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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81화 (81/125)

#81

카드릭을 만난 이래로 늘 고민해왔던 것이지만, 내 선택은 옛적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예전에는 괜히 강자들 사이에 끼기 싫었던 게 이유였다면, 지금은 아빠의 사정을 헤아려 감히 끼어들 수 없다는 게 다르지만…….

어쨌든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였다. 이렇게 거리를 유지하며 외면하는 것.

나는 자유로워진 손을 숨기며 카드릭으로부터 멀어졌다. 내가 피한다는 게 과하게 티 나지 않게 몇 발자국 정도만.

“여유가 없었어.”

“한 번도?”

“응.”

대꾸하면서도 ‘이건 좀…….’ 싶었으나 뻔뻔스레 굴기로 했다.

마음이 약해져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면 꼼짝없이 낚아진 채 휘둘릴 테니까.

카드릭은 예전부터 눈치가 빨랐으니 아마 내가 보이는 태도의 의미도 간파했을 터였다.

“그렇구나.”

“…….”

“화난 게 아니라니 됐어.”

그게 끝?

나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대체 왜? 하다못해 자신을 속이는 거냐며 화내야 하지 않나?

그때였다.

갑자기 카드릭이 웃었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싱그러운 꽃 같은 웃음이었다.

“역시, 난 네가 있어야 해.”

순간 심장이 덜컥거렸다.

아무렴 저런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리가.

그러나 그런 감정은 정말 잠깐이었다.

어릴 때도 저런 식으로 날 골려댔던 그였다.

저 말 또한 별 의미 없을 터였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받아줄 마음은커녕 거기에 함께 동할 생각조차 없지만.

“너랑 있으면 즐거워.”

저럴 줄 알았지.

아무리 이성적인 나라지만, 심미안마저 발바닥에 달린 건 아니라서 어쩔 수 없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꼬마도 아니고, 이제는 그래도 슬슬 청년의 모습이 보이려는 때였으니까…….

키나 외모가 성장한 것도 있었으나 특히 낮게 변한 목소리가 그 체감을 더욱 일깨웠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모른 척하지 마. 서운하니까.”

만약 저 말을 하는 카드릭의 얼굴이 평소와 비슷했다면 그냥 말뿐인가 보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순간만큼 그의 얼굴이 왠지 비 맞은 완자처럼 살짝 불쌍해 보였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대답해줘.”

“……알겠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건.

카드릭이 돌아간 뒤 멍청한 내 행동을 후회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 * *

“베로니카.”

“네,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아빠를 바라봤다.

아차, 침착하게 굴었어야 했는데.

애초에 식사하는 동안 아빠의 눈치를 살핀 것부터 틀린 듯했지만.

카드릭을 멀리하는 것에 실패한 이후로 나는 혼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요새 별일 없나? 황후가 널 괴롭힌다든가.”

“아, 아니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괴롭히기는커녕 오히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책까지 읽으라고 장려해주니까…….

황후의 다른 시녀들도 비교적 자유롭긴 했으나 나만큼은 아니라서, 나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 황후가 날 괴롭힌다고 말할 수는 없… 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면 굳이 날 불러 카드릭의 배웅을 시킨 게 황후였으니까.

물론 어물어물하며 제대로 매듭을 짓지 못한 건 나지만, 그래도 최초 원인 제공자는 황후였다!

“뭔가 있군.”

움찔.

“뭐가 있기는요. 없어요.”

내 말에 아빠가 날 빤히 바라봤다.

‘으…….’

정말이지, 아빠가 저렇게 쳐다볼 때면 여전히 숨이 막히고는 했다.

아빠의 눈매가 워낙 매섭게 생겨 비롯된 나의 사소한 오해라는 걸 아는 지금에도.

“진짜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리고 내 거짓말 실력은 유독 아빠의 앞에서는 형편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꿋꿋하게 대꾸했다.

게다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후가 날 곤란하게 만들긴 했어도 객관적으로 그녀는 내게 잘해주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빠의 눈치를 살핀 건 오로지 카드릭 때문이고.

내가 여러 번이나 부정한 탓에 아빠는 더 캐묻지 않았다.

“네가 그렇다니 됐다.”

그저 모른 척해줄 뿐.

“그리고…….”

아빠가 짧은 침묵 끝에 덧붙였다.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다. 황제의 명 때문에.”

고대 무기 때문은 아니구나.

안도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심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황제의 명 때문에 자리를 비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달가운 것도 아니지만.

* * *

아빠가 황제의 명을 받고 떠난 지 며칠이 지났다.

황궁 도서관을 다녀오던 나는 괜히 아빠가 예전에 내게 준 반지를 쳐다봤다.

마도구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반지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부식된 곳 없이 새것처럼 반질거렸다.

‘이제 널 지켜줄 것이 있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있다면 부르도록.’

그래도 별장에 있을 때는 저런 말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수도에 다시 올라와서인지 저 말을 하고 갔다.

사실 셰인트 셰인트 백작도, 말롱 부인도 모두 죽은 마당에 누가 날 또 위협할까 싶지만.

‘워낙 평탄치 않은 인생이었어야 말이지.’

짧은 순간에도 여러 사건이 빠르게 지나간다.

게다가 룩스가 있긴 해도, 황궁에 있을 때는 데려오지 못했다.

생쥐였을 때는 그래도 몰래 데리고 오는 게 가능했는데 이젠 그 정도로 작지도 않고.

당사자 앞에서야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씩씩하게 말했지만…….

“신경 쓰인단 말이야.”

“뭐가 신경 쓰이는데?”

히익!

돌연 옆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나는 몸을 크게 떨었다.

으아, 하마터면 책을 놓칠 뻔했잖아.

안도하며 책을 끌어안는데 언제 온 건지 모를 카드릭이 내 옆에 바짝 다가섰다.

“왜 그렇게 놀라?”

“갑자기 말 걸었잖아. 여기서 만날 줄도 몰랐고.”

“지나가다 보이길래.”

음, 하긴.

황궁 도서관에서 황후궁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카드릭도 마침 지나가던 길이었을 수 있지.

나라면 봐도 모른 척했을 테지만, 꾸준히 내게 아는 척하고 다가오는 걸 보면 얜 정말 날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정말이지, 나의 인기란!

“인기척 내면서 왔는데 못 들었어?”

“못 들었어. 그리고…….”

네 변한 목소리가 아직 어색하단 말이야.

나는 무심코 뱉으려던 끝말을 주워 삼켰다.

작게 말했으니 끝말은 못 들었겠지?

“그리고?”

……는 무슨.

이렇게 가까운데 못 듣는 게 이상한 걸지 모르지.

그래. 딱히 큰 비밀도 아니니 사실대로 말하자.

여러 경험을 토대로 생각하면 둘러대다 더 파고들면 곤란해지는 건 늘 나였다.

“네 목소리, 아직 적응이 안 돼서.”

“내 목소리? 이상해?”

“아니.”

“그럼 좋은 편?”

“중간은 없어?”

“내 목소리가 중간은 아니지 않아? 이래 봬도 목소리까지 멋있다는 말 많이 들었는데.”

와, 재수 없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입만 꾹 다물고 있자니 카드릭이 옅게 웃는다.

“네가 듣기에도 좋은 편 맞나 보네.”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가? 옅은 웃음소리마저 듣기 좋다.

그래도 역시 자만하는 사람보다는 적당히 겸손한 사람이 더 좋은 법이라 나는 대꾸 없이 고개를 돌린 그때였다.

“너…….”

갑자기 카드릭이 내 손을 붙들었다.

얘는 왜 이렇게 남의 손을 덥석 잡아?

조금 불만스레 그를 보던 찰나였다.

“손 왜 이래?”

“내 손이 왜…… 어?”

카드릭이 붙든 손을 보니 검지 끝에 핏방울이 몽글몽글 맺혀 있었다.

언제 베였지? 딱히 손 베일 건 없었는데? 혹시 책에 베인 건가?

조금 전까지 손을 대고 있던 책을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책 표지 위에 굳은 핏자국이 작게 보였다.

그래도 면지 쪽이 아니라 표지 위라서 다행이다.

저 정도는 손수건에 물 묻혀서 살살 닦아내면 그만이니까.

“책에 베였나 봐.”

다친 줄 몰랐을 땐 몰랐는데 한번 상처를 의식하고 나니 다친 부위가 따끔하다.

“잠깐만 있어 봐.”

“……?”

고개를 갸웃거리자마자 벌어진 상처 위로 따스한 기운이 돌다가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벌어져 있던 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끔하게 붙었다.

번진 핏방울만 아니었다면 다친 줄도 몰랐을 만큼.

이거 마법 같은데…….

“너 괜찮아?”

“뭐가?”

“황궁에서 마법을 쓰면 반발이…… 아.”

카드릭을 걱정하며 무심코 읊조리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황궁에서 마법을 쓰면 역풍을 맞는 건 오로지 ‘황제의 허락을 받지 못한 자’였다.

아빠는 허락받지 못했기에 작은 마법을 쓰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피를 토한 거고.

‘카드릭은 허락받았겠지.’

어떻게 보면 자그마한 건데도, 나는 또다시 이 사실이 불편해졌다. 정말 새삼스럽게.

“아니야. 고마워.”

내가 손을 내빼려 하자 카드릭이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또…….”

“뭐?”

내 되물음에 카드릭이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 입을 열었다.

“널 보니 또 생각난 게 있어.”

방금 입 모양은 저 말이 아니었는데?

회귀 전과 달리 이제는 귀가 잘 들려 남의 입 모양을 읽을 일이 없어 바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카드릭이 했던 말은 저게 아니었다.

‘또 도망치지…… 였던 거 같은데.’

의심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어쨌거나 카드릭이 할 말이 궁금했던 나는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내 생일 선물 안 줬어.”

이어 나온 말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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