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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80화 (80/125)

#80

하필 나가는 길이 이쪽뿐이라 어떻게든 우리는 마주할 터였다.

‘어떡하지? 도망칠까?’

문득 든 생각이었다. 아직 카드릭은 날 발견하지 못한 것 같으니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향하면…….

‘아.’

눈이 마주쳤다. 생각할 것 없이 돌아섰어야 했는데.

후회되었지만, 지금은 다른 대책을 강구할 때였다.

나는 카드릭이 조금만 더 다가오면 인사하려고 준비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카드릭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하려던 찰나 카드릭이 날 지나쳐갔다.

명백한 무시였다. 그것도 이번이 두 번째.

그러나 처음처럼 서운하거나 가슴이 따끔거리진 않았다.

* * *

황후의 시녀로 일하기 시작한 지 벌써 삼 주째에 접어들었다.

시녀가 되기 전에 걱정했던 것들이 무색하게도 나는 황후궁에 제법 적응했다. 황후의 다른 시녀들과 친해졌고.

황후의 시녀는 나를 제외하고 세 명이 더 있었는데, 다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며 전부 결혼한 귀부인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귀여움을 받는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제 아들도 공녀님의 또래인데 어찌나 말썽이 많은지……. 공녀님처럼 점잖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공녀님을 보고 있으면 몇 년 전에 결혼한 동생이 떠올라요. 지금은 지방에 있어 못 본 지 꽤 되었네요.”

“이번에 저택 정원을 새로 꾸몄는데 언제 한번 저희 저택에 방문해주시겠어요?”

이런 말을 하며 사탕처럼 간단한 간식을 쥐여주거나 뭘 해도 편히 있으라며 배려해줬다.

어디 그뿐인가?

책을 읽고 있으면 집중력이 좋다거나 열심히 하는 게 보기 좋다는 등 온갖 것을 칭찬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리 언니 같아.’

샤비와 첼시도 지지 않지만, 마리 언니도 내가 뭘 하든 칭찬해준 터라 자연스레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시녀들과 대화하다 우연히 알게 된 건데 이전에 데보라 부인이 말해준 것처럼 카드릭은 황후궁에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근래 두 번이나 방문한 건 꽤 특이한 일이라고.

“그러고 보니……. 공녀님께서 오신 날부터 두 번이군요.”

저 말을 하며 데보라 부인을 포함해 다른 시녀들이 무언의 시선으로 날 봤다.

그도 그럴 게 변화라고 할 만한 건 나밖에 없었으니까.

“우연일 거예요. 어릴 적에 같이 어울리긴 했지만 벌써 몇 년 전이니까요.”

저렇게 말하긴 했지만, 한편으로 ‘나 때문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곧 카드릭이 날 두 번이나 무시하고 지나친 걸 떠올리고는 금방 부정했지만.

* * *

“공녀님, 황후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나를?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날, 내게 말동무를 해달라고 한 것과 달리 황후는 딱히 날 찾지 않아서였다.

말재간이 없는 내게는 다행인 일이었는데 그것도 오늘로써 끝난 모양이다.

데보라 부인은 황후가 실내 테라스에 있다고 말해줬다. 같이 가주고 싶지만, 황후가 따로 시킨 일이 있다나?

결국, 나는 홀로 실내 테라스로 향했다.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진 문을 통과해 쏟아지는 햇살에 나는 눈살을 찡그렸다.

너무 눈이 부신 빛에 나는 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우선 황후에게 예를 차렸다.

“영광이 드리우시길.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공녀. 다름이 아니라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불렀답니다.”

내게 부탁할 게 있다고?

의아해하며 황후를 보자 그제야 그녀의 옆에 있는 인물이 보였다.

‘……카드릭?’

쟤가 왜 여기 있어?

황후궁에서 카드릭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전부 우연이라고 여기던 참이다.

그런데 이렇게 또 마주치다니! 이번은 황후가 불러 보게 된 것이니 경우가 다른가?

“카드릭의 배웅을 부탁하고 싶은데 해줄 수 있나요?”

배웅을?

바로 대꾸하지 못하던 그때였다. 낮지만 매끄러운 음성이 들려온 것은.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단박에 저 음성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아무렴 이 자리에 한 명밖에 없지만.

“그렇게 말하면 공녀가 무안하지 않겠니?”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억울했지만, 생각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뱉을 만큼의 배짱 따위 내게 없었다.

“공녀, 부탁해도 될까요?”

특히 황후가 저렇게 대놓고 묻는다면 더욱이.

* * *

카드릭은 앞서가는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단아하고 동그란 분홍 뒤통수는 어릴 적 모습과 똑같다.

지금 그들의 관계는 그렇지 못한 듯하지만.

테라스에서 나와 황후궁을 나왔는데도 베로니카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쯤 되면 먼저 말이라도 꺼낼 줄 알았는데.

지난 몇 년간 왜 답신이 없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정말 배웅만을 목적으로 둔 사람처럼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몇 년 전, 다급히 대공령으로 내려간 뒤 아무리 서신을 보내도 답신이 없었던 것처럼.

처음에는 이해했다. 대공가의 기사들이 수도를 뒤진 만큼 대공가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쯤은 짐작했다.

그 뒤 벨로크 대공이 셰인트 백작을 살해한 뒤로 또다시 대공의 살인귀 면모가 도진 것 같다고 대부분 넘어갔다.

그러나 몇몇은 조심스레 베로니카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카드릭은 그게 진실임을 아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그 사건이 일어난 계기는 그의 오만 때문이었다.

말롱 부인의 죽음에 수상한 구석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마무리할 수 있다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으니까.

이런 이유로 인내심을 갖고 계속 서신을 보냈으나 1년이 되니 지쳤다.

그동안에도 회의감이 안 든 건 아니지만, 외면하고자 마음먹어도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1년이 넘은 때에야 그 바보 같은 짓을 그만둔 거고.

베로니카가 없어진 일상은 지독하게 재미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 분명 예전과 똑같아졌을 뿐인데.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제 모친이 벨로크 공녀를 시녀로 지목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틈날 때마다 용건도 없으면서 황후궁을 방문한 것은.

이런 적은 처음이니 제 모친도 신기해서 내버려 둔 모양이나 그것도 끝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베로니카를 불러오지 않았을 테니까.

배웅을 거절하면 베로니카가 무안하지 않겠냐고 둘러댄 것도 결국 한뜻으로 직결되었다.

이제는 피로하니 너희끼리 알아서 협의를 봐라.

‘바보 같네.’

알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이할 정도로 베로니카에게 과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걸.

그런데 어떡하나. 어떤 의미로든 계속 시선이 가는 것을.

하지만 이번만은 절대 먼저 굽히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늘 자신이 먼저 베로니카를 찾았으니까.

한 번쯤은 베로니카가 먼저 다가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베로니카와 만난 뒤에도 일관 모르는 체하며 지나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니 이번도 절대…….

막 정신을 차리고 정면을 보던 때다.

힐끔, 자신을 돌아보던 베로니카와 눈이 마주쳤다.

생각지 못한 마주침에 카드릭은 자신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그것도 베로니카가 도로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보기 전까지만이었지만.

카드릭은 손을 내뻗어 베로니카의 손목을 붙들었다.

모든 게 충동적이었다.

스스로 잡아놓고도 손아귀에 잡힌 얇은 손목에 지레 놀라기도 잠깐이었다.

커다랗게 뜨인 블루베리 색 눈이 그를 응시하자 입술이 절로 움직였다.

“왜…….”

“……?”

“왜 아는 척 안 해.”

아, 정말이지.

실로 바보 같은 말이었다.

* * *

까, 깜짝이야.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카드릭을 올려다봤다.

내내 날 무시하던 그였던 만큼 이번에도 그러려니, 배웅하는 데만 충실했는데 ‘왜 아는 척 안 해.’라니?

“무슨.”

“오늘 말고 이전에도 여러 번 봤잖아. 그때마다 인사도 안 했어, 너.”

“인사했는데요?”

무시한 건 자기면서.

데보라 부인과 함께 인사했는데도 무심히 지나쳤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울컥한다.

“또.”

카드릭이 내 손목을 놓아주며 입을 열었다.

“또 공대하지.”

그리고 돌아온 말이 저거다.

“말 놓기로 했잖아.”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문득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져서였다. 울컥했던 감정도 훅 내려갔다.

“아니면 나한테 여전히 화나서 그래?”

“제가, 아니, 내가?”

“너한테 말롱 부인이 죽었다고 말했잖아. 살아있었는데.”

아…….

이제는 제법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질 법도 한데도 여전히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러고 보니 카드릭이 그랬지. 말롱 부인이 죽었다고…….

한때는 내게 거짓말한 카드릭이 원망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벌써 몇 년 전 일이었다.

일은 해결되었고, 그걸 탓하거나 내내 되뇌기에는 시간이 많이 지났다.

“화 안 났어.”

“화나서 답신도 안 한 거 아니야? 서신 많이 보냈는데.”

“그건……!”

외면하고 싶었던 주제가 나왔다. 나는 사실대로 말할 뻔했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사정은 복잡했지만, 이를 카드릭에게 말할 순 없었다.

어떻게 말할까.

우리 아빠가 너와 네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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