여전히 날 싫어하고 있겠지. 귀찮게 굴었으니까.

이번도 마찬가지다. 비록 내 의지는 아니었다 해도 어쨌든 말롱 부인에게 납치당했으니 결론적으로는 귀찮게 한 셈이다.

‘아.’

어쩌면 아빠는 내가 죽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귀찮으니까, 은인이니까 직접 죽이진 못하겠으니 알아서 죽어버리길 바라지 않았을까.

‘그래서 내가 불러도 오지 않은 걸지도.’

그런 줄도 모르고 살고 싶어 아등바등한 스스로가 우스꽝스럽다. 그래도 난 살고 싶었으니까. 죽기 싫었으니까.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이번에 움찔한 사람은 아빠 쪽이었다.

“뭘 말하는 거지?”

“귀찮게, 살아버려서……. 죄송해요.”

말을 하는 동안 점점 목이 멘다. 내가 산 게 이렇게 사과할 일인가 싶다가도, 지난 삶 동안 만들어진 비굴한 습관이 자꾸 이리 입을 움직이게 했다.

살고 싶은 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욕구인데, 도움을 요청할 곳이 있다면 요청하는 게 당연한 건데.

억울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새삼 서글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아, 궁상맞다. 분명 아빠가 싫어할 텐데.

늦게나마 손등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으려 하던 찰나였다.

“도대체가…….”

한숨 같은 읊조림이 들리는가 싶더니 눈 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곧이어 커다랗고 다소 차가운 손이 내 눈가를 쓸며 눈물을 닦았다.

“나는, 널 싫어하지 않는다.”

거짓말.

“네가 산 것 역시, 귀찮게 여긴 적 없다.”

그것도 거짓말.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던 그때였다. 아빠가 무릎을 꿇었다.

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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