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일단 질문 주신 것들은 대부분 맞아요. 수도와 황궁은 꼭 다른 세상 같았답니다. 그리고 멋진 영식은……. 네, 찾았답니다. 춤은 적당히 춘 것 같아요.”
“찾았다고요? 혹시 미래를 약속하셨나요?”
“부끄럽게도, 약혼하기로 약조했어요. 아직 서류가 완전히 오간 건 아니지만요.”
파트리샤의 말에 곳곳에서 감탄이 흘러나오고 이어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나도 진심을 담아 파트리샤에게 축하를 건넸다. 파트리샤한테는 좋은 일이었으므로.
어느덧 화제는 파트리샤가 예비 약혼자와 만나기까지의 과정과 그사이에 일어난 일화로 옮겨졌다.
“……춤을 추다 더워져서, 잠깐 정원에 나와 있는데 조금 전 같이 춘 영식이 저를 다급하게 부르며 뛰어오시더군요. 그러더니 제가 손수건을 떨어뜨렸다는 거예요.”
“손수건을요?”
“네. 그런데 저는 손수건을 가져간 적 없거든요. 그래서 그건 제께 아닌 거 같다고 다른 레이디의 것을 착각한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요? 정말 다른 분의 것을 파트리샤의 것으로 착각한 거였나요?”
“음, 결론만 말하면 다른 분의 손수건이긴 했어요.”
“세상에! 어쩜 그런!”
이 자리에서 가장 어린 시냐가 흥분하며 외쳤다.
얼굴이 붉어진 게 꽤 화난 듯했으나 상대가 파트리샤의 약혼자인 만큼 차마 대놓고 분은 못 터트리는 티가 역력했다.
“그 손수건의 주인이 제 약혼자였거든요.”
이윽고 들린 파트리샤의 말에 금방 화를 누그러뜨렸지만.
“그런데 그 영식은 왜 자기 손수건이면서 왜 파트리샤를 따라 나와 손수건을 흘렸다고 말한 거예요?”
“파트리샤한테 말 붙여 보려고 한 거 아닐까요?”
“아……!”
내내 나처럼 듣기만 하던 리리카가 말하자 주위에서 깨달음을 얻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리리카의 말이 맞아요. 손수건은 제 것이 아니라 했더니, 저와 더 대화하고 싶어 계기를 만든 거라고 하더군요.”
“어머.”
여기저기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들 뒷얘기를 더 해달라고 그녀를 졸랐다.
‘재밌긴 하네.’
나도 내심 파트리샤가 뒷얘기를 더 해주길 바랐으나 아쉽게도 그게 끝이었다.
파트리샤가 옅게 웃으며 “이 뒤는 아직 저와 제 약혼자만 알고 싶어요.”라고 말해서였다.
“그보다 제 약혼자 이야기를 하느라 본의 아니게 자이라의 질문을 무시하게 됐네요.”
“저요? 제가 어떤 질문을 했었죠?”
“황태자 전하 말이에요.”
“아! 아! 그랬죠. 황태자 전하를 뵈셨나요?”
“아쉽게도 황태자 전하를 뵐 일은 없었답니다. 그분의 성년식은 2년 뒤라더군요. 공식 석상에서 뵐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기회가 황태자 전하의 생일연회와 신년제뿐이더군요. 하지만 제가 생일연회에 어떻게 가겠어요?”
“그건 그러네요. 그렇다고 신년제까지 수도에 남아있을 수도 없고요.”
“맞아요. 고모님과 대공 전하 덕분에 무사히 수도에서 성인식을 치렀지만……. 신년제까지 신세를 질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공녀님.”
파트리샤가 돌연 날 보며 인사했다.
“공녀님께서 대공 전하께 말씀해주신 덕분에 예쁜 드레스를 맞출 수 있었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매해 벨로크 대공가 예산안에는 가신들을 위해 마련해둔 예산이 따로 있었다.
그러니 내가 아니었어도 파트리샤는 벨로크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맞췄을 테다.
파트리샤는 내가 아빠한테 전해준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오히려 더 감사를 표하겠지.’
리리카를 비롯해 몇 년을 봐온 친구들인 만큼 상황이 절로 그려졌다.
이럴 때는 가만히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답인지라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 어쨌든 황태자 전하를 못 보셨다니 아쉬우시겠어요. 언제 다시 수도에 갈 수 있을지 모르는데.”
“조금 아쉽긴 해요. 수도에 있을 때도 황태자 전하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들었거든요. 아름답고 멋지신 분이라고. 그래서 한번 뵙고 싶었는데…….”
다시 화제가 옮겨간 줄 알았는데 또 카드릭 얘기라니.
오늘따라 불편한 이야기투성이라 나는 괜히 디저트를 먹는데 열중하는 척했다.
단 걸 좋아하긴 해도 입이 짧아 많이는 못 먹는 만큼 아주 작게 조금씩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자이라의 성인식은 내년이죠? 저는 못 봤지만, 자이라는 실베스터 공자님을 볼 수 있겠네요.”
실베스터? 아, 그 황금 사슴을 인장으로 쓰는 가문.
오랜만에 들은 가문이라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기억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들어 대화 소리에 집중했다.
“실베스터 공자님이요? 그분은 누구죠?”
“실베스터 공작가의 외동 아드님인데 황태자 전하 못지않게 엄청난 미남이래요. 내년에 성인식을 치르신댔고요.”
“정말요?”
“저도 수도에 있을 때 소문으로만 듣고 보진 못했으니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 않을까요? 게다가 촉망받는 검술 천재래요!”
“검술 천재요?”
“네. 별 탈 없으면 몇 년 안으로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 될 것 같다더군요.”
“그 정도라니, 검술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하네요.”
가만히 얘기를 듣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실베스터 공자는 병약하다고 알고 있는데…….”
“맞아요! 2년 전쯤만 해도 병약해 오늘내일하는 때가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공녀님도 실베스터 공자를 알고 계셨군요?”
“혹시 따로 인연이 있으신 건가요?”
기습적으로 들려온 물음에 나는 잠시 몸을 움찔거리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만난 적은 없고 예전에 얼핏 들은 게 전부야. 사실 나도 잘 몰라.”
내 말에 한껏 눈이 반짝였던 이들의 얼굴 위로 실망이 번졌다. 대체 뭘 기대한 건지.
어쨌든 실베스터 공자의 이야기가 나온 만큼 나는 내 궁금증을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병약했던 공자가 어쩌다 그렇게 됐대?”
“음,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건강해지고 싶어 검술을 배웠는데 바로 천재적인 두각을 드러냈다는 것만 알아요.”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천재란 원래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나고는 하니까.
그보다 황금 사슴 인장에 한때는 병약했으나 지금은 검을 잘 쓰는 검술 천재 공자라니.
‘정말 실베스터 공자가 그 남자인 건가?’
이제는 흐릿하다 못해 단편적인 파편처럼 남은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던 때다.
“검술 천재에 집안도 훌륭하고 잘생기기까지……. 다 갖춘 분이군요. 부러워요, 자이라.”
“네? 에이, 제가 부러울 게 뭐가 있어요? 리리카도 내년에 같이 성인식을 치르는걸요? 게다가 저희는 그저 실베스터 공자님을 뵐 기회만 있는 거고요.”
“뵐 기회라도 있는 게 어디에요? 공녀님의 성인식 때는 황태자 전하가 계시지만, 제 성인식 때는 아무도 없는걸요.”
시냐의 투덜거림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공녀님께서는 황태자 전하를 뵙겠네요. 사촌이시니 인사 정도는 하실 테고요.”
“어쩌면 실베스터 공자를 볼 수 있을지 모르고요!”
갑자기 쏠린 이목에 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내 성인식이 어떨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 * *
그로부터 몇 시간 더 수다가 이어진 끝에 다과회가 끝났다.
다과회가 끝나자 룩스가 제일 좋아했다.
―집 가는 거지? 집!
‘응, 이제 돌아갈 거야.’
―가면 숲에서 뛰어놀 거야! 누님도 보러 가고!
비록 룩스가 파르지 남작가를 좋아하긴 했지만, 뼈다귀를 다 먹고 나면 할 건 없는데 얌전히 있어야 해서 오래 있는 건 힘겨워했다.
‘나도 그렇고.’
몇 시간씩이나 가만히 앉아서 대화만 하는 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꽤 지치는 일이었다. 흥미로운 화제만 이어지면 좋을 테지만, 별 관심 없는 이야기에까지 귀를 기울이며 반응해줘야 했으니까.
마차에 올라타기 전에 주최자였던 리리카가 얼굴을 설핏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는 곤란하셨죠? 죄송해요, 공녀님.”
“아까?”
“성인식 관련해 황태자 전하와 실베스터 공자 얘기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자이라와 시냐를 대신해 사과드려요.”
“괜찮아. 대화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이전부터 자이라와 시냐는 카드릭과 수도의 열풍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종종 내게 수도에 생활할 때 어땠느냐고 묻는 때가 많아 별생각 없었다.
“넓은 아량에 감사드려요. 그리고 공녀님께 드릴 게 있어요.”
리리카가 뒤에 있던 하녀에게서 책을 받아 내게 전달했다.
“책?”
“추천할만한 엘피다 여행지를 기록한 책이에요. 평소 관심이 많으셨으니 어느 정도는 아시겠지만……. 이번에 새로 구한 책이어서요. 나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여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슬쩍 내용을 보니 삽화가 꽤 세심한 게 읽어두면 좋을 것 같았다.
책을 덮어 잘 갈무리한 나는 방긋 웃었다.
“챙겨줘서 고마워. 가서 읽어볼게. 매번 신세 지네.”
“신세라니요. 공녀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쁜걸요. 언제든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 주세요.”
리리카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늘 차분한 그녀는 유독 칭찬이나 좋은 말에 약했기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미 충분한걸.”
“그래도요.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구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으니까요.”
내가 친구는 참 잘 뒀다니까.
“그럼 다음에, 생기면.”
나는 리리카의 배웅을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 적막하게 있으니 아까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게 다시금 떠오른다.
‘실베스터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