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그래. 벨로크 가의 공녀를 들이기로 했단다. 아직 어리니 공식 석상에 대동할 일은 거의 없겠지만.”
찻잔을 내려놓으려던 엘리제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나니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이다.
카드릭이 이런 걸 물어보던 성정이던가?
‘그럴 리가.’
엘리제가 김빠진 옅은 웃음을 흘렸다.
공식 석상이 아니면 얼굴 한번 보기 어려운 아들 아닌가.
‘그러고 보니 벨로크 공녀와 잘 어울렸다고 했나?’
카드릭과 사이가 소원하다 하여 관심마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제는 예전에 제 남편 혹은 시녀 중 한 명이 흘리듯 말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근래 추가로 들은 게 없으니 둘 사이에 딱히 왕래가 있었던 것 같진 않은데…….
“네가 내 시녀를 뽑는 일에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구나.”
“어머니의 일이니까요.”
엘리제가 이상한 눈초리로 보자 카드릭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벨로크 공녀는 제 하나뿐인 사촌이기도 하고요.”
아마 저게 본심일 테다.
‘그보다 사촌이라…….’
꽤 그럴싸한 이유다. 저 말을 입에 담은 게 제 아들이 아니었다면.
“네가 혈육에 정을 붙이는 줄 알았다면 동생을 만들어줄 걸 그랬구나.”
물론, 딴에는 농담이다.
제 남편과 사이에 난 아이는 한 명이면 되었으니까.
굳이 둘은 필요하지 않다. 애정 없이, 그저 서로의 이해와 타산을 위해 결합한 관계에서 둘째가 필요할 리가.
만약 카드릭의 몸이 허약했거나 어딘가 덜떨어지는 구석이 있었다면 달라졌겠으나 그렇지 않으니 이런 가정은 의미 없다.
“없이 자랐기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지도요.”
누가 제 남편의 아들 아니랄까 말도 잘하지.
엘리제는 차를 마시며 찻잔 너머로 카드릭을 흘겼다.
카드릭은 수려한 외모의 상당 부분뿐만 아니라 성격 면에서도 제 남편을 닮았다.
그나마 다른 점을 꼽자면 제 남편은 꽃 같은 얼굴과 달리 속에 독사 수백 마리가 들어찬 것처럼 간악하고 잔혹했지만, 카드릭은 냉소적이라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정도일까.
결과적으로 저 둘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어쨌거나 엘리제가 느끼기에 둘은 확연히 달랐다.
“잔이 비었으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벌써?”
벨로크 공녀를 보러 온 게 아니었나?
“검술 수업이 있어서요.”
카드릭이 싱그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거웠습니다, 어머니.”
물러가는 카드릭을 보던 엘리제는 주변 이들에게 찻잔을 치우라고 명했다.
‘벨로크 공녀…….’
처음 제 남편이 벨로크 공녀를 시녀로 들이라고 말할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깊숙이는 잘 몰라도 제 남편이자 황제인 델러노는 벨로크 대공을 제 좋을 대로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야 ‘형제’라는 이유로 미친 살인귀를 품어주는 미련한……. 혹은 착하다 못해 무딘 황제로 통하는 모양이지만.
‘새로운 명분이라도 주려는 모양이겠거니 했는데.’
겸사겸사 어린 조카까지 챙기는 인자한 황제라는 허울도 쓰고 말이다.
그런데 카드릭이 개인적인 관심을 드러낼 줄이야.
엘리제는 무미건조하던 일상에 아주 작은 흥미와 호기심이 싹 트는 걸 느꼈다.
* * *
황후궁에 도착했다고 해서 바로 황후를 만난 건 아니었다.
날 데리고 온 시녀, 데보라 백작 부인으로부터 봉급과 예절에 관련해 몇 가지 확인을 마친 뒤에야 황후가 있다는 정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데보라 백작 부인의 뒤를 따라 한발 한발 나아가는 동안 긴장감이 고조된다.
황후가 날 어떻게 여기고 있을지 감이 안 잡혔으니까.
‘밉보이지만 않으면 좋겠다.’
날 좋아해 줄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지만, 그래도 고달파지는 것도 사절이었다.
‘편한 게 좋은 일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던 그때였다.
맞은 편에서 낯설지만, 한편으론 익숙한 느낌이 드는 내 또래의 소년이 보인 건.
짧지만 가지런한 은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
‘설마?’
긴가민가하던 때, 날 안내하던 데보라 백작 부인이 걸음을 멈추더니 앞에 오는 소년을 향해 인사했다.
“태양의 영광이 닿으시길.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인식하기 무섭게 내 몸도 예법에 맞게 인사하고 있었다.
쿵쿵, 심장이 가파르게 뛴다.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마주할 줄 몰랐으니까.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슬쩍 고개를 들자 곧바로 붉은 눈과 마주쳤다.
‘날 보고 있었어?’
나와 눈이 마주하자마자 카드릭은 금세 시선을 돌리고는 우리를 지나쳐갔다.
싸늘한 반응.
내가 대응한 게 있으니 반겨줄 거라 기대한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왜 서운하지?’
웃기는 일이다. 내가 먼저 관계를 잘라놓고.
카드릭이 내게 친근하게 굴어도 부담스러웠을 거면서.
“전하께 바쁜 일이 있는가 보군요.”
무시당한다고 여겼는지 데보라 부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사실 무시당한 게 맞겠지만.
“황태자 전하시니까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매끄럽게 웃었다.
지난 몇 년간, 리리카와 어울리며 모임에 참석하는 동안 익힌 대외용 웃음이었다.
“황태자 전하는 황후 폐하를 자주 찾아오시나 보네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딱 잘라 돌아온 대꾸에 내 고개가 절로 옆으로 기울어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사적으로 황후 폐하를 뵈러 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방금만 예외일 뿐, 아마 뵐 일은 없을 겁니다.”
사이가 안 좋은가? 그래도 자주 안 온다니 다행이다.
“저기 계시는군요.”
데보라 부인의 시선을 따라가니 화사한 꽃들 사이로 앉아 있는 금발의 여성이 보였다.
‘저분이 황후 폐하…….’
더 감상할 새도 없이 데보라 백작 부인이 인사를 표했다.
“황후 폐하, 명하신 대로 벨로크 공녀를 데려왔습니다.”
“영광이 드리우시길. 베로니카 나비드 벨로크입니다.”
“어서 와요, 공녀. 그리 엄격하게 예를 차릴 것 없어요.”
황후의 말대로 자세를 편히 고친 나는 그제야 황후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미인이시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금색 머리카락과 하늘처럼 맑은 푸른 눈을 가진 황후는 정말 빼어난 미인이었다.
내 또래의 아들을 둔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하긴, 아빠도 나이에 비해 여전히 젊어 보이니 이상한 건 아닌가…….
“갑작스러운 지목이라 고민이 많았을 텐데 흔쾌히 하겠노라 답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폐하. 영광스러운 자리인걸요.”
내 말에 황후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내가 말실수했나? 아닌데.
의아한 눈초리로 있는데 황후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공녀가 이리 귀여운 줄 알았다면 진즉 볼 걸 그랬군요.”
비꼬는 건가? 아니면 진심?
황후의 의중을 헤아리려 애쓰는 동안 그녀가 마저 덧붙였다.
“공녀가 진짜 내 시녀처럼 행할 필요는 없어요. 가끔 나와 말동무해주면 좋겠군요. 황궁 도서관이나 관심 있는 곳을 둘러보러 다녀도 좋아요. 필요한 게 있다면 데보라 부인에게 편히 부탁하고.”
돌아온 말들 역시 내게 너무 후하다.
이거 말이 황후를 보좌하는 시녀지, 실질적으로는 시녀가 아니지 않나?
마치 오랜만에 놀러 온 귀여운 조카에게 하는 말 같다고 해야 할까…….
물론 관계로만 따지면 그렇긴 한데, 생각지 못하게 후한 대우에 얼떨떨하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겠지.
* * *
이후, 황후는 그냥 돌아가면 여기까지 걸음 한 의미가 없지 않겠느냐며 황후궁 구경이라도 하고 가라고 권했다.
그날 나는 데보라 백작 부인의 안내에 따라 황후궁을 둘러본 뒤, 아빠를 만나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빠는 황후가 이상하거나 힘든 짓을 시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런 일은 없었으니 괜한 걱정이었지만.
‘오히려 나보다는 아빠가 더 걱정인데.’
황제와 아빠 사이에 쌓인 악감정을 알고 있으니까.
겉보기에 아빠는 괜찮아 보여 차마 묻진 못했지만.
다음 날, 나는 다시 입궁했다. 황후의 시녀가 되었으나 사실상 하는 일은 없었다. 드레스나 보석 관리법에 대해 배우긴 했지만, 내 담당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첫날은 괜히 눈치가 보여 최대한 황후궁에 있으려 했다. 그러나 시키는 일도 없는 데다 황후가 날 부르지도 않으니 결국 나는 도서관을 들락날락하게 되었다.
황궁 도서관에는 온갖 책이 다 있었는데 엘피다를 비롯해 타국에 관한 책도 많았다.
‘개인적으로 구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쉬이 볼 수 있으니 내게는 잘된 일이지.’
흥미로운 책 몇 권을 빌려 황후궁으로 돌아온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낯익은 은색 머리카락의 소년을 발견한 나는 멈칫했다. 소년은 다름 아닌 카드릭이었으니까.
순간, 며칠 전에 데보라 백작 부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황태자 전하께서 사적으로 황후 폐하를 뵈러 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방금만 예외일 뿐, 아마 뵐 일은 없을 겁니다.’
분명 그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