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74화 (74/125)

#74

괜히 옆에 있는 인형을 끌어안으려는데 내 옆구리에 따끈따끈한 무언가가 닿는다. 자세히 보니 룩스의 엉덩이다.

“……?”

―필요해 보여서!

엉덩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덕분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언제 우울했냐는 듯 기분이 좋아져 룩스를 쓰다듬으려던 때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첼시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천천히 문이 열리더니 곧 익숙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안 자고 있었군.”

“아빠……?”

생각도 못 한 등장에 눈을 휘둥그레 뜬 사이 문을 닫은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사이 룩스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자는 척했고 슈가는 바구니 속으로 쏙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정말이지, 한결같다니까.

그리 생각하며 아빠를 바라보던 나는 곧 그가 들고 있는 것으로 시선을 옮겼다.

‘책이네.’

제목이나 표지는 안 보였지만, 얇은 두께의 책은 동화책이 분명했다.

“책 읽어 주러 오신 거예요?”

“그래. 오랜만에.”

아빠가 내 옆에 자리 잡았다. 내 발음이 고쳐진 뒤로는 뜸하더니?

“저 이제 발음 잘해요.”

“안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 만에 보는 건데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에 괜히 심통 부렸지만 돌아온 건 기운 빠질 정도로 싱거운 대답이었다.

뭐……. 딱히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어째 저 동화책, 표지가 낯익은 게 예전에 한 번 읽은 책 같은데?

말해야 하나? 모른 척해야 하나? 저거 내용이 꽤 지루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음, 역시 말하자.

“그 책, 전에 읽어 줬던 거예요.”

“……확실히 그렇군.”

아빠가 펼쳤던 책을 도로 덮었다.

지루하더라도 모른 척하고 다시 들을 걸 그랬나?

아빠의 무릎 위에 있는 책을 빤히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빠가 룩스한테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그것과 벌써 친해진 건가?”

“원래 친구였어요. 제가 데리고 다니던 생쥐 기억하세요?”

“그래.”

“걔가 얘예요.”

분명 믿기 어렵겠지?

룩스가 이렇게 된 계기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려던 때다.

“마물이 널 지키려 하기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랬군.”

“믿어주시는 거예요?”

“거짓말이었나?”

도리도리.

“그렇겠지.”

내가 급히 고개를 내젓자 아빠가 픽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바로 믿어줄 줄은 몰랐는데.’

잘된 일이긴 했다. 아빠가 믿어주는 이상 나도 설명하기 편할 테지.

다시 그때 일을 상기하며 막 입을 열려는데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 필시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닐 테지.”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이야 룩스가 옆에 있으니 괜찮지, 만약 룩스가 그때 정말 죽은 거였다면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눈물을 쏟아냈을 게 분명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하니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아빠가 입을 열었다.

“이전에 말했던 별장, 혹시 기억하나?”

별장?

아, 그 바다가 잘 보여서 방계가 많이 탐냈다는 별장 얘기인가?

“바다가 예쁜 별장 맞죠?”

“기억하는군. 모레 같이 가지 않겠나?”

갑자기?

당혹스러울 만큼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묘하게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여행 가는 거예요?”

“여행이라면 여행이고, 유배라면 유배일 테지.”

“유배요?”

어떤 잘못을 지었길래?

아니지, 황제는 아빠에게 죄가 없어도 탓할 게 분명해.

분명 이번에도 그럴…….

“누굴 죽였더니 나더러 자숙하라더군.”

네?

나는 멍한 눈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분명 새삼스러운 일은 아닌데, 믿고 있었던 만큼 괜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황제가 괜히 아빠를 탓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게다가 저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아빠라니, 과연 소문의 벨로크 대공!

“누, 누구를요?”

“셰인트 백작.”

“…….”

“널 해코지한 여자의 부친이지. 네게 위협이 될지 모른다 생각하니 살려둘 수 없더군.”

아빠는 내가 모를지도 모른다고 여겼는지 다정하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정작 나는 ‘셰인트 백작’을 듣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들었는데도.

“그러면 저 때문인 거네요?”

“내 선택이었을 뿐이다.”

나는 이불만 움켜쥐었다.

저렇게 말한다 한들 결국 나 때문인 건 마찬가지니까.

나와 얽히지 않았다면 아빠가 셰인트 백작을 죽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회귀하기 전에 그가 멀쩡히 살아있었듯이.

‘그래도 다행이야.’

내내 셰인트 백작도 함께 걸렸으나 손 쓸 도리가 없어 내버려 두기만 했는데, 이렇게 해결해주다니 달갑기 짝없다.

이런 거 보면 내게도 악당 기질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만큼 여기에 남고 싶다면 그래도 되…….”

“갈래요!”

내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치자 아빠가 멈칫했다.

왜 놀라지? 내가 이렇게 흔쾌히 대답할 줄 몰랐나?

수도를 떠나면 돌아오기 전까지 마리 언니를 못 보게 될 테니 아쉽긴 하지만…….

“별장 구경하고 싶어요.”

나 때문에 내려가는 사람을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는걸.

내가 단호한 눈으로 쳐다보자 아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분명 네 마음에도 드는 곳일 거다.”

이렇게 아홉 살,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계획에 없었던 여행이 결정되었다.

8. 변화

쪼롱 쪼로롱―.

창 너머 울리는 맑은 새 소리에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던 그때였다.

쿠웅!

멀리서 울린 듯 미약하지만 확연한 진동에 나는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제법 커다란 하얀 짐승이 날 보며 꼬리를 붕붕 흔든다.

―베리! 이거 봐!

하얀 짐승, 룩스가 크고 두툼한 앞발로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탕탕 두드렸다. 그리고 룩스의 앞에 있는 건…….

“으악! 곰! 곰이야!”

때마침 지나가던 하인이 들고 있던 식자재가 담긴 상자를 떨어뜨리더니 크게 비명 지르며 허둥지둥 달려 나간다.

저렇게 놀라는 걸 보니 새로 온 하인인가 보네. 곧 집사가 안정시켜줄 테지만.

―근처에 이게 어슬렁거리길래 잡았어! 잘했지!

애꿎은 하인을 놀라게 한 주범은 해맑게 나를 올려다봤다.

평화로운 아침의 시작이었다.

* * *

지방에 있는 별장은 직접 보니 실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저택 안에 있어도 백색 모래사장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눈에 보였으니까.

조금 멀리 나가면 산호초까지 보인다는 말에 몇 번 배를 타고 나가봤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어째서 아빠의 친척들이 죄 탐냈다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랄까.

투명하게 일렁이는 연옥빛 바다 아래 다채로운 색의 산호초들과 많은 물고기라니!

나중에 망명하면 이곳에 오고 싶어도 못 올 거라 여기니 아쉬워질 정도였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 중에는 여기까지 헤엄쳐와 저 아래까지 들어간다는데 나는 엄두가 안 나서 한동안 뱃놀이만 즐겼다.

별장에는 바다뿐만 아니라 조금 바로 뒤로 울창한 숲도 있었는데 바다가 질린다 싶으면 숲속을 산책할 수 있어 좋았다.

아침부터 룩스가 곰을 잡은 것처럼 야생 동물이 꽤 있어 위험한 곳이라지만, 내게는 룩스가 있어 안전했다.

처음에 강아지처럼 작던 룩스는 하루가 다르게 점차 커지더니 2년 정도 지나서는 예전에 봤던 마물과 비슷한 덩치로 자라났다.

점차 커지는 룩스를 보며 ‘바깥에서 지내게 해야 하나?’하고 걱정을 많이 했다.

이대로 커지면 저택에 들였을 때 천장을 다 부술 기세였으니까. 애당초 문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겠지만.

이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룩스는 제 몸의 크기를 자유롭게 줄이고 키울 수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그냥 되던데?”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행인 일이지만.

덩치가 커진 룩스는 힘도 세지고 입에서 서릿바람도 뿜어냈다. 서릿바람을 맞은 맹수들이 얼어붙는 걸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이래서 마물이구나.’ 싶으면서도 암흑 시장에서 조우한 마물이 저걸 쓰지 않아 다행이다 싶어 때때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저 서릿바람은 고작해야 하루에 두 번 정도 쓸 수 있는 듯했지만, 룩스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하며 맹수들을 사냥했다. 아까 곰을 잡은 것처럼.

이제는 꽤 자주 있는 일이다 보니 별장에서 일하는 사용인들 대부분이 룩스가 벌이는 사고에 적응했다.

가끔 새로 들어온 사용인이 예상치 못한 광경에 놀라고는 하지만…….

금세 익숙해지겠지. 다른 사람들처럼.

“아가씨, 수도에서 온 소포예요. 방금 왔어요.”

“아, 고마워.”

빵과 스튜, 샐러드를 곁들어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니 샤비가 내게 두툼한 종이에 쌓인 물품을 건네줬다.

소포를 감싼 마 끈을 확인하니 작은 종이가 달려 있다.

[베리에게, 마리가.]

“마리 언니가 보냈네.”

예상한 바이긴 했다. 수도에서 내게 이런 소포를 보낼 사람은 마리 언니 아니면 첼시뿐이었으므로.

지방 별장으로 오기로 한 이후, 첼시는 수도에 남고 샤비는 날 따라왔다.

예전에 동생들이 많다고 들은 것 같아 샤비는 못 오겠거니 했는데, 바로 아래 동생이 나이가 제법 차 독립한 상태라 아래 동생들을 돌봐줄 수 있다나.

반면에 첼시는 나이 많은 부모님이 걱정된다며 수도에 남았다. 자연스레 완자도 수도에 있는 대공저에서 계속 지내고.

대신 첼시는 편지로 수도의 유행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써서 보냈다.

둘 외에 카드릭도 내게 가끔 편지를 보내긴 했다. 그러니까 처음 지방으로 내려온 뒤 한 1년 정도.

하지만 나는 일부러 카드릭의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았고, 편지는 점차 뜸해지다 종래 끊겼다.

그게 어언 6년째니 사실상 카드릭과 내 관계는 끊어졌다고 보는 게 옳겠지.

나였어도 상대가 1년 가까이 답신이 없으면 정나미 떨어졌을 테니까.

나는 끈을 풀고 마리 언니가 보내 준 것을 확인했다.

“귀여운 망토네요?”

“그러게. 장갑도 있네. 곧 겨울이라 보냈나 봐.”

“아가씨의 생일 때처럼 옷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샤비는 웃었지만, 지난 기억을 떠올린 나는 살짝 시무룩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